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머무는 곳

하성봉 회화展   2007_0411 ▶ 2007_0417

하성봉_순천만Ⅱ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30×162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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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41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00am~06:00pm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시 광복동 2가 1-2번지 Tel. 051_244_8228 http://art.metro.busan.kr

미끄러지는 경계의 풍경 ● 본래의 풍경, 그들이 들어선 공간이 몇 개로 나뉘어져 분절되면서 풍경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새로운 풍경으로 바뀐다. 그러나 그 풍경은 공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미체로서 새로운 풍경이 된 것이다. 하성봉의 작업은 철저하게 현실경, 구체적 지명과 현장답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막상 그 구체적 공간은 그의 작품의 계기일 뿐 그 풍경을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뜻은 다른 곳에 가 있고, 그의 형상들은 다른 것을 가리킨다. 그의 작업은 미끄럽다. 어디로 미끄러질지 가늠하기 힘들다. 그 미끄러움을 바탕으로 어눌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의미를 건져 올린다. 폐허 같은 풍경 속에서, 아니 무수한 생명들이 기어다니는 길로서 드러나는 개펄은 어떤 풍경도 그 개펄을 풍경으로 만들지 못하고 본래의 장소에서 미끄러지게 하는 것이 하성봉의 작업이다.

하성봉_계화도 앞바다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22×244cm_2006

풍경, 개펄, 물, 자갈, 그물, 물길, 섬과 하늘이 그가 다루는 풍경이다. 그러나 이 풍경들은 어느 시점에도 잡히지 않는 무시점을 보여준다. 일정하고 통일된 시점을 통해 잡아낸 것이 아니라 분절되어 시점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시점은 분절된 풍경, 분절된 공간으로 드러나서 그 속에 있는 시간조차 찢어놓는다. 다만 하나의 장소, 개펄이 대상임을 드러낼 뿐이다. ● 하성봉은 그가 바라보는 풍경을 놓치지 않으면서 풍경을 해체하는 시점을 보여준다. 큰 풍경을 잡아가면서 작은 것들을 부각시키는 독특한 어법을 구사한다. 작은 형태들, 작은 것들이 만든 실체감을, 그것들의 미세한 변화와 구체성을 정밀하게 잡아내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로 미끄러질지 모른다. 형태, 의미, 그리기, 풍경들이 모두 미끄러져 어디로 갈지 가늠할 수 없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하성봉_해창_비단 천에 먹, 아크릴채색_406×73cm_2006

그의 작품이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는 특징은 금방 알 수 있다. 점과 선으로 찍어가듯 그리는 화면에는 섬세한 그리기의 노력이 사물들을 비끄러매고 있다. 그러나 점과 선, 어느 것 하나 사물을 분명하게 묘사하거나 대상을 대신하지 못한다. 점들로 이루어지는 형태들은 사물의 형태를 정확하게 잡아내지 못하고 점들로 흩어버린다. 묘사하면서 묘사를 벗어나게 한다. 이 접근은 그의 풍경을 묘사하는 독특함을 담보해 주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들을 말하는 방법이다. 점으로 찍어나가면 사물은 점과 점 사이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공간의 여지를 통해 사물의 형태들이 조성된다. 그가 말하는 의미는 말하는 사이사이의 빈틈들이 점처럼 놓여 사물을 대신하지만 전부 말하지 못하고 빈틈을 만들어 사물로부터 빗나가게 한다. 그래서 자신의 본래 풍경과 의미에서 미끄러져 다른 의미의 길(풍경)을 내고 만다. 그 빈틈이 새로운 의미로 재생성 되는 것이다.

하성봉_포두-5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34.5×65cm_2004
하성봉_갈두마을 가는 길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12×145.5cm_2004

사물들은 점의 흐름 위에 있고 점을 찍는 운동감으로 어딘가로 밀려나간다. 개펄의 물길처럼 진흙들을 밀어내고 물에 잠겼다 드러나는 길 위에 놓인다. 온통 물로 덮여 있어야 할 곳이 이제 물이 없는 풍경으로 드러난 곳, 그가 그리는 풍경이다. 서포, 법성포, 순천만, 계화도, 갈두마을 , 새만금이 시작되는 해창 개펄 등이 이렇게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 그의 개펄은 현장성이 강하다. 거기에는 본래부터 있었던 강파름이 단단하게 박혀 진흙처럼 놓여 있는 곳이다. 감탄할만한 절경이 아니라 광활함으로 이루어진 개펄과 물이 밀린 바다의 모습이 전부인 곳이다. 특별한 경치도 없고, 변화무쌍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시야가 너무 넓어 시야를 닫아버리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하는 벼랑 같은 막막함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이 이제 개발되어 망가져 가는 개펄을 보호하자고 외치는 것도 아니고 그곳에 생활 터전을 두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보이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펼쳐진, 본래 있었던 것들을 있는 대로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개펄에 물길이 있어 바다 속의 개울을 연상하게 하고, 작은 생명체들이 움직인 실핏줄 같은 흔적들이 드러난 표피가 있고, 곳곳에 단단하게 박혀 있는 어사리 하기 위해 쳐둔 그물 지지대들이 말뚝이 되어 그물을 안고 있는 곳이다. 육지 가까운 곳으로 크고 작은 자갈들이 있고, 때로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시대를 말해줄 뿐 그가 특별하게 눈 여겨 드러내려는 사물들은 없다. 빈 개펄과 멀리 물러나 있는 바닷물과 육지로 보이는 섬과 섬을 이루는 몇 채의 집들이 잠시 보여 질뿐이다. 이것들은 모두 점으로 혹은 선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나 선과 점이라는 것이 면을 칠하는 채색과 달라 자신과 자신이 더불어 있는 선과 점들 사이에 빈 공간, 점과 점 사이의 원심력에 의해 생성된 틈을 감추지 못해 언제나 묘사된 사물들은 빈 공간을 가진 미완의 형태로 남는다. 이런 기법으로 이루어진 풍경들에서 겨우 확인되는 장소성은 언제나 주된 주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 풍경 외에 다가오는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어디를 그렸다는 작가의 언급이 있어도, 특정 공간을 드러내기보다 특정 공간을 점이나 선으로 해체하고 익명화시켜 버리고 분절시켜 새로운 풍경으로 밀어내고 만다. 점과 선으로 그려진 그의 작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풍경은 점 사이에 작은 여백을 필연적으로 생성하게 되고 그 여백은 사물을 사물로 묘사하지 못하게 한다. 점으로 해체하거나 구축하려 하지만 점이나 여백으로 흩어지고 만다. 묘사는 대상에 닿지 않고 사실을 벗어난다. 그 벗어남은 점 사이의 작은 여백처럼 개펄은 그렇게 해체되고 만다. 그렇다면 그가 그리고 있는 개펄 풍경은 무엇일까. 그는 무엇을 그리는 것일까.

하성봉_갈두마을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201×120cm_2007

개펄은 바다와 육지의 사이에 있는 미끄러운 장소이다. 그 장소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밀물과 썰물에 의해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 어느 시간에는 드러나지만 어느 시간에는 사라진다. 그 순환은 일정하지만 바다와 육지 어디에도 속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 미끄러움은 사이, 틈, 경계에 있기 때문이다. 점이나 선으로 접근하는 방법처럼, 형태는 언제나 미완이고 물이 빠진 개펄의 물길은 언제나 변화한다. 미끄러지는 곳, 어느 곳으로도 길을 낼 수 있는 곳, 그것이 개펄의 풍경이다.

하성봉_순천만Ⅰ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12×145.5cm_2004

그의 풍경처럼 그의 사유도 미끄러지는 현실의미들을 잡아내는 것, 혹은 의미들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개펄 하나로 세계를 들쑤셔보는 사유를 만들어 가는 것, 환경, 사회, 역사, 현실 어디로든 미끄러져 가는 사유의 자유로움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어디든 길이 나는 자유로움 속에서 시속에 따라 망가지고만 개펄을 보는 것에서 분노를 내보이기도 하지만 세계의 빈틈을 보아내려는 것이 아닐까. 강파른 현실을 말하려 하지만 그의 화면은 현실의 강파름보다 서정적인 풍경이 앞선다. 다만 그 풍경이 미끄럽다는 것이다. ■ 강선학

Vol.20070413c | 하성봉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