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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117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승구_안우석_이봉윤_허자연
갤러리 나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3번지 성지빌딩 3층 Tel. 02_725_2930 www.gallery-now.com
존재가 존재하기 위해서, 그리고 존재가 기능하기 위해서 공간이라는 전제는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써 그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어떤 장소가 개별적 특성으로 구분 가능한 것은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다양한 층위들의 상호작용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공간空間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곳을 말한다. 그것이 정육면체처럼 꽉 막혀 제한되어 있건, 우주공간처럼 사방이 트여 무제한 적 이건 그 안에 산재한 수많은 존재들을 공간의 어느 한 면에 팽팽한 장력으로 끌여 당겨 놓음으로 해서 드디어 '일이 벌어지는 곳'인 장소의 기능은 가동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표면장력의 원동력은 대게가 人間들이 구축하고자 하는 '산술적 설정'들로 부터 비롯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이 구축한 '설정된 공간'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그저 공간의 존재들로 자동전환 되어 부유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더라는 것이다.
이봉윤은 종교적인 공간인 성소를 아주 건조하게 바라본다.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기에 다소 크로테스크 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을 '위한' 모든 질서와 제약들이 사람보다 먼저 들어와 앉아 있는 듯하다. 여기서 정면성은 공간의 의미를 납작하고 편평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데, 오히려 부각되는 원근법 때문에 종교의 중심체는 더욱 더 멀게만 느껴지고, 또한 소실점에 의해 명확한 서열이 강조됨으로 해서 대중화를 표방하고 있는 이 시대 종교의 모순된 신비주의를 체험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성소만큼 인간이 쪼그라드는 공간은 드물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면 왠지 매직아이를 보는 것 같다. 눈의 초점을 풀어야만 내용이 보이는 그 책 말이다.
허자연 또한 정면성을 통해 소재와 관객이 눈을 맞추게 하는데 여기에서 정면성은 공간의 정면성이 아니라 그 '집'이라는 공간 안에 거주하는 낮 모르는 가족들과 마주하는 어색한 충돌이, 그 밍밍한 가족사진들 속에서 난데없이 우리 집과 우리가족을 맞닥뜨리는 것 같은 상황과의 정면성이다. 형식의 정면성이라기 보다는 현상의 정면성에 가깝다. 가족 일원 모두가 각기 다른 사회적 직위와 의무를 다하고 '잠시'모인 집안에서 가족들을 바쁘게 불러 모아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가족들의 심드렁하고 관심 없는 표정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그러고 보니 작가가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그 가족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한눈을 찡그리고 열심히 관찰하는 그 광경을 오히려 그들이 구경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사진안의 가족들과 눈을 맞추는 순간 느끼는 묘한 피곤함의 이유이다. 이봉윤과 허자연의 공간이 객관적인 시선을 통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들인데 반해 안우석과 김승구의 공간들은 매 한가지로 흔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주관적인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전자의 공간들과는 다른 층위를 갖는다.
안우석의 공간들은 '~ 방'으로 불리는 장소들이다. '방'은 인간만이 만들고 사용하는 매우 문명화된 장소이자 주관적인 영위공간을 넘어서는 극도로 사적인 곳이다. 그런 사적인 곳들의 간판이 거리에 나서면 수두룩하게 보인다. 아이러니는 그런 사적인 공간을 익명의 수많은 당신들과 '함께'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 방'에 대한 은밀도의 수위는 그 장소들이 생긴 사회적 목적성 보다, 실제로는 이용하는 대중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다분히 경험론적인 구분법이다. 그리고 안우석이 이곳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사회적인 기능성과 목적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열려진 문틈이나 구멍사이로 들여다보듯 하는 화면 효과는 숨어서 봐야 더 '의미 있는' 관음증을 부축 이는데 이것이 바로 그곳을 이용하는 우리들의 본능적인 시선이며, 옆으로 긴 파노라마 포맷은 구멍으로 몰래 들여다보다가 슬쩍 초점을 옆으로 돌려 '조금이라도 더' 둘러 보고자하는 욕망적 시선의 연장을 위한 작가의 배려이다.
김승구가 공원에 갔을 때, 그가 혼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것은 그가 '찍기 위해'갔는가, 그냥 갔다가 '찍게 되었'는가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간과 그곳에 존재하는 것들의 상관관계가 헐겁고 무미건조할 때 우리는 그 공간에서 부조화의 기운을 느끼게 된다. 일종의 불안이다. 김승구가 바라본 별 특별한 것 없는 공간과 별 의미 없이 뒹구는 돌덩이, 그리고 휑한 공기감은 단지 작가의 감성이 풍부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들이 기능하도록 공간 안에 배치된 일종의 필연성을 찾고자하는 응시이다. 그것은 사진속의 피사체들이 가지는 존재감이 체험적으로는 매우 미미한 것일지라도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니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식의 감상주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서 의미가 있기 위한 운명적 필연성을 찾아가는 다분히 철학적인 단계의 시도이다. 이러한 관점은 대화를 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바라보다가 눈에 스치는 우연한 존재들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 이 네 작가가 대면한 공간들이 전혀 새로운 장소들도 아니고 각기 다른 장소성을 주제화하고 있음에도 하나의 시선아래 모일 수 있는 것은, 화면마다 응시의 강제가 있어 우리의 눈길을 피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집합을 중심으로 네 시리즈가 귀퉁이를 팽팽하게 맞잡고 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긴장감과 밀도가 가능한 것이다. 지금 그들은 인간의 사회성이 구축한 낮 익은 공간들에 종속된 존재로서의 위치를 거부하는 오만한 관찰자의 자세를 멀리 한 채, 오로지 거리두기의 응시를 겸손하게 일관하며 전시제목처럼 '어서 들어와' 보라고 한다. 전시장에서 각 벽면에 등딱지를 붙인 채 서로를 응시하는 작품들을 상상해본다. 그 공간의 장면을 떠올리고 보니 네 귀퉁이의 중심점 즈음에서 미세한 먼지들과 함께 부유하는 우리들의 모습 또한 떠오른다. ■ 이수민
Vol.20070117a | Walk inside 워크 인사이드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