황홀의 건축

정재호 회화展   2007_0418 ▶ 2007_0501

정재호_적산타워_한지에 채색_227×182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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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 블로그_nardoldol.egloos.com

초대일시_2007_0418_수요일_06:00pm

후원_서울문화재단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위태로운 기념비의 매혹 작가 정재호는 공덕 로터리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서 산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마포구 일대를 뒤덮다시피 한 어느 대기업 상표의 아파트이다. 정재호는 아파트를 비롯한 건물을 그리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자기 동네 주변에 수 년 전부터 대규모로 조성된 말끔한 아파트들이나, 시시각각 공덕 로터리 일대를 뭉개고 들어서는 고층 건물들은 그리지 않는다. 또, 아파트라도 한강변에 줄줄이 들어서 있는 아파트나 신도시에 건설된 아파트는 그리지 않는다. 대신에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한 채 스러져 가는 아파트나 낡은 건물과 주택을 그린다. 그는 현대 도시 문명을 대표하는 입방체들에 관심이 있는 걸까? 그건 아니다. 만약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었다면 서울 시내에 자리한 으리으리한 건물들을 얼마든지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 정재호의 시선이 좇는 것은 일단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는 스러져 가거나 오래 된 건물, 둘째는 그런 건물에 깃든 삶의 자취. 이들을 바라보는 정재호의 시선에는 애상(哀想)이 가득 담겨 있다. 이 작가의 눈빛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타인의 삶에 대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지난 기억의 편린일까?

정재호_창신타워_한지에 채색_227×182cm_2007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정재호는 낡은 아파트들을 돌아다녔지만 정작 그곳에 사는 각각의 입주자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입주자들이나 동네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초상화 비슷한 형식으로 그린 그림이 섞여 있을 텐데, 아파트를 비롯한 건물에 주목한 이래 그는 아직껏 입주자를 직접 그린 초상화를 보여준 적이 없다. 아파트에 살고 있거나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는 대신 그는 생활공간 밖으로 비어져 나온 세간을, 복도와 공터 귀퉁이를 그렸다. 이들 세간이란 것도 입주자들의 직업이나 취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들은 아니고, 대부분 흔하고 누추한 살림의 단면일 뿐이다. 정재호는 아파트의 입주자들과 그다지 친해지지 못했다. 입주자들에게 그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침입자, 관찰자일 뿐이었고, 작가 자신도 의심을 가득 품은 이들에게 자신의 작업이 지닌 의의를 간명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정재호_아현빌딩_한지에 채색_130×194cm_2006

애초에는 전통적인 원근법에 충실한 풍경화를 그리던 정재호였지만 2004년과 2005년을 거치면서 건물의 정면이 화면에 고스란히 들어가는 구도에 주력하게 되었다. 작가 자신이『2005년 가을에 웹진』『플라잉넷(www.flyingnet.org)』과의 인터뷰에서도 말했듯, 이런 구도는 작가가 직접 본 모습을 옮긴 것이 아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그리 넓지 않아서 건물 앞의 한 지점을 기준으로 삼고 보려 하면 건물을 모두 볼 수가 없다. 작가는 화면을 구획으로 나누어 건물을 재배치했다. 작가 자신이 발을 딛고 서서 건물을 바라본 시점을 없애 버린 이 구도를 도입하면서 그는 일반적인 풍경화와 선을 긋게 되었다. ● 그런데 이렇게 건물을 정면으로 가득 담은 결과는 '창문으로 가득 담긴' 화면이었다. 이는 자못 흥미로운 대목이다. 작가는 창문을 가득 그리고 싶어서 정면성을 취한 것일까, 아니면 정면성을 취하다 보니 창문에 공을 들이게 된 것일까? 바꿔 말해, 작가는 어느 창문이고 흐릿하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 전면을 화면에 담은 것일까, 아니면 아파트 건물을 정면으로 돌려놓고 보니 표정이 풍성한 수많은 창문들이 작가를 맞이한 것일까?

정재호_소공로빌딩_한지에 채색_130×260cm_2007

정재호의 작품을 볼 때, 작가 자신이 사물을 묘사하면서 느꼈을 법한 즐거움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창문과 현관문 등의 묘사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나의 아파트 건물에서 창문은 세대 단위로 모두 같은 모양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들 창문이 제각각 다름을 공들여 묘사한다. 어느 집 창문은 반쯤 열려 있고 어느 집 창문은 닫혀 있다. 베란다의 경우에도 에어컨 실외기가 놓인 집이 있고 빨래를 널어놓은 집이 있다. 복도형 아파트를 복도 쪽에서 바라본 그림에서는 복도에 내놓은 세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현관문의 색깔과 재질마저도 제각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건물에서 같은 단위로 된 각각의 부분이 서로 닮지 않은 이유는 상당 부분, 세월이 건물에 부여한 퇴락함 때문이다. 어쩌면 이 때문에 정재호는 말끔한 신축 건물을 그리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 커다란 화면 위에 이들 구획을 하나하나 채워 나가는 중노동을 작가가 견딜 수 있었던 건 각양각색의 '문'들을 그려 나갈 때 느끼는 쾌감 때문이었으리라. 정재호의 그림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림이라면 당연히 지니고 있으리라 기대되는 매혹이 있다. 이는 현대 미술이 복잡한 담론과 전략의 경연장이 된 탓에 종종 잊혀지곤 하는 매혹이다. 정재호의 그림에는 애초에 그림을 그리는 자가 목탄이나 붓을 든 손을 빈 화면으로 옮겨서 거기에 선을 긋게 만드는 원초적 욕구가, 바꿔 말해 대상이 뿜어내는 매혹과 그것을 그리는 자가 반응하면서 형성하는 감정적인 자장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정재호_동대문아파트_한지에 채색_170×259cm_2007

정재호가 그린 건물에 의지해서 사는 이들은 앞으로 조금씩이나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더 좋아질까, 아니면 점점 더 나빠질까? 이런 질문에는 이미 실천적인 요구가 실려 있기 때문에, 어느 쪽 답을 고르든 대답하는 쪽에서는 스스로의 공적인 관심과 참여가 미흡했음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이런 질문이 작가 정재호에게는 여전히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있다. 그는 자신이 필연적인 어떤 감정이 아니라 계급적으로 비껴난 예술가의 여유로운 시선으로 퇴락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문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이처럼 고민하고 저어하면서도 그는 풍경에 매혹되어 왔고, 이런 매혹은 줄줄이 늘어선 창문 위로 '에누리 없이' 겹쳐졌다. 그의 그림 속 창문은 하나의 단위 안에 자리 잡은 각양각색의 삶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암시에 머무를 뿐, 그림 속에서 이들 개별적인 삶의 실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정재호_청계타워_한지에 채색_194×130cm_2006

건물을 부분적으로만 그려야 할 때(건물을 소재로 삼은 소품을 그릴 때), 정재호는 창문이나 출입문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건물의 표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창문과 출입문이니까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을까? 작가는 문을 열고 건물의 내부를 들여다보거나 내부로 들어서는 대신, 작가 자신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매개하는(연결하기도 하고 차단하기도 하는) 존재로서의 '문' 자체에 매혹되었다. 고전주의적 회화의 세계에서 창문이 회화의 강고한 지위를 드러내는 은유였다면, 정재호의 그림에서 창문은, 대상과 몸을 섞는 대신 대상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며 대상과 관찰자를 매개하면서도 차단하는 회화의 숙명을 암시한다.

정재호_현대오락장_한지에 채색_194×130cm_2007

정재호는 개별적인 살림살이의 단편들을 주의 깊게 좇았지만 살림살이의 내부에까지 파고들지는 않았고, 대신에 그런 단편들을 어루만지며 사람이 누구나 겪게 되는 숙명적인 소멸에 대해 생각해 왔다. 구체적인 인물이나 일상이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그림은 보편적인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정재호가 보기에 삶은 신산하고, 언제 바닥이 꺼질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며, 결국에는 무너져 내려앉고 휩쓸려 사라질 것이었다. 고달픈 생활을 겪어 본 사람, 붕괴와 소멸에 대한 불안을 품은 사람은 정재호의 그림에 깊이 공감할 수 있을 터이다. 정재호는 서울 바닥에서 중류층으로서의 삶의 틀을 유지하는 일은 녹록치 않으며, 한 발짝만 헛디디면 누구나 삶의 터전에서 유리된 채 표류하는 존재가 될 거라고 느낀다. 그렇다면 그의 그림에 담긴 풍경은 낭떠러지의 초입인 셈이다.

정재호_종로빌딩_한지에 채색_194×130cm_2007

사실 이런 식으로 정재호의 조형적 연원을 살펴보자면 초현실주의 화가 키리코(Giorgio de Chirico)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키리코의 그림에서 풍겨 나오는 음울하고 기묘한 소외감은 정재호의 그림 속 벽돌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느낌과 멀지 않은 친척이다. 한동안 변두리의 아파트를 주로 그리던 정재호는 요즘, 도심에 속하지만 번화가에서 조금 비껴난 공간에 자리 잡은 낡은 건물들에까지 손을 뻗었는데, 이러면서 그의 그림에는 더욱 미묘한 뉘앙스가 담기기 시작했다. 명동과 소공로의 낡은 건물을 그린 최근의 작품들은 대도시의 후미진 부분에 숨은 어둠을 조심스럽게 가리키고 있다. 붉은 원과 푸른 원이 그려진 창문으로 가득한「현대 오락장(2007)」같은 그림은 건물 자체가 사람을 삼키려 도사린 올무 같은 느낌마저 준다.「종로빌딩(2007)」,「아현빌딩(2006)」,「소공로빌딩(2007)」등의 벽면 뒤, 저 기묘한 표정의 창문 뒤에는 대체 뭐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살 길을 도모하면서 움직이고 있을 공간에 대해 필자처럼 '도시전설(urban legend)'마냥 접근하는 태도는 경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정재호라는 작가의 감성이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고 있음은 짚어 봐야겠다. ●「창신타워(2007)」와「적산타워(2007)」같은 그림은 정재호의 최근 작품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낮은 주택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들에서 작가는 여러 채의 주택들을 화면 속에서 쌓아올려 크고 높은 덩어리로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거대한 집적물이 종종 등장하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나 오토모 가쓰히로(大友克洋) 등의 애니메이션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들 그림은 초현실적인 느낌을 더욱 짙게 풍기는 한편, 정재호의 그림이 지녀 온 '기념비적인'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정재호_북극성_한지에 채색_91×61.5cm_2006

기념비적인 성격은 앞서도 언급한 대로 2004년 무렵부터 정재호가 건물의 정면을 화면 가득 담기 시작한 이래 그의 그림을 규정해 왔다. 작가는 아파트나 고층 건물처럼 그 자체로 높은 건물들 뿐 아니라 앞서 언급한 「창신타워」나「적산타워」처럼 낮은 주택들까지도 화면 속에서 높다랗게 쌓아올렸는데, 이는 작가가 은연중에 기념비성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허물어져 사라지는 건물을 그리는 화가가 영속적인 기념비를 추구한다는 설명은 모순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원래 안정에 대한 희구와 소멸에 대한 동경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며 긴장을 증폭시킨다. 폴란드의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벡신스키(Zdzislaw Beksinski)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거대한 형상들처럼, 혹은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영화『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 A Space Odyssey)』에서 문명의 힘이 잠재된 존재로 등장한 '모노리스(monolith)'처럼, 기념비적인 것에 대한 추구는 근원을 동경하고 신비로운 섭리를 명상하는 태도에서 파생하곤 한다.

정재호_다지류_한지에 채색_59×44cm_2006

한때 정재호는 자신이 평면에 그리던 아파트 건물들을 입체물로 제작했는데, 이들 입체물은 조형적인 일관성을 해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념비적인 성격에 비춰 본다면 그가 건물을 입체물로 제작한 것은 논리적인 귀결이다. 돌이켜 보자면, 이 작가는 아파트 건물을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게 할 생각은 했지만 아파트 건물에 담긴 구체적인 생활의 모습을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게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작가의 관심이 어느 쪽을 향했는지가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2003년에 열었던 개인전『인천여행』에서는 작가 정재호의 '영탄(永嘆)'이 두드러졌지만, 이후 아파트들을 바라보며 기념비성을 분명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작가의 눈빛에는 조금씩 다른 색채가 스며들었다. 초기 작품들에서 진하게 배어 나오던 애상과 회한(悔恨)의 느낌은 점차 잦아들고, 이제 그의 그림은 조금은 냉정하고 음울해 보이지만 뉘앙스는 더욱 풍성해졌다. 심연(深淵)을 바라보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 이연식

Vol.20070419b | 정재호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