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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321_수요일_05: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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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화가 개인의 초상화로 그려질 경우 형사의 바탕위에 그 대상의 신(神)이 확연하게 드러날수록 기운생동하는 그림이 된다. 그러나 개인적 신의 범위에 머무르지 않고 그 사람이 활동하는 분야, 계층에 공통되는 보편적 신의 표출로까지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림에서 형사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묘사로부터 점점 추상화되며 이에 따라 선적인 묘사보다는 오히려 먹의 번지기 즉 회화적 묘사가 적절한 표출수단으로 부각된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 윤공재의 자화상을 들 수 있고 후자의 예로는 양해의 발묵선인도와 같은 일품화가 머리에 떠오르는데, 기운생동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포착된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신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화가의 주관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문인화에서 인물화는 산수화보다 그 중요성이 현격하게 떨어진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 대한 화가의 자제된 감정을 세련되게 표현하고자 하므로 주관성으로의 변환을 시도한다.
서기환의 사람 풍경은 사람 자체에 대한 물음을 주제로 하고 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삶의 과정에서 소외된 채 혹은 소외되었다고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타자의 멍에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성적 삶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며 비이성적인 사고나 행동에 연유한 삶은, 결국 사람을 고난의 길로 인도하고 마는가?" 이와 같은 의문은 호기심을 넘어선 숙명적 과제로 받아들여지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기 위해 끈질기게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디지털 카메라로 그들의 모습을 잡아서 화폭에 옮겨 놓는 작업을 계속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의문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이러한 작업을 계속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 주제는 한시도 그의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의 핵심에 더 접근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이 시도된다. 한 두 가지 실마리가 잡혔다는 징표가 보이기도 하고, 혹은 그러한 실마리를 잡지 못한 절망의 표현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위에 기술한 인물화의 역사적 변천이 그의 그림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기환이 중국에서 갓 돌아와 그린 그림에서는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군중을 즐겨 그 대상으로 그리는데 이러한 인물화에서조차 초상화적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초기 네덜란드 집단 초상화처럼 각기 뚜렷한 형태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각 사람의 형태와 성정에 주목하다 보면 일정한 공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고도의 통일성을 유지하지 아니할 경우 오히려 우리의 시선은 흐트러지고 쉽사리 권태를 느끼게 된다. 감상자들은 각 개인의 특성을 하나하나 파악하기보다는 단일한 통일성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을 찾기 어려울 때 권태를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유학 직후의 그림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풍이라고 지적할 때, 바로 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가 한국성 혹은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의 변환을 시도할 때 제일 먼저 변하는 부분은 대상의 확실한 형태를 나타내기 위한 선적인 묘사에서 회화적인 묘사로의 이동이다. 그리고 담묵에 의한 실루엣만을 드러내는 배경의 인물군상을 통해 전면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포인트를 부여한다. 이러한 점에서 일품화의 정신이 서기환의 그림에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며 서로 겹쳐지기도 하는 것이, 과도기에는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데, 백묘 등 선적인 묘사에 대한 선호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그림에서 그는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감상자들은 이제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그렸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사람들은 전체적인 윤곽 혹은 덩어리만으로 사람인 줄 알게되고 그들이 도시의 거리 혹은 지하철 속에 있다는 것을 인지할 뿐이다. 서기환은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축적된 구체적인 감정을 지닌 대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화가가 그들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많은 화가들은 타인의 마음을 읽어보고자 노력하고 그 결과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세계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면서 아울러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여기에서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화가 자신이 그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표현하려는 자세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볼 경우 그의 인물 군상이 지니고 있는 문제는 바로 화가 자신의 문제이고 그의 그림은 결국 화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람들이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감정은 화가 자신의 소외로 귀결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느낄 뿐 그 소외의 정체가 무엇인지, 소외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외는 화면의 인물이 처해있는 거리나 지하철과는 완전히 구별되게 흰 바탕 그대로 나타난다. 인물의 한 부분이면서도 흰 바탕이 아닌 경우 주위환경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한데, 이는 소외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외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환경에 완전히 동화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 뿐 자신의 개성을 확고하게 구축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은,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하는 화가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화면의 주조색인 회색이 망각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화가 자신의 언급과 또 작품의 제목을 모두 동일한 '사람풍경'으로 정한 화가의 고의성에서도 이러한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서기환은 인간 본래의 면목을 찾기 위해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노력이 계속되더라도 본래의 면목을 찾기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원래 사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참모습은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그의 모습에서 아직 해답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의 성실한 모습에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해답을 발견하여서가 아니라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바로 서기환 만의 독자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답게 될 수 있는 것은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我之爲我, 自由我在)"는 석도의 말은 여기서도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는 명언임을 알 수 있다. ■ 백윤수
Vol.20070325a | 서기환 수묵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