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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330_금요일_05:00pm
후원_한솔문화재단
가나아트갤러리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Tel. 02_720_1020 www.ganaart.com
퓨전 금강산, 그 돌아감의 미학 ● 돌아간다. 사람들은 때때로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간다. 뭔가를 잊고 왔거나 계속 가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돌아간다. 그리고 인생도 돌아간다. 한 세상 잘 살다가 자신이 발원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천상병 시인은 썼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돌아가는 것은 운명이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떼쓰는 것, 그것은 철부지의 억지다. 운명의 여신이 내 손을 잡으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미소를 받아 나의 발걸음을 사뿐히 돌려야 한다. ● 서양미술사에서 현대미술이 차지하는 가치는 아마도 이 '돌아감의 미학'을 새로이 발견하고 이를 그 문명 속에 확고히 새겨놓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미술 등 이른바 원시미술에 감동한 피카소, 키르히너 등은 물론이요, 어린아이들과 광인의 그림에 빠져든 뒤뷔페, 이차대전 중 중앙아시아에 불시착했다가 그곳의 민간요법으로 살아나 현대 유럽의 샤먼이 된 보이스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현대미술은 돌아감의 미학이 갖는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왔다. ● 전통적으로 동양 미술사에서 파격을 중시해온 것도 이런 돌아감의 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파격이란 무엇보다 격식을 깨뜨리는 일이다. 취화선이 된다는 것은 파격을 통해 본질과 순수를 발견하는 일이다.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사석원의 그림이 주는 기본적인 정서 또한 이런 돌아감의 미학으로 충만하다. 일단 어린이 그림 같은 그 조형이 그렇고, 민화나 설화의 정서로 물결치는 그 시선이 그렇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돌아감이 다른 많은 예술가와 달리 생의 한가운데서 비로소 깨달아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날 때부터 그러했던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일곱 살이 다 되도록 말을 하지 못했다는 그는 초등학교 6년 내내 숙제를 해 가지 않아 선생님께 매일 뺨을 맞다시피 했다. 그는 일찍부터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태어나 처음 택한 코스가 '역주행'이었고, 수 없는 마찰과 부대낌 속에서도 그 코스를 당연한 것으로 알아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지금도 '기계치'로 한 달에 한 번 쯤 운전하는 것과 TV 리모컨을 손에 쥐는 것 외에는 컴퓨터를 비롯해 모든 기계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 이런 개인적인 일화를 접하노라면 우리는 사석원의 그림이 지닌 순수와 무구(無垢)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순수와 무구는 나아가는 자의 몫이 아니라 돌아가는 자의 몫이다. 역주행으로서 그의 여정은 그런 의미에서 보통 사람들보다 순수와 무구를 향해 일찍부터 앞서나간 것이었다. ● 웬만한 화가들은 다 다녀오고 또 웬만한 화가들은 다 그려본 금강산을 그가 뒤늦게 다녀오고 또 오늘에야 그림으로 그려낸 것 또한 시류를 거스르는 그의 역주행과 관계가 깊다. 금강산을 향해 부러 나아가려 하지 않았기에 그는 애당초 금강산을 만날 줄 몰랐다. 금강산이 자신의 그림에 이리도 중요한 소재로 들어와 앉을지 몰랐다. 그려봐야겠다는 아무 생각이나 계획도 없이 가나화랑 식구들의 엠티 자리에 끼어 처음 마주하게 된 금강산. 그 산을 직접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의 붓이 그 상형을 채화해야 할 운명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금강산이 그렇게 그의 마음 문을 두드린 것이다.
산은 사람을 움직인다. 명산과 준봉을 향한 인간의 열망은 끝이 없어 사람들은 산으로 모여들고 또 거기서 세상으로 흩어진다. 그런 산을 예수는 믿음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다. 사석원은 금강산을 찾지 않았다. 금강산이 사석원을 찾았다. 금강산이 '참다못해' 사석원을 찾아와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사석원은 그렇게 산을 움직였다. 사석원이 금강산을 움직였다면 예수의 논리를 빌 때 그는 분명 믿음이 있는 자다. 그 믿음이 무엇인가? 순수와 근원을 향한 그의 타고난 신앙이다. 역주행의 운명이 선물로 준 생래적인 '본질주의' 성향이다. ● 그의 근작 금강산 그림들을 보노라니, 온갖 색의 물감 꽃이 만개하고 신명 어린 선들이 간단없이 화포 위를 내달리는 게 모래밭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어린아이의 자취를 떠올리게 한다. 금강산 하면 떠오르는 겸재나 소정 같은 대가의 거대한 그림자도 그에게는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은 듯하다. 어차피 그들의 이름을 좇아 금강산을 찾은 게 아니라 금강산이 옆집 친구 찾듯 그에게 놀러왔으니 그의 일은 그저 그와 어울려 놀면 그뿐일 터이다. ● 사석원 특유의, 팔레트를 사용하지 않고 튜브 물감을 직접 짜 화포 위에 바르는 형식이 이 자유로움을 더욱 부추긴다. 두텁게 발린 물감이 산의 육질을 드러낸다면 마르지 않은 물감 위로 개구쟁이의 미소처럼 내달린 선들이 산의 골기를 드러낸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들은 어느 부분이 강조되느냐에 따라 서양화의 맛과 동양화의 맛을 시소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각시킨다. 근래에 동물 그림을 많이 그렸던 데 반해 산수 그림을 적게 그렸던 탓인지 마음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드세고 찰진 선들을 이번 금강산 시리즈 위에 마음껏 분출시키고 있다. 색으로나 선으로나 모두 생동하는 기와 운을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이다.
사석원의 금강산 시리즈는 소재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산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음미해 본 그림과 폭포에 집중해 그린 그림, 물을 배경으로 진달래, 개나리, 매화 등 사시사철의 꽃을 묘사한 그림, 해금강의 풍상을 그린 그림이 그것이다. ●「만물상엔 가을빛만 짙게 남고」,「삼선암의 가을 노래」,「쪽빛 일만 이천 봉」,「흰 구름 산마루에 흩어지고」등, 산을 소재로 한 그림들은 금강산이 지닌 독특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화가 자신만의 시선과 필치로 개성 있게 표현한 그림들이다. 금강산의 이름 자체가 화려함의 정수를 드러내 주지만, 사석원의 색채는 그 화려함이 얼마나 다양한 변주로 펼쳐질 수 있는지 특유의 '원색적인 연주 기법'으로 현란하게 보여준다. 유화임에도 전통적인 필치의 기운이 곳곳에서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 이 소재의 그림들이 주는 특별한 맛이다. ● 폭포에 집중해 그린 그림들로는「초여름 비봉폭포엔 방금 비 그치고」,「여름 폭포 소리를 듣는 기쁨」,「알 리가 없지, 알 리가 없지 구룡폭 단풍을」,「만화방창, 외금강 구룡폭포」등이 있다. 사석원은 "대부분의 산들이 산이 좋으면 물이 좋지 않고 물이 좋으면 나무가 좋지 않은 법인데, 금강산은 모든 게 조화롭다"며 금강을 금강답게 빛내주는 이 물의 역할을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붓 길로 생생히 포착해내고 있다. 폐부를 뚫으며 시원하게 흘러드는 그 물들은 분단의 상처를 안고 살아온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을 금강처럼 맑고 단단하게 세워줄 것 같다. ● 물을 배경으로 꽃이 펼쳐지는「옥류동 진달래야 누굴 위해 시들고 누굴 위해 피는가」,「매화는 붉고 생강꽃은 노랗네」,「상팔담 흐르는 물에 진달래꽃이 떨어지네」,「날던 새들이 짝지어 돌아오네」등은 절로 시를 흥얼거리게 하는 그림이다. 꽃의 화려함과 물의 덧없음만큼 서로 잘 어울리는 게 있을까. 그 어울림은 무엇보다 시적 조화이며,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그리움 따위를 연상시키는 감상적이고 은유적인 조화이다. 어우러짐을 운명으로 하는 세상의 모든 것은 이 주제와 유사한 갈망을 늘 가슴에 품고 있다. 통일을 갈구하는 남과 북의 얼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눈 내린 해금강에서 창해를 바라보다」,「눈 덮인 해금강을 볼 적마다 볼 적마다」등 해금강 주제 그림들은 주로 춥고 광막한 겨울의 표정을 담아 해금강의 고고하고 초월적인 기개를 그린 그림이다. 설화와 전설 속의 이미지처럼 펼쳐지는 그 아름다움은 우리 조상이 써왔던 이야기에 우리의 이야기를 덧보태 굽이굽이 새로운 설화와 전설을 써내려갈 것이다. 영원히 변질되지 않을 한민족의 순수한 넋이 그 설화와 전설 위에 흰 눈처럼 내려와 앉고 있다. ● 사석원은 민족의 명산 금강산을 그리면서 역설적이게도 강렬한 퓨전의 기운을 느꼈다. 누구나 알듯 전통적인 한국적 자연미의 표상인 이 산은 지금 북쪽의 이데올로기와 남쪽의 자본이 강렬하게 소용돌이치며 뒤섞이고 있는 곳이다. 반세기 동안 나뉘어 있던 남쪽의 문화와 북쪽의 문화가 서로 녹아들어가는 곳이다.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의 이해가 용트림치는 한반도의 옴팔로스이기도 한 이 산을 동양화가로 분류되는 사석원은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으로 전통 수묵화의 필법을 구사하며 그렸다. 서양화의 합리적인 구성과 동양화의 초월적인 파격을 뒤섞었다. ● 퓨전이라는 게 결국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의 소산이라면,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돌아감의 미학'을 내재한 흐름이다. 퓨전이 단순히 혼합이고 잡종이기만 한 것인가? 그것은 순결하지 않고 더럽기만 한 것인가? 세상 모두는 하나에서 시작됐다. 천변만화하는 세계상이라는 것도 그 뿌리는 하나다. 하나로 돌아가려는 열망,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세계의 본질이다. 하나를 얻고자 다른 것을 내치는 것은 하나의 뜻이 아니다. 무언가를 버리고서는 하나를 이룰 수 없다. 모두 품어 안아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의 뜻이다. 요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외국인 배우자 문제나 민족의 오랜 역사적 사명인 한반도 통일의 원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생이지지'로 돌아감의 미학을 꿈꿔온 사석원은 금강산을 그렇게 퓨전의 장, 진정으로 하나가 되고자 열망하는 시대의 표정으로 그렸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단순하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잃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끝내 하나가 될 수 있다. ■ 이주헌
Vol.20070406d | 사석원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