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e, Shadow, Fragments of a Machine

최철 회화展   2007_0321 ▶ 2007_0330

최철_흔적, 그림자, 기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각 131×97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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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323_금요일_06:00pm

갤러리 숲 서울 마포구 창전동 6-4번지 전원빌딩 B1 Tel. 02_322_7911

놀이/흔적/상징 역시 잘 노는 게 중요하다. ● 오래 전 다다이스트들이 오브제를 발견했을 때 미술은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게 되었다. 뒤샹과 슈비터스는 전통적 의미의 미술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뒤에도 여전히 전통적 미술 작품을 했고 오브제 역시 하나의 언어로 기능하게 되었다. 예를 들것도 없다. 너무 많으니까. ● 학교를 그만두고 프랑스 외인부대를 거치고, 다시 학교를 마치는 인생 역정의 주인인 최철의 작업은 기계나 도구의 부속품들의 흔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캔버스 위에 각종 철물들을 배치하고 스프레이를 뿌리고 다시 덮고 뿌린다. 그 결과 오브제는 사라지고 흔적만이 남는다. 그 흔적들은 신화적인 배경이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기묘하다. 이것은 작가 스스로 말하듯이 어릴 적의 놀이의 연장선에 있다. 캔버스나 종이는 그 놀이터이고 작업은 결과물이다. 결과물들은 하나의 언어이므로 즉각적으로 상형문자가 되기도 하고, 서로 뒤엉켜 이상한 이미지들을 만들기도 한다. 최철의 작업 속에 기법적으로 새로운 것은 없다. 부재 한다. 그 새로운 것의 부재는 오브제의 선택이나 방법에서 온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안다. 어찌 보면 이 빤한 것을 그가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아마도 그는 놀이의 즐거움에 빠져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럴 때 그의 작업은 투명해진다. 그 투명성은 납작하게 캔버스 표면에 달라붙어 이미지가 된다. 그의 말대로 흔적, 신화, 음양, 향수, 공간 등등 최철이 작업 메모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작품에 대한 해석의 폭이 넓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해석의 폭이 넓은 것은 동시에 애매해질 가능성을 의미한다. ● 작업의 일부, 특히 작은 규모의 작품들은 그 애매성을 피한 듯이 보인다. 시적인 울림을 가진 색채들과 잘 배치된 오브제의 흔적들은 분명히 시선을 끈다. 놀이의 결과로서의 즐거움이 거기에는 있다. 오브제의 흔적을 음의 방식, 혹은 양의 방식으로 남기는 것은 흔적을 쌓아 만드는 과정의 결과이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의 작품 속에 놀라움, 또는 사주고 싶은 요소는 작업을 놀이와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호이징어 말처럼 놀이하는 인간, 예술 활동이 가지는 유희적 측면을 구현한다는 점이 최대의 강점이다. ● 놀이는 비생산적이고 비일상적이다. 현재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논다는 것은 사회로부터의 일탈을 뜻한다. 그리고 그 일탈은 공포다.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눈치를 보면서 놀거나, 기껏해야 다시 일을 하기 위한 충전으로서의 놀이를 할 뿐이다. 이 때의 놀이는 그러므로 일의 연장이다. ● 아도르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현대에 있어 예술작품이 가질 수 있는 역할은 유토피아를 보존한 총체성, 구체성을 어떤 식으로든지 드러내는데 있다. 그 구체성은 빈둥거리고, 어슬렁거리고, 시쳇말로 개기면서 현재의 시스템들을 내파 하는 기능을 한다. 아니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예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일 수도 있다. 억압받지 않는 놀이, 투명한 놀이의 규칙은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꿈꾸게 한다. 그것이 캔버스 위던, 모니터 안이든 상관없다. ● 아마도 최철의 작업이 유쾌해 보일 때는 바로 그런 상태에 이르렀을 때일 것이다. 오히려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려 들면 들수록 그의 작업은 스스로 부과한 억압의 상태에 빠지는 것같이도 하다. 따라서 그에게 스스로 작품에 부과하는 모든 억압과 의미들로부터 빠져 나오라고 권하고 싶다. 해서 그 자유가 만끽 될 때, 아마도 놀이의 규칙을 스스로 만들고 더 새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주운 사소한 쇠붙이들을 가지고 아무 생각 없이 놀 때처럼. ■ 강홍구

최철_흔적, 그림자, 기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55cm_2007

뿌리기 화면 위에 흔적 모으기를 위해 본인은 에어브러쉬를 이용한 물감 뿌리기나 락카를 이용하는 뿌리기 작업을 한다. 프랑스어로 락카는 Bombe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데 폭탄이라는 뜻이다. 어두운 바탕 위에 하얀 물감이 폭파되면서 물감가루가 눈처럼 내려앉아 화면 위의 부속품을 덮는다. 하얀 물감가루가 정착이 된 후 사물을 거둬 내면, 대신 그 흔적이 사물의 모습을 드러낸다. ● 혼령 어두운 바탕색 위에 하얀 물감을 뿌리고 나면 화면의 이미지는 마치 흑백사진과 비슷하다. 가끔 그 형태들은 실제처럼 드러나 오브제의 유령과 같다. 이러한 현상은 폼베이의 화산폭파나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폭파된 후 빛과 열이 너무 강하여 순식간에 만들어진 벽면에 그려진 그림자 조각형상과 비슷하다. 폭파와 파괴는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낸다. 빛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봄브의 뿌리기 작업은 흔적을 만들어 낸다. 그림자가 사물의 형상을 재현하듯이 이차원적 화면에서 흔적은 그 존재가 분명하여 사물의 존재를 대변한다. 흔적은 사물의 영혼과도 같다. 사물은 화면을 떠났지만 그의 영혼은 화면에서 유령과 같은 존재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최철_흔적, 그림자, 기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1×131cm_2007

빛과 하얀 물감 화면 앞에 서서 뿌리기 작업을 하다 보면, 하얀 물감을 사용하는 것이 마치 빛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얀 물감이 화면 위에 오브제의 흔적을 남기듯 빛은 공간에 그림자를 그린다. 빛은 그림자를 탄생시킴과 동시에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게 이 공간에서 존재한다. 빛은 영혼과 같고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물질로 존재한다. 그림자는 오브제의 존재와 부재의 생각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림자는 하나의 형상화된 본래의 이미지의 흔적이며 어두움과 음영으로 구성된 그림이다. 그림자는 사물의 실제로 재현되지 않는 그림자로서 재현된다. 그림자는 밝은 부분에서 반대되는 부분의 불투명한 물체들에 의해 형성된 어둠이다. 「시간은 흘러서 자정을 넘었다. 난 오래 전부터 작업실 벽에 붙어있는 사다리와 멀리서 가로등 불빛에 의해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다리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네모난 사각형의 이미지가 사다리의 뒤에서 액자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이러한 시각적 경험을 작업에 이용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빛은 그림자를 그린다는 사실...」

최철_흔적, 그림자, 기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1×131cm_2007

흔적의 꿈 이집트 임호테브의 미라가 영혼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며 새 생명의 부활을 꿈꾼다. 목각인형인 피노키오가 인간의 아들로 부활하는 것,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에서 인공지능 어린이 로보트의 이야기처럼, 작가들은 제3의 대상을 통해 자신의 부활을 꿈꾼다. 흔적의 존재이유는 오브제로써 부활하고자 하는 욕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시베리아지역에서는 맘무스의 부활을 위해 화석 연구가 진행 중 이라고 한다. 우리는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호박에 들어 있는 모기의 내장에서 채취한 피 즉 공룡의 염색체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장면을 기억한다. 오늘날 픽션에 불과한 이러한 이야기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이 되어갈 지도… 몇 백 년이 지나다 보면, 작업을 통해 남겨진 사물의 흔적이 오브제의 생명을 갖고 태어날 수 있다는 공상이 가능한 현실이 될지도...앞으로의 작업계획서는 상상의 이야기를 다룬 시나리오이다. 흔적작업이 더 이상 변하지 않도록 시간성에서 단절된 사하라 (챠드 북쪽) 사막에 매장하고 그 흔적의 작업이 묻힌 위치를 지도로 만들어 내 후손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몇 백 년 후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발견하는 작업이다. 이 방법은 보물섬의 보물찾기 방법과 흡사하다. 이 시나리오작업은 내 후손과 함께 하는 흔적 찾기 작업이 될 것이다. 이 발견하는 작업은 사물의 선 존재를 연구하기 위한 단서가 될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래에는 흔적으로 그의 원본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꿈꿔 본다. 결과적으로, 흔적 모으기는 사물존재의 시간과 생명에 대한 애착이다.

최철_흔적, 그림자, 기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5×65cm_2005

시적 공간과 상상의 풍경 나의 상상은 시적 공간 속에서 꿈을 꾸고 떠돌아다닌다. 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꿈을 꾼다. 공간에서 떠있는 사물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거기에는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꿈꾸고 있는 공간은 구성에 대한 순서나 질서도 없다. 표류하는 공간 사이에 던져진 물체들은 자유로움으로 존재한다. 기계부속품은 조각들로 여기저기 떠돌다 며칠이 지난 후 화면 위에 올려 진다. 갑자기 하얀 가루가 바닥을 덮은 뒤 조각들은 거기를 떠나고 그 자리에는 흔적만이 남는다. 오브제의 흔적은 그 형태가 너무 선명하여 마치 하나의 유령과 같다. 사물의 영혼은 현재 공간에 떠도는 흔적이 되었다.흔적 흔적은 흘러간 시간을 이야기한다. 시간은 사물이 있는 공간 안에 존재하며 반복한다. 계절이 오고 가고 변하듯이 흔적은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림공간에서 흔적은 사물의 선(先) 존재를 의미한다. 흔적은 사물이 있었다가 사라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자리는 사라짐과 새로운 존재가 교차하는 곳이다. 그리고 무와 유가 있다. 무는 유를 만들었다. 시간에 의해서 사물은 사라지고 흔적은 남는다. 이 공간에는 허와 실이 상호공존 한다. 흔적 남기기는 그림자 남기기와도 같다. 만질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그림자, 흔적이나 그림자는 사물실제가 아닌 허상일 뿐이다. 그림자는 사물의 영혼과도 같다. 흔적은 화면 위에 회화적 기호로써 존재한다.

최철_흔적, 그림자, 기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1×131cm_2007

흔적들의 춤 실현하기에 어려운 작업이라 생각이 들었지만, 난 오랫동안 움직이는 그림에 대해 꿈을 꾸었다. 파리 13구에 어느 레스토랑에 가면, 액자 속에 폭포수가 물안개를 날리며 떨어지는 것 같은 이미지의 효과를 내면 사진이 있다. 난 이 사진액자를 보며 소리와 그리고 물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습기가 있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동영상 이미지를 통하여 그 동안 회화공간에서만 존재했던 흔적들에게 움직이는 생명을 주어 자유롭게 춤출 수 있는 회화적 공간을 시도해 본다. ● 기계 작업에서 쓰인 기계부속품들은 나와 항상 익숙한 것들이다. 장난감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 동네 폐차장터에서 자동차 부속품들은 나의 호기심을 유발하는데 충분했다. 여기 저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로 가끔 길거리에 버려지는 기계부속품들은 우리 인생과 닮은 점이 많다. 필요하면 사용하다가 이용가치가 끝나면 버려진다. 작가 튕겔리는 고장나서 못쓰게 된 기계조각들을 이용해 설치작업을 했다. 그는 "기계는 재미있는 것이고 즐길 수 있지만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고 했듯이 본인은 버려지고, 사용할 수 없고 파편화된 기계부속품을 화면으로 가져와 새로운 조립으로 새로운 미학적 공간을 만들어 본다. 작업에서 이런 형태들은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재미있는 미적 형태 표현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힘들었던 나의 과거시절과 일상에서 느껴지는 오늘날의 인간들의 [로봇과 같은] 형상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의도가 들어있다. ■ 최철

Vol.20070328e | 최철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