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의 이미지와 내면 풍경

정종기 회화展   2007_0328 ▶ 2007_0403

정종기_그들만의 언어_캔버스에 유화_150호×3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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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328_수요일_05:30pm

인사아트센터 2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소통 혹은 불통으로서의 언어와 의미 성경의 창세기는 태초에 신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류 최초의 순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아득한, 미처 시간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미혹의 순간을 증언해주는 이 부분은 신이 바로 말씀, 로고스, 이성, 의미, 언어 자체임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신께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칭할 수 있는 권한을 일임한다. 이는 곧 세상의 주권을 그에게 쥐어준 것과도 같다(자크 라캉은 이로부터 가부장제 신화의 근거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번창하여 신을 멀리하자 신은 그들의 언어를 헷갈리게 하시어 서로 소통치 못하게 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와 의미를 매개로 하여 신과 인간이 서로 통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말해주며, 또한 인간과 인간이 서로 불통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이때 언어나 의미는 신께서 인간에게 심어준 신의 증표, 신의 징후이다. 내 속에 살아 계신 신의 흔적인 것이다. 몸이 곧 교회라는 말씀이나, 인간에게서 신을 본 레비나스의 타자론은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 이처럼 언어나 의미는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인간의 특정성이다. 데카르트가 인간의 주권을 주장하는 근거로서 내세우는 것도 언어와 의미이며, 인간이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으로 주장할 때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도 언어와 의미이다. 이때 언어는 단순히 문자화되거나 활자화된 텍스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언어를 교환한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나 정보를 교환한다는 의미 이상의 진정성을 담보한다는 것이다. 타자와 소통하고,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 이러한 언어가 이제 위험에 처해있다. 과연 언어가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는지, 타자와 소통하고 타자를 이해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될 수 있는지가 의심받고 있다. 신의 분노로 인해 인간이 쌓아올린 바벨탑이 붕괴된 이야기를 전설처럼 기억하고 있는 현생인류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탑 속에 스스로를 가둔 채 심각한 소통불능의 병을 앓고 있다. 신과 인간이 불통하고(신의 죽음에 대한 니체의 선언이나, 중심의 상실에 대한 제들마이어의 공언으로 나타난), 자아와 타자가 반목하며(도덕은 타자를 억압하는 명분으로 변질되고, 휴머니즘은 또 다른 배타적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세대와 세대가 단절되는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정종기_그들만의 언어_캔버스에 유화_150호_2007

정종기의 그림을 관통하는 주제의식 중「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성을 담보해주는 언어와 의미에 대한 반응을 암시한 것이다. 그리고「그들만의 언어」에서는 신과 인간, 자아와 타자, 그리고 특히 세대와 세대간의 소통불능에 대한 반응이 느껴진다. 작품마다 형식은 다르지만(추상적인 형식과 구상적인 형식), 주제에 있어서는 의미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서로 통한다. 하나같이 언어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가 하면, 언어를 매개로 한 인간관계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각각 전자회로 속을 떠다니는 추상적인 의미와, 주체들 간의 단절되고 고립된 의미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정종기_그들만의 언어-꿈_캔버스에 유화_10호_2007

나아가 자화상을 암시케 하는 그림에서는 자기와 자기(자기 속에 공존하는 타자)마저도 분리되고 소외되는 자기분열의 징후가 느껴진다. 그러니까 다중노출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듯한, 얼굴을 찡그린 채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초상과, 발가벗은 채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땅을 향해 웅크리고 있는 초상 그림을 보면, 자기가 마치 대상이나 되는 것처럼 자신을 들여다보는 양 느껴지고, 자기 반성적인 경향성이 느껴진다. 나 자신이 낯설고 생경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 경험은 실존주의적 인간관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프로이드는 이로부터 예술가의 특정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즉 예술가는 현실적인 삶과 비현실적인 삶(공상적인 삶)을 동시에 사는 주체이기에, 분열은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자연스런 일이라는 거다.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한 인간, 실존적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정상적인 징후인 것이다. 그 징후는 자기의 외부를 향하고(얼굴을 찡그린 채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또한 자기의 내면을 향한다(땅을 보고 웅크리고 있는). 이 그림들은 자기가 자기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되는 심리적 경험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란 시구를 '나는 내가 그립다'란 말로 고쳐 부르게 한다. 이로부터는 자기반성적이고 내면적인 경향성과 함께,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서마저도 고립된 섬처럼 느끼는 현대인의 공허한 자의식이 읽혀진다.

정종기_그들만의 언어_캔버스에 유화_60호_2007

이렇듯 자신으로부터의 고립감과 단절감을 형상화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여타의 작품에서는 인간관계의 소통불능(엄밀하게는 세대간의 소통불능)을, 더 나아가 그들 각자가 앓고 있는 고립감과 단절감의 징후를 보여준다. 마당을 배경 삼아 그 위에 소년이 홀로 혹은 여럿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는 어김없이 그림자가 등장하며, 이는 마당을 밝고 부드럽게 비추는 햇빛과 대비된다. 한결같이 정적이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가운데 소년들이 마당에다가 뭔가를 그리거나 쓴다. 개중에는 자신이 쓴 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소년도 있다. 아마도 소년들은 그들만의 언어를 적고 있을 것이고, 그들만의 의미로 소통하고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들의 언어 안쪽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의미로써 그들과 통하지 못한다. 이러한 고립감과 단절감은 위에서 내려다본 부감시점에 의해서, 정면에서 볼 때 등을 보인 채 화면의 안쪽을 향한 소년들의 시선에 의해서, 그리고 소년들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림자에 의해서 더 강화돼 보인다. 그림자는 소년들의 언어와 의미가 적어도 작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암시해주며, 나아가 소년들 스스로 느끼는 고립감을 암시해준다.

정종기_그들만의 언어_캔버스에 유화_20호_2007

그림자는 정종기의 그림에 있어서 그 자체 자족적인 언어와 의미의 한 형태로서 현상한다. 미처 의미화되기 이전의 (선)의미를 암시하고, 정형화된 언어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의미를 함축한다. 그림의 의미를 확장시켜주고, 그림의 심리적인 밀도감을 강화시켜준다. 이처럼 그림자는 그 실체를 암시하거나 상기시켜줄 수 있을 때 의미가 된다. 이는 플라톤의 상기 개념과도 통한다. 즉 그림이란 정작 그림에는 그려지지 않은 존재의 속성을 상기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자 자체는 비록 실체로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론 그려질 수 없는 것, 이미지로 옮길 수 없는 것, 정형화된 언어의 안쪽으로는 불러들일 수 없는 것을 암시하고 상기시켜줄 수 있을 때 그 존재의미가 증폭된다.

정종기_그들만의 언어_캔버스에 유화_52.5×230cm_2007

또한 그림자는 부재의 미학과 연관돼 있다. 그림자 자체가 존재를 대리하고 보충하며, 나아가 화면에 미처 그려지지 않은 존재를 증명해주기조차 하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들 중에는 아예 어떠한 실체도 없이, 다만 그림자만 그려진 그림도 있다. 그림자는 화면의 한쪽 귀퉁이로부터 마당 안쪽으로 발을 디밀고 있는 존재를 암시해주고, 화면 속에 고립된 소년에 대한 무언의 상대가 되어준다. 이로써 그림자는 그 자체 순수한 이미지, 순수하게 암시적인 이미지가 된다. 작가는 그림자로부터 이런 언어와 의미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종기_그들만의 언어_캔버스에 유화_30호_2007

주지하는 바와 같이 형상미술에 있어서는 그 나타나 보이는 지층과 결이 다양하다. 대략적으로만 봐도 고전주의 스타일, 아카데미 화파, 인상파 풍의 그림, 하이포리얼리즘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다 각종 미디어의 세례를 받은 영상세대의 미적 감수성을 반영하는, 마치 사진과도 같은 그림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 정종기의 그림은 이들 중 사진의 시점과 그 표면질감을 닮은 그림, 그 생리가 사진과 영상의 그것과 상통하는 그림을 그리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형식실험을 보여준다. 특히 다중노출렌즈로 포착한 듯한 자화상이나, 초점이 뚜렷한 인물을 초점이 흐려진 인물과 대비시키는 그림 등에서 이는 더 두드러져 보인다. 이처럼 사진의 생리를 연상시키는 작가의 그림은 동시대적 미적 감수성과, 동시대적인 이미지의 존재방식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처럼 새롭게 벼룬 언어와 의미를 도구로 하여 주체들을 고립시키고 단절시키는 심리의 망을 촘촘하게 짜내고 있다. 이로써 인간실존에 대한 작가의 자기 반성적인 성향과, 그 진지한 성찰이 읽혀진다. ■ 고충환

Vol.20070328b | 정종기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