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기둥 2006

황성동展 / HWANGSUNGDONG / 黃成東 / painting.installation   2006_1209 ▶ 2006_1223

황성동_인간기둥 2006 A-대한민국 국회_상자에 유채_60×70×60cm_2006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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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6_1209_토요일

갤러리 온 GALLERY ON 서울 종로구 사간동 69번지 영정빌딩 B1 Tel. +82.(0)2.733.8295 www.galleryon.co.kr

인간을 향한 진솔한 시선 ● 무의식적인 말이나 행동은 그 사람의 사고를 반영한다. 그림 또한 그것을 그린 사람의 의식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의도적으로 그것을 가리거나 왜곡해 놓는 수도 있기는 하지만. ● 황성동은 긴 기간 사람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왔다. 사람과 삶, 그리고 그 삶이 얽혀 있는 사회와 같이 사람을 둘러싼 것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2002년 이후의 그림들은 사실적인 인체묘사를 중심으로 화면 전반을 구성하는 형식에서, 거칠고 두터운 붓질로 재구성된 인물을 위주로 하는 화면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신체(더불어 정신이 담긴 그릇으로서의 육체로서)와 함께 그것을 둘러싼 정신적·물리적 환경과 상황을 암시하는 듯이 구성된 다양한 화면에서, 인간의 모습 자체에 집중하는 양상으로 바뀌었음을 보게 된다.

황성동_인간기둥 2006 A-대추리 주민_상자에 유채_60×70×60cm_2006_부분

이러한 변화는 그의 인간에 대한 상대적으로 사적(私的)인 탐구와 이해가 인간 보편으로, 그리고 개개의 인간을 규정하는 외계와 그 관계로 더욱 일반화되었거나, 자신의 주제를 보다 명확히 드러내고자 하는 변화로 생각된다. 그것은 작가에게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양식이나 경향의 변경을 넘어서 작가 자신의 조형적 지향과 성취의 내용을 달리하게 하는 매우 근본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한 요즘 그의 그림은 매우 투박하다. 투박하다는 말은 진솔하다는 말과도 때로는 연결이 될 터인데, 진솔하다는 느낌을 익명화한 거친 표현의 그의 인물상에서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공교함이나 화려한 붓놀림이 없이 되는 대로 그린 듯이 해놓았다고 해서 투박함과 가식 없는 진솔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제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미술교사로서 학생을 가르친다. '교단일기'라는 만화를 통해서 교육현장의 현실을 드러내며, 관련 단체에 만평을 기고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노동만화네트워크'의 회원으로 한 노동자로서 보다 나은 삶과 사회를 향한 일에 함께하고 있는데, 그러한 활동의 하나가'노동만화전'참여다.

황성동_인간기둥 2006 A_상자에 유채_60×60×210cm_2006

이러한 활동은 언뜻 보기에 그를 매우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민중미술가로 여기게 할 수도 있다. 소위 386세대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것이 그의 나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말에 손을 내젓는다. 자신의 생각이 "참여적 경향의 당위성이나 문제의식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교사로서나 한 사람으로서 합당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다(작지만 당차보이는 외모를 가진 그는 자신을 "데모 한 번 못해본 소심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그는 전화 통화나 작업실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나 겸손하고 상대를 배려하며 사람을 대함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렇게 몸에 밴 선의로 상대를 대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황성동_인간기둥 2006 A_상자에 유채_60×60×210cm_2006

그는 인간과 인간이 처한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보다 인간적인 삶을 지향하는 노력에 공감하고 동참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의, 부조리 같은 것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것에 조형적 수고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인간과 삶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바탕에 둔 실존적 물음과 문제제기가 그의 작업에 핵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사회의 여러 현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에 투영되고, 그들을 선악으로 구분하기에 앞서 그러한 삶으로 규정지어진 그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비난받고 척결되어야할 인간의 모습일지언정 그렇게 험악한 짓을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참하고 나약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황성동_인간기둥 2006 A_상자에 유채_60×60×210cm_2006

그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 실린 사진이나 자신과 관련된 사진을 바탕으로 작업한다고 한다. 작업 속에는 자신의 학생, 대추리 농민, 몸싸움을 하는 국회의원들, 상봉장에 앉아 있는 이산가족, 이라크에서 납치당한 인질, 컨테이너 속에서 밥을 먹는 수재민들, 그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재구성된 그림은 그들을 어떤 사건 속의 특정한 인물로 확인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이들은 작가에 의해 사건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서 불특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환원되고, 결국 작가는 '누가 어찌어찌 하였다.'라는 개별사건을 '사람이 어찌어찌 하였다.'라는 것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다.

황성동_인간기둥 2006 B_상자에 유채_50×150×240cm_2006

이렇게 사건이나 상황에 누구든 행하거나 처할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게 함으로써, 작가는 현실을 직접 비판하거나 고발하지 않으면서도 비인간적이거나 부도덕한 '인간일반'의 행위와 부끄러운 이면을 드러낸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이 불행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삶의 어두움과 불확실성, 그리고 그 상황을 없던 것처럼 돌리거나 바꾸지 못하고 자신에 의해서만, 자신의 한계와 틀 내에서만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하는 유한한 인간의 숙명에 대한 복잡한 심회를 담아낸다. 그가 지속해오고 있는 '인간기둥', '종이인간', '생각하는 사람' 연작들은 이렇게 부조리한 삶을 나약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며, 종교적인 것으로까지 느끼게 하는 그의 인간에 대한 시선이 삶과 운명에 대한 오랜 관심과 연민을 바탕으로 투박하고 가식 없는 화면으로 만들어진 결과들이다.

황성동_인간기둥 2006 B_상자에 유채_50×150×240cm_2006

작가는 자신과 자신의 그림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지만, 그의 그림에는 분명 오늘날 인간들의 삶과 모습이 있다. 세상이 달라져도 변할 수 없는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물음을 들고, 그는 오늘을 사는 한 인간으로서 인간과 인간이 만든 사회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진솔하게 우리 눈에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 박정구

Vol.20061209b | 황성동展 / HWANGSUNGDONG / 黃成東 / paint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