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프랑크푸르트-마드리드-파리-런던-서울
이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으로 진행되었다. 작품은 이미지와 이야기, 그리고 동영상이 포함된 책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이 작품은 이동하는 이들(The Pass/enger)을 위한 공간 에 소량씩 날마다 비치된다. 이동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 이란 주로 서울지역의 버스정류장과 기차역의 대합실이고, 작가는 그 공간에서 일정 시간을 머무르거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지나치는 장소마다 몰래 4-5권의 책을 떨군다. 2월 9일부터 약 2주간은 서울-프랑크푸르트-마드리드-파리-런던-서울의 순서로 각 도시의 공항을 그 장소로 삼아 진행했다. 관객들은 갤러리나 미술관을 찾아가는 방식이 아닌 이동/여행을 위해 임시적으로 머무르는 장소에서 우연하게 한 권의 책을 발견하는 식으로 미술품과 대면하고, 또 그것을 소장할 수 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늘 이동하거나 국경을 넘어야 하는 바쁜 이들, 경계를 넘고자 하는 욕망을 주체할 길이 없는 소외된 사람들, 혹은 예기치 않은 이주를 대면한 슬픈 이방인들의 사이에서 이 작품은 그저 그들이 우연히 지나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나 풍경처럼, 잠시 스쳐가는 아주 사소한 하나의 사건으로 남는다. 이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약 3개월 가량의 시간을 두고 서울지역의 몇몇 장소들에 조금씩 배포될 것이다. 이러한 우연한 만남이 어쩌면 조금은 설레는 것이길 바라면서.
탑승객The Pass/enger ● 너는 무빙워크에 올라 서서 여행 카트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린다. 무빙워크가 천천히 움직인다. 21번 탑승구로 향해 있는 그 움직이는 길 위에서 너는 조금, 흥분한다. 마음이 급한 사람들이 너의 옆으로 수 차례 빠르게 지나가고, 그들의 바쁜 길을 막아서지 않기 위해 너는 자세를 조금 바꾼다. 끝없이 움직일 것만 같던 길이 끝나고, 21번 탑승구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벌써 대합실을 가득 메우고 있다. 유리창 밖으로 이륙을 준비하는 비행기들이 보인다. 날은 꽤 어둑해졌고 불빛들이 선명하게 주변을 밝히기 시작한다. 너는 창에서 가까운 자리를 골라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어 앉는다. 창 너머의 불빛을 따라 눈을 바쁘게 움직이던 네가 아주 작은 소리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옆자리의 남자가 너를 흘낏 쳐다보더니 기지개를 켠다. 남자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칭얼거리는 아이를 힘겹게 달랜다. 남자는 도망치듯 자리를 뜨고 여자는 원망스런 눈으로 남자의 등을 쫓는다. 이내 너는 중얼거린다. 기다리는 인생은 딱 질색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합실에서, 이 기다림의 공간에서 너는 늘 두근거린다고 했었다. 그러나 이 두근거림은 21번 탑승구에 들어서는 순간 사라질 것이라고 너는 믿는다. 창 밖으로 보이는 저 거대하고 미끈한 비행기의 모습 또한 탑승구에 들어서는 순간 잊혀질 것이다. 탑승시간의 연기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흐른다. 대합실의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몇몇 다혈질의 남자들이 게이트 앞의 직원에게 달려가 항의해 보지만 직원들은 연신 고개를 흔들 뿐이다. 너는 이 기다림의 시간을 한껏 누리고 싶지만 대합실은 점차 소란스러워 진다. 사람들은 참으로 쉽게 분노하곤 한다. 너는 며칠 전까지 너의 연인이었던 나를 떠올린다. 너는 나에게 늘 물었었다. 너는 왜 그렇게 매일 화가 나있는 거니? 적의를 가득 품고 세상을 살아가던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너를 향해 기가 막히다는 듯 더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더 이상 네 화가 풀리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어. 너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이 뜨거운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덧붙이며 나를 떠났었다. 대합실의 소란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분노하는 어른들과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움직임이 점점 더 너를 성가시게 한다. 너는 가방 안에서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꺼내고 헤드폰을 머리에 두른 채 눈을 감고 혼자만의 시공간으로 빠져들어 간다. 너는 그렇게 스스로를 현실의 세계에서 격리된 상태로 만드는 것을 능히 해내곤 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나른하게 몸을 맡긴 네가 대합실의 한편에 존재한다. 너는 왜 나의 시간 안에서는 단 한번도 그 몸을 누이려 하지 않았던 걸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21번 탑승구의 문이 열린다. 이제 너의 기다림이 사라지려 한다. 대합실을 촘촘히 메워가던 모든 것들도 저 21번 탑승구 안으로 서서히 사라져 간다. 너의 뒷모습, 너의 유일한 동반자인 여행가방, 그리고 너의 달뜬 두근거림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문이. 닫힌다. ■ 정은영
Vol.20070330a | 정은영_움직이는 책 프로젝트 The Moving Text Proj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