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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411_수요일_05:00pm
갤러리 진선 서울 종로구 팔판동 161번지 Tel. 02_723_3340 www.galleryjinsun.com
김억, 華城의 추억 ● 우리국토를 기행(紀行)하며, 그 결과를 목판화-풍경으로 보고하던 김억이 최근 또 다른 발품을 팔았다. 경기도 일원의 성곽을 돌아다닌 것이다. 원래 여기저기를 다니며 스케치하고,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관찰하고, 그 곳의 역사와 문화를 파헤치던 김억이고 보면 그의 발품이 그리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성곽을, 그것도 경기도 일원을 집중적으로 답사하고 마침내는 수원화성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과거 유유자적(?)하던 느린 행보와는 다른 무언가를 유추하게 한다. 그러니까 느린 걸음으로 본 다양한 것들을 재구축하던 과거의 화면에 비하면 수원화성이란 소재는 직접적으로 빠르게 서술하는 자세가 도드라지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 이 성곽을 그린 근작들에서는 김억의 기획적 측면, 즉 이전의 작업과는 달리 작업의 목적이 뚜렷해 보인다. 성곽이라는 소재가 과거 단양의 온달산성 풍경에서 등장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전체적인 풍경 가운데 일부분이었지 성곽이 주 소재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김억은 왜 자신의 평소 작업태도에서 일탈하여 기획적인 입장에서 성곽을 소재로 한 작업을 시도한 것일까? 사실 그간 김억이 소재로 삼았던 풍경들은 대개 명산, 강 등의 자연적 풍광이 강조된 유적들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수원화성은 과거와 현재의 도회적 일상이 공존하는 곳이다. 가장 구체적으로 근대사와 현재가 겹쳐지는 현장이 화성인 셈이다. 그래서 김억은 직접 마주친 화성과 현대적 도시 수원의 대비와 조화와 간극을 아우르면서 인문학적 상상력과, 역사와, 기억과, 그 곳 사람들의 삶을 종합적인 연작형식으로 드러내려는 것 같다.
城은 안과 밖의 분리를 통하여 만든 사람들의 목적을 실현하고, 다른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한다. 성문을 닫으면 고립을, 열면 소통을 지향하는 공간이다. 수원화성은 이런 일반적 기능을 넘어 거대한 목적, 즉 천도를 위해 축조된 성이다. 단순한 방어용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과 변혁을 꿈꾸던 정조의 야심찬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려는 장이었다. 많은 경기도의 성곽을 답사했지만 궁극적으로 주시한 수원화성에서 김억은 거대하고 원대한 이념, 과학과 실용, 아름다운 시각의 흔적과 마주치며 상상과 현실이 오버랩하는 강력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또는 기능과 정체성을 상실한 채 안팎으로 병렬한 현대식 건축물들과의 부딪힘과 스며듦이 공존하는 혼성적 공간에 특이한 배경으로 전치된 성곽에서 색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과거와의 연결을 풍경으로 시도한 김억에게 수원화성이 가진 다층적인 내용적/시각적 맥락의 매력이 컸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김억은 바로 이런 역사적 현장에서의 서사와 서정적인 분위기를 뽑아냈다. 마치 조선건국이후 오백년 도읍지였던 개성을 돌아보던 길재의 시조처럼 거기 그대로 있는 풍광에서 일어나는 낯설고 쓸쓸한 회한이나 회고처럼 말이다. 물론 김억이 보는 화성은 그렇게 비극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현장에서 부딪히는 역사적 이미지와의 만남은 어떤 감성적 현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며 김억도 그런 면에서 수원화성을 친숙하게, 그리고 낯설게 드러냈다.
지난 10여 년 간 김억의 목판화 화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길'이었다. 도로, 산길, 물길 등이 화면의 유동성과 움직임을 주도했고 거기에서 어떤 꿈틀거림, 동적인 에너지, 혹은 희노애락의 감정이 드러났다. 이 길의 움직임이 이번에는 화성의 성곽으로 대치된다. 지형에 따라서 꿈틀거리며 前後, 左右, 高低가 살아있는 성곽은 유기체처럼 자연스럽고 생동감 넘친다. 이 길, 물길, 산맥, 성곽 등은 조형적 형태뿐 아니라 의미의 유사성을 동시에 갖는다. 그렇지만 길과 달리 성곽은 자연스런 형태는 비슷하지만 만들어진 목적은 다르다. 무위가 아닌 인위다. 이 인위적 구조물인 수원화성을 통하여 좀 더 적극적인 주제에의 의지를 드러내려는 점이 이번 작업의 축이다. 여기에 접근하기 위해 선택한 형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간 김억이 시도해온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형식/기법/어법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 두 가지가 돋보인다. ● 우선 「화성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1」「화성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2」「화성 화홍문과 방화수류정」같은 작품을 보자. 그가 즐겨 사용하는 세로화면의 부감법俯瞰法과 긴 시점으로 진행된다. 하늘을 나는 새의 시각을 차용하여 대상을 파악하는 상상적/실재적 접근이자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작가가 마주한 풍경의 안팎을 두루 소요하거나 관찰하며 時點과 視點의 이동과 종합, 시간과 공간, 사실과 추리를 두루 섞어버린, 그러니까 작가의 감각과 지각에 의해 파악된 객관적 풍경의 회화적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적당한 거리두기와 몰입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성곽은 꿈틀거리며 현대적 건물들을 아우르며 멀리 긴 거리까지 뻗쳐 있다. 寫實로서의 풍경과 거기에 대한 역사적인 접근과 주관적인 서정이 혼합되며 김억 특유의 화면구성과 칼 맛이 두드러진다. 이 작업들에서 수원화성은 넉넉하고도 여유롭다.
이와는 연계선상에 있으면서도 넓은 가로폭의 大觀적 視點에서 본「화서문과 서북공심돈」「화홍문과 방화수류정2」「서장대와 서남각루」는 프린팅 방식의 실험과 잉크의 물성의 강조로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채색화나 유화의 회화적 텍스쳐를 연상 시키는 음각기법의 역 프린트(먼저 바탕전체를 먹색으로 찍고 그 위에 음각의 돋을 면에 밝은 색을 찍어나가는 프린팅)의 효과는 김억에게 있어서 전혀 새로운 실험이다. 바탕색과 그 위에 찍은 색이 혼합되거나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얼룩의 자연스런 스밈의 효과는 수원화성과 그 주변의 건물, 사람들의 삶을 안개속의 풍경처럼 짙은 우수로 표현해 낸다. 마치 파리나 런던의 안개가 4, 50대인 우리들에게는 과거의 몇몇 로맨스영화를 통하여 짙은 상실이나 처연한 허무의 분위기로 각인된 것처럼, 김억의 이 작품들은 수원화성이 단순한 대상이나 소재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삶에 있어서 멜랑꼬리하고도 드라마틱한 시적 감흥이나 감성을 일깨우는 공간도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위의 두 가지 방식과는 정반대로 철저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대상의 묘사를 시도하는 12개의 연작인 「장안문」「창룡문」「화서문」「서장대」「서북공심돈」「동북공심돈」「동북포루」「서북포루」「서북각루」「화홍문」「남동각루」「성 밖 어린 소나무」등에서 시도된 일판다색 기법, 일명 소멸법 작업들이 있다. 이 기법은 김억이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이 근거리 시점에서의 화성은 높고도 명료하다. 일단 카메라 앵글과 명암법을 철저히 활용한 극사실 화면은 정오의 태양광처럼 콘트라스트가 강하며 따라서 대상은 어떤 분위기도 없이 건조하게 거기에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성곽주변 사람들의 일상도 디테일하게 포착된다. 이 작업들에서의 성곽은 과거의 시간을 유추하게끔 하지 않는다. 오로지 현재와 현실적인 시선만이 있다. 여기에서 수원화성은 유적으로, 그리고 관광지로 고립되고 고독하게 주변사람들의 일상을 보조하는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성주변의 자동차들과 자전거 타는 사람들, 호떡 사먹는 사람, 장기를 두거나 담소하는 사람들,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장사꾼들의 늘어선 파라솔, 안내를 위한 깃발 등이 성곽주변 여기저기에서 일상으로 보여진다. 성의 의미는 망각되었고, 성의 부분 부분들은 모두 제 기능을 잃은 채 정지해 있다. 성은 존재하되 시뮬라크르화 된 관광지 볼거리의 대상으로서다. 여기에 원근법적인 카메라 앵글의 시선과 명암법은 사실성, 재현성을 두드러지게 하며 작가의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표현으로부터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작가가 거리를 둔 자리엔 이율배반적으로 작가의 의도인 비판적 반성돠 시각적 재미가 동시에 남는다. ● 김억이 이 방식을 선택한 것은 다분히 계획적이다. 새로운 판법과 각법과 프린팅의 실험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지속해온 목판화 작업에 대한 개념적인 일탈을 감행한 것이다. 즉 표현성, 서정성, 원거리 부감법 등을 배제하고 재현, 드라이한 앵글, 서 있는 자리에서의 고정된 근거리 시선 등을 선택한 건 목판화의 따뜻한 감성적 특성을 배제하고 Cool한 성격을 구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방식에서는 작가의 개성보다 대중들의 시선에 의한 스냅과 같은 시점이 전개된다. 대중들의 기준과 기호嗜好를 작업에 수용할 때 그림은 난해한 상징을 거세하고 소통을 목표로 하는 일러스트가 된다. 하나의 표지標識, 혹은 기호記號가 되며 불분명한 느낌, 추상적 감정은 소거된다. 이는 목판화의 과거 전통적 삽화기능, 혹은 전달기능이다. 거기엔 작가만의 특수한 세계가 아니라 보편적인 일반인들의 지식과 상식에 근거한 소통성이 있다. 김억은 우리의 현대목판화가 잃어버리거나 배제했던 부분에 대해 의도적으로 작업을 통하여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물론 이 시도가 얼마나 가치있고 성공적이냐 하는 것은 지금 거론할 필요도 시기도 아니다. 그러나 한 작가로서 자신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역설적인 문제의식을 설정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며, 특히 순수미술과 그 외의 미술과의 경계를 선험적으로 재단하는 자세에 비해서 오히려 진보적이라 여겨진다. 특히 유구한 목판화의 뛰어난 미적 전통과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 이 일러스트로서의 목판화의 가능성은 되살릴 일이지 폐기해 버릴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기억으로 살아간다. 지나간 시간 모두가 부피도 형태도 질량도 없는 추상으로서의 '기억'에 집약되어 있지만, 그 기억이 있기에 현재 삶의 유지가 가능하다. 가족도 친구도 직장생활과 사회생활 모두에서 나와 관계된 사람들은 어제, 그제, 일주일 전, 한 달 전, 일 년 전, 오년 전... 에 만났던 사람들이며 기억은 늘 이들과 어떤 식으로든 맺은 관계들의 기록현상이다. 이 개인적인 삶의 단편들인 일상의 기억들을 모두 모으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조합하고, 기록한 것의 총합이 역사다. 비즈니스도 정치도 문화도 예술도 모두 그 안에 있다. 작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김억도 성곽에서 기억으로서의 과거의 역사와 미래에는 역사로 기억될 현재 삶의 모습들을 오버랩하는 시공의 감성적 몽타주를 시도한다. 기억은 주관/서정적이고 역사는 객관/서사적이며, 시간의 몽타주는 이들을 아우르는 형식이다. 거기에서 김억은 관찰자의 입장과 서술자의 입장을 동시에 작업으로 체현해낸다. 그 작업은 풍경과 형상으로 전개된 김억의 정서/이념이며, 양자를 연결해주는 언어도 된다. 거기에 나른한 따뜻함의 여유와 쏠쏠한 재미와 날카롭고 비판적인 사고가 모두 들어 있다. 김억의 화성에서의 추억으로... ■ 김진하
Vol.20070411f | 김억 목판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