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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316_금요일_06:00pm
2007 EBS 스페이스 기획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개관시간 / 09:00am~09:00pm / 휴관 없음
EBS 스페이스 전시관 서울 강남구 도곡동 463번지 Tel. 02_526_2643 www.ebs-space.co.kr
이방인(異邦人)-이방인(易彷人)-역방인(易方人)의 경계에서 이민혁이 바라 본 도시 ● 아득히 먼 옛날 신라라는 국가에 처용이라는 사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신라의 서울을 밤늦도록 놀아재낀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황당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는데,,, ● 서울 밝은 달에 밤늦도록 놀며 지내다가 / 들어와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 둘은 내 것이었건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 본디 내 것이다 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 문득, 이민혁의 작업을 보며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처용의 그날 밤 행적에 관해 알 수는 없지만, 역사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의 수도는 기와집과 숯불로 밥을 해 먹고 타국과의 교역의 중심지로 사치와 향락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무튼, 밤드리 노닐다가 집에서 맞이한 상황은 역신과 아내의 간통이었고, 처용은 가무로 역신을 감복시켜, 역신으로부터 약조-처용의 얼굴이 있는 곳을 범하지 않겠다는-를 받아낸다는 얘기이다. 추측하건데, 처용은 아포리오리와 아포스테리오리의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즉 ,소유의 혼선(내 것과 누구의 것의 모호성과 경계 지움)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빼앗긴 것을)에서의 가무는 그 상황자체,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딜레마를 그가 잘하는 가무로 역신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경험했으리라 생각된다. 해석자들에 따르면 역신과 아내의 간통은 신라 말의 상황에 빗댐이고 처용의 딜레마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혹은 좌절된 현실의 인정이라고 말한다. 화려한 문명의 낮과 밤을 목격하고 자신의 처소에 와서 이방인임을 혹은 소외감이나 고독을 느끼는 도시인의 딜레마와 처용의 갈등 간에 비록 시간적 위상은 존재하나 한편으론 동질감도 존재한다고 말하면 비약일까?
도시와 이방인 ● 전작에서 이민혁은 일상적 도시의 속도를 그 내부의 군상들이 집합되어 있는 장소나 지형지물을 통해 도시가 갖고 있는 물질적 속성, 탈 인격성, 전체주의적 욕망을 묶어 무수한 결질과 색채를 통해 현존이라는 지점으로부터 탈출시키듯 그려냈다. 자신은 이격된 소외감을 겪으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도시의 일상에 대해 그 광경을 포착하고 표현하는 것이 허락되었을 뿐이다. 굳이 조용필의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아도 현대사회의 도시가 갖는 속성이 화려함과 욕망 뒤에 감추어진 고독과 소외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도시가 갖는 생태적 환경, 즉 유기체적 시각에서 필연성이자 한계이다. 도시는 욕망하는 것에 대해 공평한 세례를 내려주는 곳이 아니며 생존투쟁의 장이자 연속되는 배틀들이 스테이지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일상이 다한 지점에서 다시 일상은 시작되고 곤한 잠은 배터리의 충전보다 가벼운 곳 도시. 전작에서 이민혁은 초전도체 표면에 전기가 흘러가듯, 마치 그 전기의 본질이 복수성의 무지갯빛 결질인 것처럼 화면에 쏟았다. 그 속도들은 작가의 지점에서 일정의 거리를 두고 미끄러져 흐르고 격리와 이탈의 관점으로 보이며 화면 자체의 무수한 움직임 속으로 관람자의 정서가 침투될 확률이 희박할 정도로 순식간의 움직임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화면에서 보이는 만화경 같은 일상의 풍경만이 그가 경험한 시간으로 남게 된다. 경험한 시간과 공간은 의식 속에 주어져 그것과의 별개의 지향점을 향해 내달린다. 그것은 이민혁이 경험한 도시의 생태적 정서와 그의 의식이 엇갈리는 속도를 가짐으로 관람자로 하여금 도시의 지형지물 인간 군상들을 그가 목도했던 상태의 절대적 시간으로 되돌리고 있다. 그가 바라 본 도시는 속력 안에 거하는 인간군상과 지형지물이 공존하는 탐구의 장이며? 언제든지 접근 용이한 이방인(易彷人)과 괴리를 느끼는 이방인(異邦人)과 도시의 지향성과 다른 무지향성 자유의 역방인(易方人)이 공조 혹은 공모하여 보는 대상인 것이다.
도시와 지향성 ● 근작에서 보이는 이민혁의 의식에는 이전의 관점과 큰 변화는 없으나 도시에 대한 태도에 다소 변화가 있다. 도시라는 생활세계에 대해 속도의 관점을 인정하면서 더불어 그 속도의 결질과 대상들 속에 은폐되어 있던 잠재된 공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화재, 지진, 수해, 사고, 아파트의 비극을 비롯해서 좀 더 구체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익숙한 장소와 은밀한 장소가 갖는 일상의 상투성과 특수성도 그 방식대로 풀어내고 있지만 도시를 대하는 그의 의식적 흐름이 현상적 시간과 관계하여 예지와 상징의 관점으로 옮아가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예로 들어 현재의 현상 (지금)-현상의 이해(파지)-현상의 결과(예지)의 단계처럼 우리가 생활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공고한 법칙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수들이 몰고 올 잠재태에 대해 생존 본능적 혹은 직감이 반응하고 있다고 여겨지며 그 의식의 기저에는 과거 지향적 태도를 통해 현재 상태를 역설로 고발하려는 성향이 관여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과거지향성의 태도가 현상을 제어할 수 있는 기제로 가능할 것인가? 이민혁의 작업에서 보이는 속도와 지향성은 마치 도시가 갖는 지향성과 작가의식의 지향성이 각기 상대적으로 미끄러지는 틈새에 마찰이 만들어 놓은 절대적 시간처럼 화면에 얼어붙고 있다. 붓질은 현존을 벗어나듯 속도로 흔들리나, 관자의 의식은 오히려 현재를 각성하며 광속과 과속과 가속의 흔들림으로 인도 당한다. 그가 본 대상이 평온하게 지속되는 상태라고 규정해도 그의 의식 속에 주어진 속도는 그것들과 상대적인 방향으로 빠져나가 그의 화면 속에 속도로 안착된다.
도시의 위기 ● 도시는 욕망의 전체주의적 길들이기의 현장이며 자본의 각축장이고 고독과 소외와 좌절 그리고 그것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 삶의 숭고함도 지속된다. 프렌드 쉽의 깃발을 앞세운 글로벌화는 지식의 생산을 잠언으로 삼고 자본이라는 복음의 경전 안에 평온하게 배열되었다. 그리고 경전은 금기된 계명을 부록으로 넣고 네트웍을 통해 우리에게 퀵 서비스 되었다. 바야흐로, 자본시스템의 복음은 이교도의 순교와 희생을 강요하게 되었고, 예전의 희생자들이 겪었던 전락의 단계도 뛰어넘어 기억의 시간과 장소는 순식간에 소멸을 맞이할 지경이다. 인류의 미래가 디스토피아냐, 유토피아냐의 관심들은 인류에게 내려질 재앙 혹은 인간사회가 아직 관계하지 않은 미래의 공포로 인해 효력을 상실할지 모른다. 엘빈 토플러가 예측한 미래와 동시적으로 지구 재난이 혼존 하는 시간. 그 아래 도시에 혼존하는 구토, 이질성, 스멀스멀함, 욕망의 집단유희의 노골성은 이후에 찾아 올 '어떤 결과'들을 배태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어떤 결과들은 명증의 차원에서 타당함을 논할 성질이 아닌 경험을 넘은 직관의 범위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결과일 수 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조롱이 오히려 그의 정치적 태도를 규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처럼 이민혁이 뱉어 내는 냉소적 이미지들의 총합은 그가 도시를 규정하는 단서에 준한다.
다시 이방인으로 ● 이민혁의 작품에서 그는 쉽게 그 장소들로 그 집단으로 뛰어들 수 있고, 이질성을 느낄 수 있고, 방향을 선회할 수 있는 무 지향적 인간성으로 보인다. 작업에서 보이는 도시의 파편과 상황들이 부정성을 선회하는 선형성을 유지해도, 역설적인 태도를 지향해도, 그 자체가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 건강한 정서의 확인이라고 프로이드표 긍정은 말한다.. 도시의 삶이,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건 간에 삶은 지속된다. 그리고 그것은 비탄과 역설을 통해 숭고함을 회복한다. 인류의 삶 속에 내재된 작용과 반작용점을 통해 극복할 수 있으리란 신념이 예전과 같진 않지만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믿음과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삶의 실체가 어떤 지향성에 연유된 것인지를 성찰한다면 이민혁이 응시하는 지점에 대해 공감하리라고 믿는다. 예술작품은 공동재산으로 자신의 상호주관적인 현 존재를 가지며, 특수하고 일차적인 방식으로 민중의 예술가속에서가 아니라 예술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민중 속에서 사용 메세지를 갖는다는 후설의 진술처럼 이민혁은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도시 잔혹극의 전조 앞에서 전 방위적인 지향성에 기반 해 도시를 인간세계의 장으로 축도하고, 자신을 이방인(異邦人)-이방인(易彷人)-역방인(易方人)로 내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처용의 가무처럼 흔들리는 그의 붓질이 그 옛날 처용의 가면이 대신했던 의미를 승계해 우리시대의 부적으로 남아 주길 기대한다. ■ 정화성
Vol.20070312a | 이민혁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