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의 기억

권기동 회화展   2007_0418 ▶ 2007_0430

권기동_데미안 허스트가 있는 풍경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진혜 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418_수요일_05:00pm

김진혜 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2,3층 Tel. 02_725_6751 www.kimjinhyegallery.com

"일상(혹은 풍경)에 대한 폭력적 시선"과거 2005년 전시도록은 인상적이었다. 특히 앞면의 디자인이 그랬다. 표지에는 전시제목이나 작가의 이름대신 작가의 판화작품 중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이것은 어떤 문구보다 선언적이었음을 기억한다. 두 겹으로 접어서 안쪽은 자동차 백미러에 비쳐진 작가의 안경 쓴 두 눈과 거울의 그림자를 그리고 바깥쪽은 이 형상의 윤곽을 따라 잘라내어, 속의 이미지를 투과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 시선은 단견에 몰래보는 시각(Scopophilia)의 표상으로 이해되었다. 표지의 형식을 문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백미러로 반사시켜 보여준 그의 시선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 눈은 응시(gaze)하는 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선은 반사를 통해 누그러지기는커녕 더욱 날카롭게 대상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시선으로 그는 자신의 주변을 관찰했었고, 또한 재현의 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 시선이 무엇을 향했는지는 전시도록 내부에 그리고 전시장에 걸린 그림들이 설명하겠지만, 혹시 작가 자신에게로도 향하지 않았는지 생각된다.

권기동_데미안 허스트가 있는 풍경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06

호기심이 향한 다른 지점은 바로 그 눈에 서린 다중적인 정서였다. 가린 눈으로 인해 한 특정한 존재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그 감정상태가 중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눈만으로 드러난 작가의 심리적 상태 또한 정확히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뒤따라온 차를 성가시게 바라보는 것인지, 무심코 지나친 것에 대해 관심이 발동한 탓인지, 아니면 뒷좌석의 동행인을 쳐다보는 것인지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상황은 매우 암시적이다. 단지 그의 시선이 왠지 긴장돼 보이며, 약간은 피곤해 보인다. 한편으로 매우 무관심한 시선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선이 주목한 대상에 대해 '폭력성'도 읽혀지는 것은 왜일까? ● Seoul 2005, Central Pennsylvania 그리고 다시 Seoul로 나뉘어져 제시된 작업들은 아마도 그것들이 지닌 지리적 그리고 시간적인 위치를 지시한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대리하는 작품들은 어떤 특정한 장소와 시간의 풍경이며, 더 나아가 작가가 재해석한 감정의 기억들이다. 대체로 장소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게 그려진 건물과 길 그리고 주변의 환경들로 나타나지만, 시간과 결부된 기억의 표상들인 사람들은 부재(absence)와 현존의 중간현상으로 처리되어졌다. 붉게 칠한 면 위에 중복된 인물들 아니면 굵은 선의 실루엣으로만 그려진 형상들 혹은 거친 붓질로 쓸려나가 반쯤은 지워진 상태로 남은 얼굴이나 몸들이 그런 예이다. 형상들은 시간과 결부된 풍경 속에 현존과 부재의 중간지점에 있다. 그런 풍경 속에서 작가는 역사와 사회 속에 숨겨진 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니 - 롤랑 바르트의 입을 빌리면 - 그것을 보고 있었던 그의 눈(시선)을 보여주었다.

권기동_8월_캔버스에 유채_91.9×189.4cm_2006

최근 ● 압구정동. 건물사이 빼곡이 자리 잡은 5층 건물 옥상에 그는 3평도 채 안 되는 작업실을 마련했다. 둘이 들어서면 비좁은 공간 속 한켠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구석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그려진 그림들이 대충 쌓아져 있었고, 20호 정도의 그림이 작은 이젤 우에서 막 그려지던 참이었다. 작업실 밖 옥상 위에는 아래 층 고기집이 설치해 놓은 배기통이 쉴 새 없이 모터소음을 내며, 타는 냄새를 내뱉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그는 유화로 (유화로만!)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 사실적이며, 회화적인 특성이 강한 유화들. 사실 그의 그림을 보면 그리다만 혹은 다시 그리기 위해 둔 극장 간판을 연상시키는 '말초적인' 채색방식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두껍게 발라진 안료의 층위를 간단히 덮어버리는 색들은 그 공격적인 대비로 인하여 그려진 상황에 긴장감을 유도하는 원초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방식은 고유색에 비해 한 채도 혹은 한 명도 높은 색을 구사함으로서 발생하기도 하고, 중간 톤을 생략한 명암처리로 사물의 형상을 드러내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작가는 이런 색 정서를 구식영화, 즉 technic color로 프린트된 영화의 그것에 비유했다. 더 나아가 작가는 밀려진 칠로서 거친 표면효과도 만든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유화를 보다 회화답게 만들어준다는 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이 리얼리즘을 구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회화적 반응이라는 점이 더 올바른 판단일 것 같다. 사실 그가 쓰는 채도 높은 색들은 자본주의의 욕망을 뒤집어쓴 도시의 외관에 적절하게 상응한다. 보색과 형광의 높은 대비로서 드러나는 간판들이 그렇고, 건물의 외장도 다르지 않다. 가히 외설적이라 할 수 있는 도시의 외장들 속으로 작가의 응시는 빠르게 진입한다. 넓은 도로 위에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행렬과 그 속도로 다가오는 건물들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의 질감으로 우리의 시지각에 마찰한다. 그는 정말로 도시의 속성을 잘 표현할 줄 아는 작가다.

권기동_봄_캔버스에 유채_91.9×116.8cm_2006
권기동_커밍쑨_캔버스에 유채_91.9×116.8cm_2006

작가의 응시에는 방향성과 속도가 함께 느껴진다. 작가는 시점 혹은 포커스를 두고 그림 속의 시각을 조인다. 그리고 그 속으로 향한 시선은 매우 가파르다. 그러나 작가는 그림 속에 통일된 소실점(varnishing point)을 두지는 않는다. 몇몇의 작품들은 여러 개의 초점으로 분산된 그리고 시차를 두고 본 한 장소를 붙여놓음으로서 시공의 불완전한 결합을 보여주며, 때론 원근법적으로 통일되어 보이는 작품에서조차 정확한 물리적 관계를 왜곡하거나, 불안한 공간을 구성해 낸다. 더욱이 느닷없이 나타나는 대상들, 예를 들면 서울대 미술관이나 데미안 허스트의 거대한 조형물 따위들이 평온할 것 같았던 풍경을 이질적으로 만든다. 이렇듯 권기동의 회화는 풍경을 이성적으로 재현한 결과가 아니라 즉흥적이며 자의적인 조작이고 그래서 낯설다.

권기동_The Night_캔버스에 유채_233.6×80.3㎝_2007
권기동_8 AM_캔버스에 유채_112.2×162.2cm_2006
권기동_5 PM_캔버스에 유채_112.2×162.2cm_2006

익숙한 풍경을 보는 낯선 시선 작가 권기동의 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한 곳을 보여준다. 정확히 어디인지조차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목이 장소를 지칭하기도 한다. 제목이 없어도 알만한 낯익은 풍경들. 그러므로 작품들은 특별한 관심을 보여줌이 아니라 단조롭기조차 한 일상적인 풍경이며, 실명(實名)의 풍경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익숙해진' 우리의 지리적 정보와 기억에 대해 작가는 낯선 시선을 보낸다. 그 시선이 닿은 풍경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 ● 낯설게 보기는 비판적인 시각 태도이다. 친근한 대상에는 비판도 없다. 작가는 일상적인 풍경을 낯설게 보여줌으로서 그려진 대상을 다시 한번 재고하게 만들고, 대상과 보는 주체와 관계를 재설정하게 한다. 그렇다고 작가의 비판성에 정치적 해석을 가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그의 정치성은 -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 기존의 단순한 이분법적 혹은 당파적 논의로 간단히 해결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비판의식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그리고 더 나아가 감정의 바닥에 쌓아진 충동적인 분노에서 직접적으로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노는 대안이 없음에 탈 정치적이고, 의식의 공동체를 형성하기에는 논리적 구심점이 빈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불온하게 보인다. 그런 그의 시선을 대리하는 풍경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감성을 집약하면서 바라보는 것들에 시비를 거는 발언 행위가 된다.

권기동_War Memorial Painting_캔버스에 유채_130.3×324.4㎝_2006

Hardboiled Landscape ● 권기동의 풍경화는 싸구려 극장 간판이나 이발소그림에 가까운 통속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키치적인 재현은 아니다. 작품들은 자극적인 화법으로 대상을 낯설게 하고 더 나아가 보는 관객에게 모종의 불안감을 준다. 그러나 키치들과는 달리 이러한 불안감이나 통속성으로부터 안전한 심적 거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대상에 대한 관심과 함께 거부감을 유발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도발적이라고 해야 옳겠다. 도발하는 것에는 키치가 담을 수 없는 감정이 있다. 키치의 태도는 대체로 설득하는 것이다. ● 이와 유사한 것을 우리는 이미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보았었다. 권기동과 이전의 민중작가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가 그린 그림이 어떠한 교화적 혹은 제안적인 수사(修辭)를 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권기동의 풍경은 폭력적인 그의 시선과 등가를 이룬다. 그리고 필자는 그의 풍경을 하드보일드 풍경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가 보여준 그림들이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작가의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던 공격적이며 직설적인 재해석 때문일 것이다.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권기동의 회화작업은 사실성과 즉물적 성격을 적당히 함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뛰어넘는 불온한 상상력으로 구축된 낯선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낯선 세계를 보는 시선은 거대하고 제도화된 폭력 앞에 무력하고 일상에 지친 피곤한 눈을 가진 한 개인의 비판적 상상력이다. 나는 그의 상상력과 시선을 지금까지 일상 속에 잊혀져버린 그러나 그것을 향한 폭력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 김정락

Vol.20070418c | 권기동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