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이상의 정원

故 이동석 추모展   2006_1229 ▶ 2007_0203

이동석_유토피아 이미지_공단천, 바느질_가변크기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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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110_수요일_03:00pm

신미술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1동 556-2번지 Tel. 043_264_5545 www.shinmuseum.org

사각거리는 소리를 불러일으킬 듯 한 금빛 잎사귀들, 녹색의 진흙 덩어리로부터 건져낸 듯한 모노크롬한 오브제들, 확대된 사물의 형태, 자연형상의 드로잉..... 회화라는 강물에 담가낸 조각들처럼 보여지는 작가 이동석의 작품들을 조각으로만 간주하기에는 조각이라는 영역이 너무 좁아 보일 수도 있다. 그가 대학에서는 회화를 공부하고 대학원에서는 조각을 전공하였다는 점이 물론 지금 그의 작품과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표현에 대한 그의 입체적인 접근방식과 더불어 낡아빠진 관념성이라는 흐름에 역류하고 싶은 작가적 성향 때문일 것이다. ● 조각이나 회화라는 관념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더 넓은 표현이라는 바다로 향하기 위함이라면 젊은 작가 이동석은 바로 그 경계의 날 위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동석이 경계라는 날 위에서 긴장하거나 심각해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유희적인 몸짓으로 곡예 하듯이 그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경계에 부딪혀오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는 자신의 갈증 나는 상상력의 목을 축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이동석 작품의 자양분이기도 하다. 그가 스스로 만든 상황이든 그가 스스로 처한 상황이든 간에 그의 이 같은 유쾌할 정도로의 낙천성은 아마도 그가 조각과 회화의 영역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이동석_전환의 봄_공단천, 바느질_가변크기_2004

이동석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의 구심점에는 자연과 색채라는 두 개의 축이 자리 잡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대상이 자연적인 형태라는 점은 단순히 그를 성장시켰고 또한 그의 삶의 일부분이었던 자연에 대한 기억이나 회상들의 재현만으로서 보기는 어렵다. 그는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자연형태를 만들고 연금술사처럼 그 위에 옷을 입히듯 화려한 색채나 천으로 섬세하게 도금을 해나간다. 마치 자신에게 각인 되었던 자연을 새롭게 끄집어내기 보다는 각인 된 자연이라는 친숙한 기억에 자신이 구조한 자연을 되돌려주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행위는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 행위이자 기억이라는 중력의 반대편에서 자기 자신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이 자연적이면서도 자연적이지 않고 인공적이면서도 인공적이지 않는 이중성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그렇다면 그의 작품소재로서의 자연은 화가나 조각가들이 묘사하거나 표현하는 자연은 분명히 아니며 살아 움직이는 내면의 자연인 것이다. 그는 자연을 스스로 구조하거나 해체하고, 깊거나 꿰메거나 풀어헤치며 채색 해나간다. 형태는 색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조형되며 색채는 그 형태라는 오선지 위에 밝고 어두움, 희로애락등과 같은 삶의 표정과 감성을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그것들은 형태를 일깨우고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이다. 조각적 형태는 색채를 통하여 자연을 이야기를 하며 색채는 형태라는 수단에 의해서 공간에 동적인 파장을 그려간다. 그는 자연을 가닥 끈으로 재차 자신만의 자연 놓지만 놓지 않고 버리지만 버리지도 않으면서 자신과 자연이 연결된 한 그리고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가는 것이다. ■ 유선태

이동석_감각과 이상의 정원_공단천, 바느질_가변크기_2004
이동석_감각과 이상의 정원_공단천, 바느질_가변크기_2006~7

꽃봉오리, 꽃잎, 잎사귀 등 자연의 유기적 이미지가 감각적으로 꿈틀거리는 이동석의 정원에서 중세의 초자연적인 공간이 느껴진다. 성스러운 공간 혹은 성스러운 것의 표현을 위한 중세의 황금빛 배경을 생각하면, 작가가 작품의 주재료로 사용한 공단의 광택으로 인한 번적거림을 단순히 나염된 천의 키치적 효과로만 볼 수는 없다. 현실에서 천상의 아우라를 강조하기 위한 금박이었다면, 금실로 수놓은 공단의 광채는 감각적인 현실에서 이상적인 현존을 지각하려는 작가의 감수성이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 이동석은 공단을 소재로 바느질이라는 제작 방법을 통해 거대한 꽃과 식물을 연상시키는 오브제를 제작하여 설치한다. 이번 전시는 작년 문예진흥원 "Utopia-image"전에 이어 네 번째로 하는 개인전이다. 이동석의 고향은 충북 보은이다. 작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벼이삭의 소리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들판에 빛을 받아 눈이 부시고 바람을 타고 흔들거리는 버들강아지와 고불고불한 시골 길가에서 소리 없이 새파랗게 올라오는 새싹들 그리고 하루하루 모습이 달라지는 느티나무 등과 같은 자연의 이미지와 더불어 성장하고, 살아왔다. 작가의 삶을 깊이 반영하는 식물이 작품의 모티브로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동석은 중세가 거부했던 현세, 즉 자연의 이미지이기 보다는 보다 과장되고 포장된 유토피아의 이미지에 가깝다. 감각적인 현실에서 이상적인 정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동석_불확실성_공단천, 바느질_가변크기_2005
이동석_불확실성_공단천, 바느질_가변크기_2001

작품의 주 소재인 "공단"은 관례적으로 한국전통의상인 겨울 한복을 만드는 재료이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보여주는 공단이라는 동양의 전통적 소재를 사용하여 구체적인 식물이미지를 연상하게 하는 이동석의 작품들은 마치 꽃과 식물이 있는 화려한 정물화가 화면 밖으로 즉 공간으로 연장된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사실 이동석의 설치작품은 회화와 조각의 밖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가 2001년 충북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동대학교 조소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평면과 입체를 두루 다루게 된 이력에 비추어 보면 이해가 된다. 천을 자르고, 바느질하고, 철사에 끼고 연결하고, 벽에 걸고 늘어뜨리고... 전통적인 미술개념에서는 빗겨나가는 여성적인 행위로 비추어질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이 품어내는 에너지는 모더니즘의 남성작가들이 품어내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부드러운 천속에 감쳐진 철사와 같이 작가는 자신의 감수성을 은밀하게 안으로 숨기고 있다.

이동석_불확실성_공단천, 바느질_가변크기_2002

작품「Passion 1」은 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유하는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연상하게 한다. 천정에 매달린 거대한 붉은 원색의 꽃봉오리와 그 아래로 내려트린 가느다란 철사의 이미지가 대립되어 전시장의 분위기를 상승시키다. 이 작품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수직의 의미를 갖는다면, 반대로 작품「Passion 2」는 6미터가 넘는 식물의 형태가 벽을 뚫고 전시장을 수평으로 가로 지른다. 이 두 작품은 거대한 크기와 원색적 색채 그리고 뜻밖의 이미지로 관객의 시선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는다. 활짝 핀 꽃송이가 바닥에 이파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작품「Passion 3」은 식물성보다는 동물성이 더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움직이는 동물처럼 느껴지면서 동시에 힘차게 뻗은 잎은 결코 지지 않는 꽃을 상징하듯 너무나 당당하다. 유한자로서가 아닌 무한자의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논과 밭길에 뿌리를 내리고 억세게 생명을 유지하는 잡초를 연상하게 하는 작품 는 공단이라는 재료가 갖고 있는 가시성과 풀의 이미지가 잘 어우러진다. ● 우리는 세상의 부조리와 늘 대립하고 있다. 그래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하기도 하지만 또 우리는 스스로 의미를 꾸며냄으로서 인간상황의 부조리로부터 탈출하려는 기획도 한다. 바로, 모조로 만든 거대한 식물이미지와 자연의 이미지를 대비시키는 것이 젊은 작가 이동석의 기획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 소재나 주제에서 정신의 이상성과 근원의 직접성, 주관의 자유와 존재의 자발성 등을 대비시키는 전략이 구석구석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가의 시도는 마치 19세기에 진정한 예술이 파괴되었다고 자각한 예술가들이 자연의 유기적이고 장식적인 형태를 차용하여 새로운 미술운동을 일으켰던 "아르누보"처럼 21세기의 새로운 미술세계를 창출하리라 기대한다. ■ 이지호

Vol.20070109b | 故 이동석 추모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