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도시 中間都市

이재훈展 / LEEJAEHOON / 李哉勳 / photography   2007_0411 ▶ 2007_0423

이재훈_명륜동, 서울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6

초대일시_2007_0411_수요일_06:00pm

스페이스 아침 서울 종로구 화동 138-7번지 Tel. 02_723_1002 mooze.co.kr

중간도시中間都市_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의 공간 ● 도시를 걷는 행위가 새롭게 조명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고, 말 그대로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의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여기저기에 넘쳐나면서부터다. 보들레르의 산책자Fl neur도 근대화와 도시화 속에 탄생했다. '산보, 빈들거림, 나태함'을 뜻하는 fl nerie에서 유래한 말로 보통 '만보객漫步客'이나 '만유가漫遊家'라고 번역되는데, 그 위에 '한량'의 의미가 겹쳐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이들 산책자들의 특성이라면 역시 '게으름'이 으뜸이다. 어째서 게으름일까? 도시 자체가 눈을 사로잡는 하나의 거대한 무대였고,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보행자들은 관객이 되었다. 하지만 바쁜 걸음을 재촉해 도시를 관통하는 익명의 개인들은 관객이라기보다는 무대 위의 등장인물에 가까웠다. 그러니 가장 사려 깊은 관객은 들판을 산보하듯 '도시를 거니는' 산책자들이었다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이다. 목적지도 없이 사람들 틈에 끼어 걸으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발길을 내딛는 사람들 말이다.

이재훈_시청, 서울_젤라틴 실버프린트_46×46cm_2006

그리고 사진은 이 게으른 산책자들의 시선과 가까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 살펴보아야할 것이 있다. 휴대 가능한 카메라가 대중화되고 사진에 대한 접근성이 보다 넓어지면서, 그리고 회화적인 사진이 아니라 스트레이트 사진에의 열의가 공유되면서 단순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도시 이미지의 채집이 활성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 속의 특별하지 않은 장면을 포착해 인화지 위에 박제화 시키는 사진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환경의 변화 이면에 '산책자'라는 존재가 함께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하여 사진은 비로소 '걷는다'는 행위와 함께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를 제 존재 항목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재훈_세종로, 서울_젤라틴 실버프린트_46×46cm_2006

이재훈 역시 집을 나서면 걷기 시작하는 것이 이 사진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 앞에 서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말하는 그의 말이 상투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의 행위가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되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새로울 것 없는 이미지의 포섭 방식, 즉 도시산책자의 사진이 매번 각기 다른 힘, 각기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재훈_청계천6가, 서울_젤라틴 실버프린트_46×46cm_2005

아르누보풍의 문양이 있는 유리창, 번들거리는 외벽 앞에 세워진 자그마한 날개의 니케Nike, 비닐이 씌워진 채 쇼윈도에 놓인 금박 불상, 맥주집 앞의 마릴린 먼로는 그것들이 원래 있어야할 장소(1897년 드레스덴 박람회의 아르누보 양식, 사모트라케 섬의 니케상, 도갑사의 아미타불, 영화 '7년만의 외출'에서 지하철 환풍구 위에 서 있던 마릴린 먼로)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색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원본 자체를 완벽하게 닮을 수 없었기에 그것들은 친숙함에도 불구하고 낯설다. 흔하게 주변에 있는 것들, 길을 지나며 도시의 한 구석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들이 찍혀있는 정방형의 사진은 익숙한 것의 낯설음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이상으로 고집스럽다. 애초부터 낯설게 있던 그것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고, 길들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묘한 것들과 산책자 사이에 카메라가 있다. 인간 형상이 상품의 형태로 양도된 마네킹. 인간을 닮은 조형물 앞에서 사진가는 마치 그것들에 어떤 인간성이라도 깃들어 있다는 듯 카메라를 들이댄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진짜 인간은 그 반대다. 정말 살아 숨 쉬는 인간의 모습은 너무 과장되고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기에 오히려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 앞의 유리로 씌워진 단상 위에 서있는 의경, 경복궁 앞에 차이나풍의 의상을 입고 나란히 서있는 여자들과 붉은 악마로 완벽하게 분장한 수염 많은 사나이는 인간다움의 흔적을 지워버린 채 마네킹들 사이에 서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적인 것은 가장 비인간적인 것의 얼굴에서 드러난다. 길거리에 나동그라진 신발이나, 스프링이 다 튀어나와 버려진 소파, 얼굴이 깨진 여경 마네킹 같은 것들이 마치 인간의 유령처럼 도시를 떠돈다.

이재훈_경복궁, 서울_젤라틴 실버프린트_46×46cm_2006

사물에 본래 주어져있던 의미가 변형되고 뒤틀리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불쑥 드러나는 낯선 얼굴은 바로 메타모포시스의 증거다. 생명이 있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과 뒤섞이고, 인간은 비인간과 뒤섞이고, 첨단의 도시는 이미 오래 전에 무너진 유적지의 폐허와 뒤섞인다. 친밀한 것은 낯설어지고, 의미 없는 것은 의미 있음으로 전이된다. 실내 공간에서 빛을 향해 온 몸을 뻗어내는 식물은 생의 에너지를 탐욕스럽게 드러내지만 바닥에 가지런히 정렬해 붙어있는 타일 조각 앞에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이재훈_해운대, 부산_젤라틴 실버프린트_46×46cm_2006

그래서 이재훈의 사진들은 마치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힘겹게 설명하는 자기 선언 같다. 뚜렷한 목적도, 이유도 없이 사진가의 시선을 사로잡는 피사체들은 강박적으로 죽음을 암시한다. 마치 사진이 그렇듯 살아있는 것은 박제가 되고, 죽음의 우위를 선언하는 분신들 앞에 도시는 메타모포시스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이 사이에 숨어있다 불쑥 튀어나오는 기괴한 느낌으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 사진의 본질이 죽음과 떼놓을 수 없는 것처럼, 도시 속의 사물 혹은 공간에서 마주치는 익숙함 속의 낯선 얼굴은 피할 수가 없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들과 만나도록 정해져있는 것이다. ■ 전미정

Vol.20070412e | 이재훈展 / LEEJAEHOON / 李哉勳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