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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328_수요일_06:00pm
모란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02_737_0057 www.moranmuseum.org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는 1863년 에세이 「현대 생활을 그리는 화가(Le Peintre de la vie moderne)」에서 "모더니티의 한 쪽은 찰나적, 일시적, 우연적이고, 다른 한 쪽은 영원 불변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보들레르의 명제에서 보자면, 예술가란 도회살이의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순간에서 영속성을 포착하는 자다. 무릇 성공적인 현대 예술가라면 우리 시대의 찰나적인 순간들로부터 미적 형태들을 숙성시켜 삶이라는 술에 담긴 쓰고도 자극적인 맛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예술은 예술가가 처한 현실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전환시켜야 하는 작업인데, 이 맥락에서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는 예술이란 형식(form)을 양식(style)으로 바꾸는 놀라운 연금술이라고 말한다.
현대 예술의 사회적, 미학적 동인은 대도시, 즉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다. 메트로폴리스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원지이자 구심점으로서, 모든 가치의 합리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오늘날 예술가는 바로 이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자신의 감동, 그리고 좌절을 미의 형상으로 전환시켜 그것을 세계의 중심에 투사함으로써 맹목적인이 세계에 자유로운 인간의 표시를 아로 새긴다. 어느 시대든지 예술가가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자신의 특수한 표현 형식들의 필연성을 점차 정당화할 수 없게 될 때, 그는 의사 소통을 향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예술 개념, 달리 말해 모던함을 추구하게 된다. 이 맥락에서 예술가에게 모더니즘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정신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19세기말 유럽의 예술가는 대도시의 외부적 자극의 증대 속에서 소외되고, 권태롭고, 신경증적인 생활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메트로폴리스의 수많은 공간'들'과 시간'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분절화와 이에 대한 개인의 심리적 반응 사이의 괴리감 때문이었다. 이 괴리감은 예술가로 하여금 그 곳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지만 통제할 수는 없는 느낌, 그리고 곧 다가올 거대한 폭풍 앞에 있는 허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에 더욱 증폭된다. 짐멜(Georg Simmel)은 1911년「메트로폴리스와 정신적 삶(Die Großst?dte und das Geistesleben)」에서 현대적 생활이 우리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다양한 경험과 자극들에 우리가 심리적으로나 지적으로 어떻게 대응하고 내부화할 것인지를 심사숙고 한 바 있다. 짐멜에 의하면 현대적 생활은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도구화시켜 버림으로써 얻어낸 결과다. 단적인 예로 증대된 사회적 분업을 조정하는 데 필수적인 화폐의 교환 가치를 통해 우리는 감정을 억제한 채 냉정하게 계산함으로써 익명의 타인들과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의 시간과 공간 감각 속에서 엄격하게 길들여지고, 경제적 합리성을 계산하는 힘에 굴복한다.
오늘 당신이 어슬렁거리며 스치고 지나갔던 도심의 거리들, 인파들, 상점들, 간판들, 지하도, 네온사인들, 자동차들, 기차역, 미술관들, 극장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것들이 당신을 얼마나 소외시키고, 동시에 당신으로 하여금 어떠한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지 상상해보라. 보들레르와 벤야민은 당신의 그러한 모습을 '댄디(dandy)'와 '배회자(flaneur)'로 부르면서, 분절화된 현대의 도시 풍경에서 집단적 과거의 의미심장한 파편을 발굴해내는 고고학자에 비유하였다. 댄디와 배회자는 모던 예술가의 초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문화적 코드다. 댄디와 배회자가 오늘날 문화 담론에서도 여전히 주목할 만한 위치를 점하는 까닭은, 그가 세계에 대한 상실감과 자유라는 존재의 부조리를 포착, 기록하는 모던 예술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반추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존재가 부조리하다는 것은 내가 처해 있는 절망스럽고 잔혹한 상황의 형용이 아니라, 이성에 따라서는 도저히 연역할 수 없는 존재의 숙명 그 자체를 가리킨다. 부조리는 하이데거의 비유처럼 "마치 존재 속에 울려 퍼지지만, 곧 다시 사라져버리는 둔탁한 종소리처럼 우리를 두드린다."
어느 날 파리의 저명한 신경과 의사에게 처음 보는 환자가 찾아왔다. 환자는 시대의 질병, 즉 삶에 대한 의욕 상실, 심각한 의기소침, 권태감을 호소했다. 의사는 그를 자세히 진찰한 후 이렇게 말했다. "어디 특별히 안 좋은 데는 없습니다. 단지 마음을 좀 편하게 가지기만 하십시오. 기분 전환도 할 겸 뭔가 해보시고요, 저녁 때 드뷔로를 보러 가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인생이 달라 보일 겁니다." 그러자 환자가 대답했다. "아뇨, 선생님, 제가 바로 그 드뷔로입니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Passagenwerk)』중 '권태, 영겁회귀' 편에서)
부조리는 무한한 우주와 유한한 존재 사이의 불균형이라는 사생아적 개념으로서, 그것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멜랑콜리와 같은 깊은 절망과 우울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세계를 희망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동기도 부여해주었다. 예술가는 도시에서 절망과 희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 곳이 인간의 자유가 회복되는 장이자 때때로 혁명적인 실천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펼칠 수 있는 장임을 확인하게 된다.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도시에서 걷기(Walking in the City)」(1984)에서 "걷기는 도시에서 가장 기본적인 경험 형태이며, 도시라는 '텍스트'는 그들이 읽을 수는없지만 그들 자신이 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많은 걷기의 맵시와 질감, 스타일은 서로 얽히어 길을 만들고, 공간에 형태를 부여한다. 세르토가 개념 도시에서 도시적 실천으로의 이행을 제안하는 것, 그리고 지도(map)와 여정(tour)을 구분하는 것도 전자의 경우가 높은 곳에 올라서 도시 전체를 조망하는 것처럼 대상을 고립시키고, 거리를 두며, 그래서 시각적으로 세계를 소유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로의 조망으로 눈에 들어오는 세계는 매혹적이지만, 그것은 지식의 허구다.(de Certeau, pp. 92~156) 다양한 이야기와 생동감이 넘치는 환경을 하나의 폭력적인 시점에서 파악하고 나머지를제거해버리는 것은 지식이나 과학의 전통과 절차가 행해왔던 것일 뿐이다. 반면에 걷는다는 행위는 특정한 양태로 걷게 만들어진 체계를 '다르게'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그것과는 차별된다. 개인의 발화가 언어 체계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처럼, 보행자는 도시라는 정해진 공간을 걸음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실현시킨다. "보행자는 걸어가되 돌기와 우회를 연속적으로 수행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보행의 양태는 도시 계획(전략)에 의해 만들어진 행위의 장소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모여야 할 곳, 흩어져야 할 곳, 이렇게 또는 저렇게 지나가야 할 곳, 정지해야 할 곳, 빨리 지나가야 할 곳 등의 규칙을 위반하고, 거스르며, 작동하지 않도록 한다."(de Certeau, pp. 97~182).
오늘날 예술가는 무엇 때문에 도시에서 걸어야 하는가? 일단 도시는 보행자가 걸음으로써만이 새로운 의미가 탄생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보행자로서의 예술가는 도시에서 존재 의 부조리를 포착하여 그에 대항하는 자신의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흔적을 세상에 새겨 놓는다. 자유란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본성이 아니라 정복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랑슈비크(Leon Brunschvicg)는 인간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할 작품이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었다. 예술가가 도시에서 걷는다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올 결과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세'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인 부조리에 대한 답이다. 이번 전시의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최근의 경향이라 할 수 있는 기술공학적 의미에서의 미디어 친화적인 작업보다는 철학적인 작업을 지향하면서 도회살이의 영속성을 포착하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그 '자세' 때문이다. 동시대 수많은 작가들이 우리 시대의 모습을 드러냄에 있어서 사진, 영화, 컴퓨터의 효과를 차용하고 있지만, 그 효과의 범위를 현대성의 전망이 아니라, 유행 그 자체에 대한 전망에 두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작업의 주제로 삼고 있는 상황이 종종 높게 평가되고 있음은 우려스럽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경우, 예술가가 자신을 위해 세워준 사회적 안전장치를 잃을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 그는 두려움과 용기라는 감정조차도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예술가로 불리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현실에 굴복하여 넋 나간 상태를 유지한다. 사실 예술가의 이러한 무감각 상태는 자본주의의 품목 중 최상의 브랜드이기도 하다. 때문에 오늘날 예술가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자신들의 증언이 막연하다는 비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술가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빈곤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것의 적극적인 전환을 위해 도시에서 걸어야 한다. 예술가가 부조리한 세계에서 자유의 일부를 되찾으려면 실존의 아주 작고 지저분한 구석구석을 도시에서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 박대정
Vol.20070403e | .도. 시. 에. 서. 걷. 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