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홍지연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411_수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1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민화, 일탈적 사유를 위한 장 ● 홍지연은 어느 한 형식에 머물기보다는 다양한 형식을 넘나드는 편이다. 작가의 손길이 닿으면 대상은 그 본래의 정체성을 잃고 다른 형태로 변형되거나 변질된다. 재맥락화의 과정을 수행한다고나 할까. 이렇게 변형되고 변질된 형상들은 친근하면서도 낯설다. 그 형상들은 전통이나 일상 같은 삶의 주변으로부터 차용된 것들이며, 작가는 이를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각색한다. 이로부터 낯설게 하기와 사물의 전치에 대한 공감이 느껴진다. 사물이나 대상에 덧입혀진 의미, 클리쉐로 부를 만한 뻔한 의미를 비틀거나 뒤집어서 낯설게 보여줌으로써 그 사물과 대상이 클리쉐로부터 놓여나고, 그 이면의 의외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상식적인 맥락 속에선 결코 마주칠 일이 없는 이질적인 사물들 혹은 사태들을 서로 결합시킴으로써 예기치 못한 의미, 의외의 의미,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다.
미술사 인형 연작. 홍지연은 서양미술사의 명화에 등장하는 각종 인물 초상과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광범위하게 차용하고 합성하여 이를 정체불명의 인형으로 제작한다. 대개 둘 이상의 차용된 이미지를 하나로 짜깁기하고 있는데, 이는 혼성모방 즉 패스티시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혼성잡종 캐릭터를 실현한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제작된 미술사 인형을 마치 상품처럼 포장하고 진열한다. ● 이처럼 파편화된 이미지의 짜깁기와 상품으로서의 현란한 외장은 차용과 조작, 그리고 상품화의 수순을 밟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거쳐 예술작품이 상품으로 재생산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미술사 고유의 도상과 상징과 기호의 아우라가 한갓 상품으로 변질돼버린다. 이처럼 예술작품 즉 창작주체의 혼이나 정신의 산물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재현해 보여줌으로써 궁극적으론 그 논리를 의문시하고 거부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자본주의 시대의 예술작품의 위상을 묻는 한편, 예술과 상품과의 관계를 논평하고 있는 것이다. ● 아이콘 연작. 작가는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각종 종교화의 이미지를 스캔 받은 후, 이를 레이저프린트로 출력한다. 그 이미지들은 미술사나 각종 엽서, 그리고 민속종교의 아이콘을 통해 널리 알려진 친숙한 것들이다. 작가는 이들 이미지를 고풍스런 금박액자로 마무리함으로써 종교화가 원래 지니고 있던 아우라를 차용하고 흉내 낸다. 그렇다고 이 작업이 종교적인 경외심이나 예배적인 대상성의 소산은 아니다. 오히려 각종 종교화에 반영된 전통적인 가치관을 의문시한 것으로서, 이를 해체하고 재맥락화한 것이다. 더불어 종교로 대변되는 사회에 만연한 온갖 형태의 권력에 대한 논평행위에도 그 맥이 닿아있다. 말하자면 종교적 행위가 순수한 개인의 신념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행위를 정당화하고 강화하기 위해 고안해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면 연작. 작가는 가면무도회로 우리를 초대한다. 가면은 무엇보다도 일상의 틀을 깬다는 사회문화사적인 의의를 갖고 있다. 특히 바흐친은 가면을 축제와 연결시킨다. 이때 일상이 생산적이라면 축제는 비생산적이란 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반사회적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축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가면이다. 가면은 의식적으로 자기를 무효화하는 익명적인 기호이다. 그리고 가면은 선과 악, 자연과 문명 등 모든 이분법적인 질서의 개념을 위협한다. 가면은 이러한 이분법적인 경계를 허물고, 그 모든 것들로 하여금 등가치를 획득하도록 해주는 양가성의 기호이다. 그런가하면 가면은 자기를 타자 속에 던져 넣는 계기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홍지연의 이 일련의 가면 연작은 주체와 타자와의 경계가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과 함께 주체와 타자와의 상호 내포적인 관계를 주지시킨다. ● 민화 연작. 홍지연의 근작은 조선시대의 민화를 차용하고 각색한다. 전통 민화의 주요 모티브인 모란도나 연화도를 차용한 그림을 보면 그 꽃이 생화보다는 조화처럼 보인다. 이처럼 생화를 흉내 낸 조화로부터 스스로 거짓이거나 가짜임을 은폐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공공연히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키치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그럼으로써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즉 시뮬라크라에 대한 공감이 읽혀지고, 거짓이 실제를 대체한 현실에 반응하는 미학적 윤리의식이 읽혀진다. 유기적인 관계의 맥락으로부터 단절된 모티브간의 이질적인 결합이 실제를 추상화하는가 하면, 상식적인 의미가 전복되고, 의외성이 이를 대신한다.
국화의 긴 꽃잎이 실타래나 머리장식처럼 변형되는가 하면, 하얀 보름달이 떠 있는 화면과 만개한 꽃과의 결합이 상식을 배반하기도 하고, 줄기가 실로 대체된 연꽃 그림에선 그 실을 빼앗으려고 새들이 서로 다툰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까치를 소재로 한 그림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호랑이와 기쁜 소식을 전하는 까치와의 우호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민화 본래의 의미를 비틀어서 그 숨겨진 의미(거짓 혹은 억지 화해)를 드러낸 것이다. 그 등에 나비의 날개가 돋아난 잉어를 소재로 한 그림에선 잉어가 나이를 먹으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민화 속 신화가 일종의 의미놀이의 형태로 변형되고 과장된다. 닭 벼슬과 닭 벼슬 모양의 맨드라미 그리고 닭 벼슬만큼이나 빨간 모란이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 어우러진 그림에서는 이질감과 함께 동물성이나 육식성이 느껴진다.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연화나 부귀영화와 부부애를 상징하는 모란은 민화(원본)에서의 원래의 의미가 전복되고, 의외의 의미가 덧붙여지고, 이질적이고 기이한 의미로 변질된다. 이렇게 의미와 의미, 모티브와 모티브를 가로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견고한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작가에 의해 각색된 민화는 이중성을, 다중성을 드러낸다.
특히 「박제 꽃」에서 작가는 정작 살아있는 생명체인 꽃은 조화처럼 보이게끔 하고, 무기질인 화병은 호피나 새의 깃털 그리고 중첩된 비늘 등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표현하고 있다. 평면적인 화면과 세밀한 묘사 그리고 강렬한 원색은 생화보다는 조화를 연상시키며, 생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낯설음과 이질감을 강조한다. 그런가하면 식물의 줄기에 실로 매달려 있거나 나무줄기에 철 핀으로 고정된 나비 역시 조화와 마찬가지로 박제처럼 보인다. 모든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 내포하고 있을 법한 독성을, 그 불길한 징조를 예감케 한다. 화려함을 뽐내는 것들, 생기를 발하는 것들이 그 화려함이나 생기의 강도로써 그 이면의 이질감이나 낯설음을 부지불식간에 드러내 보여준다. 일견 예사로운 민화의 한 버전을 보는 듯 평범해 보이는 이 그림들은 왠지 보기에 편안치만은 않다. 이런 느낌은 친근함과 낯설음이 중첩된 캐니와 언캐니의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이고 상호내포적인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친숙한 것 속에는 낯선 것이, 낯선 것 속에는 친숙한 것이 이미 그 안에 내재돼 있었던 것이다.
한편, 홍지연은 그림 「징후」에서 전통 민화의 한 장르인 일월곤륜도를 차용하고 있다.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는, 있을 법하지 않은, 불가능하고 부조리한 현실에서 작가는 일종의 불길한 징조를 읽어낸다. 그 징후를 감지한 새들이 백모란과 적모란의 대비가 두드러진 꽃핀 나무숲을 지나쳐 놀라 달아난다. 또한 『레퀴엠』에서는 모란꽃을 진혼곡의 악보에 맞춰 재배치해 그린다. 흑백의 모노톤으로 그려진 화면과, 이를 배경으로 한 모란꽃과의 대비가 암울한 내적 울림을 암시한다. 모란꽃을 진혼곡의 음표로 변환시킨 이 그림에서 모란이 상징하는 삶의 메타포와 진혼곡에 반영된 죽음의 메타포가 하나의 결로 중첩된다. 나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죽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죽어있다. 삶은 이 영원한 죽음, 항상적인 죽음이 꾸는 꿈이며 착각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 그림은 삶의 그림자로서의 죽음을 암시하며, 삶과 죽음과의 희박한 경계를 주지시킨다.
이외에도 만개한 꽃잎을 향해 날아드는 새떼나, 어미 새가 새끼 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장면을 그림 그림에서 수십 마리에 달하는 새들이 판에 박은 듯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섬뜩한 인상마저 드는 이 그림들로써 작가는 원본의 아우라를 상실한 현실을, 복제 이미지가 만연한 현실을, 복제가 생명체의 경계마저 넘나드는 현실을 논평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중앙의 뿌리로부터 사방에 원을 그리듯 피어나는 모란꽃과 국화 그림에서는 일종의 만다라와 같은 종교적인 도상화를 실현하고 있다. 만개한 꽃들 사이사이에는 금강역사, 코끼리, 부처,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뱀, 봉황, 마녀, 사람의 머리와 새의 몸통을 한 설화적 존재들이 마치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그려져 있다. 이 도상들은 그대로 작가의 마음속에서 떠오른 삶의 다양한 형상, 존재의 변용된 형상에 해당한다. 그 자체 윤회설과 영겁회귀 사상에도 맞닿아 있는 이 도상화는 특히 주체를 떠받치고 있는 이질적인 것들에 대해서 말해준다. 즉 주체란 타자들의 무분별하고 우연한 집합의 소산에 다름없음을 주지시킨다.
홍지연은 '기존의 이미지들을 정체불명의 이미지들로 전이시키고 변질시키는 바이러스'에다가 자신을 비유한 적이 있다. 그 자체 정론이나 정설로서 인정받고 있는 원작(원본과 원전의 권위)을 차용해서 이를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형태로 변형시키고, 정체불명의 형태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태어난 미술사 인형연작, 아이콘 연작, 가면연작, 민화연작은 대개 여러 이질적인 계기들이 혼합된 혼성잡종의 형태로 나타나며, 그 자체 순종주의와 순혈주의를 위협하는 계기로서 현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일탈성이 강한 사유(광기)를 구분하는 경계를 의심하고, 이를 넘나들며 통합하는 기제로서 작용한다. ■ 고충환
Vol.20070412a | 홍지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