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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412_목요일_05:00pm
백악미술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02_734_4205 www.baegak.co.kr
獨學과 熱情으로 이루어진 外玄 張世勳展 ● 일반적으로 작가의 역량과 성정은 작품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학서과정과 '자외공부'를 이해하면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친밀감마저 느끼게 한다. 외현의 경우가 이에 속한다. 그를 아는 사람은 대부분 그가 박물관에 있으면서 골동품만 좋아하고 고집이 세어 자기주장만 일삼는다고 한다. 이는 그의 겉모습만 보고 말한 것으로 마치 작품에 나타난 형태만 보고 내면에 깃들어 있는 따뜻한 정감과 뜨거운 열정을 발견하지 못한데서 기인한 것 같다. 그의 학서과정과 '자외공부'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면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외현은 뼈대가 있는 유학자의 후손으로 일찍이 조부님에게 철저한 유교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매사에 몸가짐을 조심하면서 예의를 존중하는 사람이다. 그는 비록 서예를 좋아했지만 일정한 선생을 모시지 않고 몸소 실천하여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학서과정도 일반 서예가가 유명 서예가에게 도제식의 교육을 받는 것과는 달리 철저한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서예가 좋아 때로는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법첩 하나를 들고 산사에 들어가 이를 외우고 머리에서 환하게 새겨질 때까지 혼자 수백 번 연찬했다. 또한 좋은 글씨가 있다고 하면 거리의 멀고 가까움과 지역의 험준함을 마다하지 않고 기어이 찾아가서 확인하고 감상해야 직성이 풀리는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골동품 상점을 돌아다니며 古人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안목을 넓혔다. 마음에 드는 서예가가 있으면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경험담과 장점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와 술자리를 같이 하는 사람은 대부분 특색을 갖춘 서화가로 그들의 대화는 항상 예술에 대한 열기로 가득 찼다. 이를 보면 그는 독학으로 '轉益多事是我師'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라 하겠다. 이런 그가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많은 고서화를 다루며 '자외공부'에 따른 학양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서화에 관한 모든 서적을 구입하여 탐독하는 것도 부족해서 서예전공 대학원에 들어가 체계적인 학문수업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중국이나 유럽을 방문하여 식견을 높였다. 특히 중국에 가서 유명 작가들과 밤을 지새우며 서론을 토론하고 그들의 서예나 전각의 기법을 연구하기 위해 서로 한 작품씩을 완성해가면서 이른바 그들의 노하우를 터득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이런 집요함과 열정에 중국 작가도 귀찮음보다는 오히려 탄복을 금치 못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이렇게 독학과 열정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전북비엔날레와 전국서예백일장 대상으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간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어 有眼者의 평을 받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인 작품들에서 나타난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첫째, 전통서예와 '현대서예'를 아우르고 있다. 전통서예는 그가 평소 애써 모은 古紙에다 古墨을 古硯에다 갈아 고아한 행초서 혹은 금문에다 예서의 필획을 가미하여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현대서예'는 전통서예의 강한 필력감보다는 시대미를 살려 현대적 특징을 나타내려고 했다. 따라서 장법도 전통서예는 이에 따른 일반적 체재를 이루었으나, '현대서예'는 공간을 살리면서 상징성 혹은 표현성에 치우쳐 새로운 미감을 자아나게 했다. ● 둘째, 작품의 다양성이다. 이는 이번 전시회에서 보여준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전통서예, '현대서예', 한문서예, 한글서예, 문인화, 전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면서 서단의 어떤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세계를 추구했다. 먹의 사용도 濃·淡·乾·濕·燥·潤·焦의 한계를 넘어 심지어 필요하다면 진흙과 안료를 사용하는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작품의 크기도 소품을 위주로 하면서 획일적이지 않고 작품에 따라 다양한 크기에 알맞은 구성을 통해 지루함을 달래주었다. ● 셋째, 대중에게 다가가는 서예이다. 현재 서예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는 서예에 대한 강구는 어쩌면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결과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지만 외현은 적어도 이러한 노력을 작품으로 직접 표현하였다. 예를 들면, 위에서 말한 전통서예와 '현대서예'의 아우름과 작품의 다양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 '사랑'과 '행복' 같은 작품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기 때문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썼고 나머지 한문과 한글이 어울린 작품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다. 문인화의 발문도 이전의 구태의연하고 어려운 한문보다는 평범한 소재를 빌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도록 했다. 이는 평소 자신의 예술관과 심미관을 작품으로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외현은 아직 젊은 작가이고 뜨거운 열정이 있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점을 당부하며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먼저 전통서예는 강한 필력감과 疏密의 조화를 이루는 결구를 강구하므로 이에 대한 연찬이 있어야 할 것이고, '현대서예'는 비록 조형성을 강조하지만 性情과 可讀性을 갖추면서 서예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현재와 같은 열정과 학양을 갖추며 강한 의지로 일관한다면 분명히 서단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질 날이 올 것이다. 부디 대성하길 빕니다. ■ 곽노봉
먹의 경계에 서다 ● 과한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서구적 형식의 현대미술과 그 토양에서 자란 한국현대미술의 최전선을 보아온 평자가 '서화(書畵)'라는 동아시아 전통미술의 형식을 논한다는 것이 말이다. 온전히 서구미술의 교육 세례를 받아온 내 세대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달리 보면, 제아무리 포스트모더니즘을 떠들고 유목주의를 논한다할지라도 '한 시대'라 하는 것은 시간의 뒤와 앞이 혼융하는 것이고, 사라지는 가치가 새로운 것들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즉 시대의 양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어느 한 쪽이 우세하다고 편 가름해서도 아니 될 터이다. 한국현대미술의 한 쪽에서 여전히 서화형식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이유이며, 새겨 보아야 할 책무이기도 하리라. 필자는 여러 해 동안 한국근대미술을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미술사학계에선 근대미술의 기점을 20세기 전반으로 설정하는 것이 통설인데, 몇 몇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그 기점론에 대한 문제제기가 대두되었다. 20세기 전반으로 설정하는 기점론의 주요 동인은 고희동과 같은 서구미술 전공자의 국내 유입과 관련이 깊다. 이에 비판적 견해를 가진 미술사학자는 한국근대미술을 마치 서구미술의 유입과 동일한 잣대로 판단하는 것을 반대한다. 자칫 한국의 '근대'라는 하는 것이 '서구화'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근대'는 무엇이었을까? 필자가 연구를 시작하게 된 의문이기도 했다. 사실, 근대의 여명은 미술이 아니더라도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문화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번져 나갔다. 아주 극단적 결론일지 모르나 근대의 걸림돌은 정치의 퇴행에 있었다. 민중의 주권이 오히려 약탈당한 채 '왕권'은 '황권'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쇄국을 단행하며 스스로 고립에 빠진 것도 주요한 문제였다. '서화'라 불린 한국적 예술 표현의 개념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근대의 모순에서 비롯된다. 또한, 19세기 후반 일본에 의해 번역된 '미학'의 개념이 '일본식'으로 변질되어 동아시아로 확산되던 시기도 이때다. 들고 나던 문화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자기식의 전통과 계승을 부르짖으며 '동양화', '서양화'로 개념 분화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규명했듯이 서구에 의해 명명된 야만의 이름 '동양(Orient)'을 흡수하고 그 반대적 기치로 '서양'을 내세운 아이러니는 우리 근대의 비뚤어진 바로미터가 아니겠는가. 한때 '동양화'였던 우리미술은 그러한 오명을 벗고 당당히 '한국화'로 거듭났다. 그러나 문제도 있다. 온고지신, 법고창신의 정신이 의심스러울 만큼 서화전통은 낱낱이 쪼개져 '서'는 '서예'로, '화'는 '한국화'로 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도 세세히 제 분야를 주장하는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통서법이니 현대서법이니 아등바등하는 꼴은 필자의 무식에도 불구하고 꼴불견이다. 시대의 기치를 망각하고 옛 것만 부르짖는 꼴은 꼴이 아니요, 새 시대라 하여 옛 것을 치부하는 꼴도 꼴이 아니다. '서'라 하여 '화'를 무시하는 꼴도 꼴이 아니요, '화'라 하여 '서'를 닦지 않는 것도 꼴이 아니다. 이럴진대 제 식구 감싸듯 무조건 '서화'를 옹호하는 것도 시대의 이치에 맞지 않다.
지난 20세기의 시대가 근대의 오명을 벗고 현대의 정체성을 찾아 나섰다면, 21세기는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 필요하다. 허울 좋은 주장처럼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라느니, 전통의 현대화라느니,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라느니 하는 껍데기를 버리고 순수한 몸뚱이로 '경계'에 서는 작업이 필요하다. 경계는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이쪽과 저쪽을 통합하는 지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둘 다를 아우르는 시선이며, 시대의 칼날에 서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경계에서 꽃 피울 때만이 진정한 통섭의 아우라가 확산되는 것이다. 외현 장세훈은 그러한 경계에 서고자 한다. 그는 오랫동안 전통서예를 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는, 서예의 '과거'적 지향을 벗기 위해 힘쓴다. 정신은 없고 예술만 남은 현대서예를 꾸짖는 일은 같은 이치다. 옛 글 베끼기에 평생을 바치는 것으로 새로운 예술을 논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는 상형문이 지닌 추상성을 문자에 도입하기도 하고, 문인화의 전통을 모색하기도 한다. 구운 새우를 빗대어 부처의 깨달음을 은유하기도 하고, 잠자리를 먹는 개미를 통해 인간의 삶을 반추하기도 한다. 게와 새, 대나무, 연잎을 그린 그림들은 차라리 허허롭다. 여백의 미를 운운하는 것은 한국화 전통미학의 체계를 이해할 때 구차스러운 일이다. 그의 그림들에서 여백은 이미 적정(寂靜)으로 가득하다. 그가 서예의 현대적 진정성을 찾는 것은 예술로서 뿐만 아니라 '정신'의 주체를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 안에서 다양한 실험의 양태들이 번져 나올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며, 그래야만 서예의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주장이 일견, 아주 일리가 있다고 본다. 주지하듯 전통미술 분야의 대다수가 처한 그러한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는 지금의 시기를 경계에 서는 '모색기'라 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울러 새로운 서화법을 창출하기 위한 모색기. 필자는 더하여, 그가 보다 '전면적 모색'을 궁구하기를 소망해 본다. 새로움의 혁신은 창발적인 에너지가 충만했을 때 터져 나올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이(서예를 제외한 문인화 풍경을 두고 볼 때) 형식적으론 서예의 확장 영역에 있으나 그 영역 또한 문인적 전통을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선 때로 무모한 전진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그 자신이 '경계 넘기'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초의 행위는 화면 가득히 대지의 흔적으로 색칠한 추상성에서 이미 발현하고 있는 듯 하다. ■ 김종길
Vol.20070414e | 장세훈 서예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