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x Beckmann Graphic Works

막스 베크만 프린트展   2007_0312 ▶ 2007_0622 / 일요일 휴관

막스 베크만 프린트展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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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312_월요일_04: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일요일 휴관 관람요금_3000원 / 관악구민, 단체20명 이상, 예약 필수_2000원 서울대학교 학생 및 교직원_무료 도슨트 전시 설명_11:00am, 2:00pm, 3:00pm, 4:00pm 어린이 전시 감상 프로그램_매주 월요일_3:00pm-5:00pm_무료, 예약 필수 어린이 교육프로그램_"예술가와 시대의 자화상"_초등학생반_유료

서울대학교미술관 모아(MoA)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56-1번지 Tel. 02_880_9504 www.snumoa.org

이번 서울 전시는 아시아에서 열리는 첫 번째 베크만 전시회이다. 베크만은 생애 말에 석가의 사상에 감명을 받고, 그 매력에 흠뻑 빠져 지냈을 정도로 동양의 문물에 관심이 많은 화가였지만, 그간 아시아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린 적은 없었다. ● 16세의 베크만은 누이와 함께 드레스덴의 대학에 지원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 곳에서 첫 번째 포트폴리오를 제작한다. 아직은 서투른 솜씨의 스케치와 수채화였지만, 베크만은 작품마다 서명을 하고, 제목을 붙이고, 날짜를 표기하고 번호를 매기고, 직접 심혈을 기울여 책으로 엮어 보관한다. 카페나 음식점, 거리에서 본 것들을 순간 포착한 이미지들이 담겨있는 이 포트폴리오는 후에 그의 작품을 위한 자료수집의 역할을 하게 된다. 놀고 있는 아이들, 멋쟁이들, 맥주 마시는 단조로운 일상의 남자들 등의 인물화가 주를 이루며 풍경화는 거의 없다. ● 이와 같은 일상에 대한 인상의 모음은 드레스덴 시기의 한참 뒤인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에 다시 이어지게 된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종이를 보지도 않은 채 빠른 속도로 스케치하며 스케치북을 채워 나간다

막스 베크만_환멸감에 찬 사람들 1_리소그래프_49×37.6cm_1922

베크만은 바이마르 예술 대학에서 수학하였는데, 그 때 배웠던 것이 앞으로의 그의 예술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고대예술반에서 스케치를 배웠고, 그래픽시간에는 구트만(J. Gutmann)의 에우리디케 나 그가 특히 애독하던 작가였던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의 문학 중 죄수들의 목욕 을 주제로 한 일러스트레이션 석판화를 제작하였다. 석판화는 그가 가담했던 베를린 분리파 회원들이 즐겨 사용하던 매체이기도 하다. ● 제1차 세계대전은 그에게서 사회와 예술계에서 인정 받는, 좋은 교육을 받고 성공한 젊은 예술가라는 보장된 지위를 박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동 프로이센의 전선으로의 첫 여행에서 받았던 인상들을 스케치로 기록했다. 나는 스케치했다. 그것은 죽음과 위험으로부터의 안전장치였다. (1915년 전장에서 쓴 편지에서) 스스로 자원한 위생병이 플랑드르의 참호와 의료시설에 엄습했던 끔찍한 느낌을 극복하기에 스케치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병든 채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예술을 새로이 규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 대학시절인 1903년 「자화상」에서 사용했던 동판화 기법은 이상적인 표현주의 테크닉이 발휘되고 있다. 동판과 아연판의 단단하고 금속적인 재료적 특성은 부드러운 화법을 거부한다. 조각칼로 강하게 파낸 선들은 산마루를 형성하고 이로 인해 강한 음영감이 표현된다. 이를 가리켜 코스메 디 바라나노(Cosme di Baranano)는 단도의 스케치라고 표현하였다. 부드러운 곡선을 거부한 채, 거칠고, 모가 지고, 뻣뻣하게 교차한 선들로 가득 새겨져 있다. 이 기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경험에 내던져진 인간의 공포, 고통, 속수무책의 상황, 비애를 강렬한 흑백의 대비로써 잘 표현한다. 이는 더 이상 살롱의 미학적이고 형식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상상하기 힘든 것들에 대한 진실이자 직접적인 증언이었다. 「석류석」(1914)이나 「눈물을 흘리는 여인」(1914)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수작들이다. ● 베크만은 종전 이후 영혼을 치유하면서 서서히 색을 쓰는 회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고, 석판화의 상상력 풍부한 기법도 다시 활용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이제 위험스런 긴장이 해소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집단의 전형적인 위기의 상황들을 서술적으로 묘사한 「지옥」(1919)과 「베를린 여행」(1922)의 두 개의 연작집을 제작한다. 각각의 작품은 영화나 연극 장면과 같은 극적인 효과가 나타나 있다. 가공적인 상황은 실제 사건에 관해 보도하며, 화가는 화자나 연출자에서부터 다양한 역할의 배우로 변모한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싸움, 정치적 테러, 굶주림, 범죄, 전쟁의 승자와 패자 등, 모든 인물은 석판화용 석필로 능숙하고 짜임새 있는 스케치로 종이 위에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돌 위에 전사법으로 인쇄된다. ● 베크만은 동판화를 석판화와 같은 방식으로 제작하였는데, 이는 그의 회화가 신즉물주의적 우아함으로 전개되어 간 사실을 반영한다. 그는 개인적인 삶으로 회귀로서의 꿈, 아침 산책길 풍경, 사랑, 우정, 친구들이나 아름다운 여성의 초상화, 버라이어티 쇼, 일년에 한 두 번 열리는 대규모 시장 등과 같은 사회의 모습들을 그려냈다.

막스 베크만_그룹초상화_목판화_49.4×49.8cm_1923

세계경제공황의 빈곤으로 미술 시장이 붕괴되었고 베크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활동은 정지되고 이미 시작한 판화마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나치의 지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막스 베크만의 전시회가 많이 개최되었고, 독일에서의 공공의 작품 수집을 위한 회화와 판화작품의 매매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 작품들은 나치에 의해 몰수당했고 팔아 넘겨지거나 파괴되었으며, 종전 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독일 사회에 반입될 수 있었다. ● 1946년 암스테르담에서 망명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뉴욕에 있는 아트딜러에게 줄 포트폴리오를 완성한다. 낮과 꿈(Day and Dream)이라 제목 붙은 이 포트폴리오는 펜화 느낌의 석판화 작품집이었다. 10년의 세월 동안 강요되었던 외로움이 작품내용과 형식에 묻어나 있다. 같은 시기에 그려졌던 수채화와 펜화가 거의 직설적으로 망명생활의 꿈과 악몽에 대해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 베크만은 마치 무인도에서 보내는 유리병 편지처럼 이 꿈들을 종이에 작게 말아 미국으로 보낼 수 있었다. : 나는 아직 살아있어! ● 그가 죽은 지 56년 이후인 2007년, 한국의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막스 베크만의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기회이다. 이 작품들은 베크만의 망명을 도와 준 네덜란드인의 소장품이다. 이 곳의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새로운 예술가를 발견하게 될 수 있길 바란다. 베크만이 한국의 예술가들에게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긴 하지만 말이다. ● 베크만은 계속해서 교사로 활동했다. 1920년대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3년 동안은 미국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인식된 것은 베크만이 베크만 회사 효과만을 장려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 끝으로 이 전시회를 가능하게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특히 정형민 서울대학교 미술관 관장님, 미술관의 모든 직원 분들과 스폰서 분들, 코디네이터 김순주씨, 좋은 글을 써주신 정영목 서울대학교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 마옌 베크만(Mayen Beckmann)

Vol.20070317d | 막스 베크만 프린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