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眩 · 미迷 · 경景』- 길이 보전하세

안수영 사진展   2006_1206 ▶ 2006_1212

안수영_소양강 처녀의 탄생_디지털 프린트_50×60"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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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206_수요일_06:00pm

학고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39_4937 www.hakgojae.com

안수영의 행적 ● 바로 몇 해 전의 작업에서 작가는 시골 사진관들을 촬영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촌스러운" 그 사진관 입구는 너무 다른 요소들이 뒤섞여 있어 예컨대 보통의 교양 있는 도시인이라면 당혹해 할만한 그 건물의 정면을 제시했다. 정면에서 바라본 사진관은 그 건물의 얼굴이자 또 그 유리창에 진열된 초상사진이라는 얼굴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 곁에서 목판의 붓글씨와 창과 벽에 붙인 필름을 오려내어 붙인 글씨는 해묵은 전통이 오늘의 거칠고 야한 감각과 기묘하게 어울리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대형 판, 원색사진으로 찍힌 그 장면에서는 특히 어린이의 포즈와 복장이 눈에 띠였다. 기념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한 아이들은 미래의 상징이지만, 대체로 한복차림이었다. 이렇게 어른들은 다음 세대에게 미래를 맡기면서도 그들에게 여전히 과거의 전통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여기에는 물론 사진관사진사의 무심한 관행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꼬까옷"이나 "때때옷"이나 "동궁"의 복장을 아이들에게 입히면서, 구세대는 신세대에게 곧 자신이 물려받은 전통적 가치를 이어갈 수호성자가 되기를 염원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이는 결국 아이의 명절이나 생일을 핑계로 기존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부모 자신을 기념하려는 또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진관들은 쨍쨍하고 강렬한 볕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튼 진열장에서 햇빛에 노출되어 빛이 바랜 원색사진이 보여주듯이, 사진관사진사의 직사광선을 무시하는 야만성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사진이 빛에 극도로 예민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변질되기 쉬운 뜨거운 온실 같은 진열창에 사진을 내놓을 수 있을까? 자신의 사진을 그렇게 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똑같은 사람이 촬영한 사진을 두고서도 어떤 것은 작품으로 암상자 속에 모셔두지만, 이 또한 자신의 작업의 결과인데도 상품이라고 간주하고서 완전히 백안시하는 이중적 태도야말로 대중문화를 언제나 저급하고 상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이런 사진들이 감상적인 추억을 환기시키고, 애틋한 지난날의 미소를 떠올리게 해준다 하더라도, 비전문적이며, 가장 아껴야 할 것을 가장 경시하는 태평한 사진사의 이와 같은 행태만큼 인상적인 것은 아니다.

안수영_다섯 개의 현수막_디지털 프린트_50×60"_2005
안수영_영덕 vs 울진_디지털 프린트_50×60"_2005

최근에도 작가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주로 지방의 중소도시들이다. 도시라고는 하지만 행정구역의 편의상 그런 것이지, 사실상 농촌 지역이다. 그곳에 대도시의 요란한 구경거리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교차로나 마을 어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달하게 모습이 바뀌고 있다. 이미 사진이 기록하기도 전에, 마을 초입을 지키던 우람한 나무들이나, 조촐한 모정이나 평상 같은 것도 급속하게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은 전원 생활이나 향촌의 그윽한 정취를 생각하며 농촌을 찾는 사람의 머릿속에나 남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작가가 그렇게 촬영하느라고 발길을 멈추었듯이, 그런 길이 걸어 다니는 사람을 위한 길인지도 의문이다. 거의 모든 농촌 마을에서도 이제 길은 우선 자동차를 위해 포장한 것이니까, 그냥 스쳐 지나버리는 자리가 되었다. ● 마을의 초입은 언제나 중요했다. 마을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와 도시와 나라에서 그 첫발을 들여놓는 입구를 중시하는 태도는 어느 고장, 어느 문화권에서나 한결 같은 일이다. 사람들은 늘 정성을 기울여 꽃과 장대한 나무를 심고, 장승과 입석을 배치했다. 또 공덕비를 세워 마을의 면모와 체면과 위신을 잃지 않으려 했다. 거기에는 우리의 삶과 이상과 염원 같은 것들이 한데 녹아들어 있었다. 마을지킴이 같은 것이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그것들은 그 안쪽 깊은 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안전과 자부심을 지켜줄 수호신이었다. 어지간히 숭고한 함의를 지녔고 또 그곳을 찾는 사람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했던 과거의 당산나무와 입석을 제거한 자리에 이제는 현수막이 나붙고,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작한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잠시 걸리게 될 현수막에서부터 상당 기간 지속될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급조되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게, 이제 막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이런 것들을 사진으로 "길이 보존"해서 우리 농촌 사회의 현기증 나는 변화를 차분히 들여다보게 하려는 듯하다.

안수영_낚시터 물고기_디지털 프린트_50×60"_2006
안수영_...송이버섯_디지털 프린트_50×60"_2005

작가가 노트에서 고백하듯이, 그는 "그림 같은" 사진에는 관심이 없는 만큼, 이 사진 속에는 읽을거리가 많다. 사진을 보는 재미는 굳이 그 속의 이미지를 해석해야 하는 현학적인 놀이나 수고를 하지 않고서도, 즉시 알아볼 수 있는 그 손쉬운 직설법에 있을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고, 전문가의 해설을 따라서 그 도상을 풀이하면서 이해와 감상의 세계로 접어들고자 애써야 하는 그림의 간접화법과 다른, 명쾌하고 기분 좋은 직설법이다. 이를테면, 그림의 세계가 접속법이나 조건법 같은 표현으로 충만하다면, 사진의 세계는 감탄사와 의문사로 넘친다. 작가는 그 밝은 한낮의 광경처럼 자명하고 빤해 보이는 것을 주시하고 사진을 찍어 거기에 의문부호를 붙여본다. 우리는 이렇게 그가 한 번 잘 들여다보라고 보여준 사진 앞에서 그가 무엇을 의아해했는지 함께 짚어볼 수 있다. ● 농촌 사회의 변화는 위기일까 다행스런 전조일까? 그 얼굴의 이와 같은 변화와 그 표정의 이와 같은 관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 농촌의 입구는 그토록 격심하게 다른 모습이 되었을까? 쟁기 끌던 황소가 없어진 자리에 주물이나 신소재로 빚은 그 이미지는 향촌에 대한 예찬에도 불구하고, 향촌에 대한 진정한 애정의 발로일까, 아니면 단지 한우의 맛을 선전하기 위한 안쓰러운 홍보물일까? 거창하게 수십 배 크기로 확대된 과일과 야채와 특산물은 그 마을 주민의 수확물에 대한 즐거운 익살과 해학의 표현일까, 아니면 필사적으로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시장 논리에 발을 맞추려고 황급히 준비한 방패요 가문(가문)일까? 농작물과 생필품이, 전설 속의 인물들이 가벼운 "하이 터치 디자인"을 거쳐 우상으로 다시 태어나 우리를 반기는 이 광경에서 우리는 우리네 삶이 이 새로운 세기초에 더욱 명랑하고 낙천적인 것이 되었다고 인정해야 할까? 알록달록 채색되고, 야한 페인트칠로 눈을 부시게 하고, 가장 감각적인 색조로서 마무리된 이 상품들이 우리 농가의 수입을 훌쩍 키워주고, 그렇게 해서 우리 농가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고 행복하게 해줄 것을 기원하기만 하면 될까? ● 현수막을 보자. 탄생과 합격과 당선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찬사는 그와 다른 더 큰 세력에 대해 격렬하게 성토하는 결사반대의 항의와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따스하게 햇살이 비치는 그 고요함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폭력적이며 후끈한 함성이 플래카드에 실려 바람에 나부낀다. 이렇게 성취의 기쁨과 박탈의 억울함이 한 자리에서 터져 나온다. 지위의 획득이 알려주는 출세와, 경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갈채와 또 여권신장에 위배되는 사고방식이 그 주민들의 지지를 얻고 찬양되고 있다. 자존심에 넘치고 배타적이며, 승승장구하는 것만을 찬미하는 플래카드 속의 언어만큼 파시스트의 언어도 없을 것이다.... 언어는 여기에서 대화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오직 나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그리고 타자에게 귀를 기울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외침이다. 어쩌면 그 외침을 듣는 사람이 없어도 좋다는 태도일지 모른다. 그것은 극단적인 자기도취의 언어이다. 아무튼 마을 입구의 표정은 느긋하고 평화롭지 못하다. 그것은 고함을 지르려고 힘을 쓰고 핏대를 올리는 날카로운 모습이다. 그 입구에서부터 차분하고 정다운 이야기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좋은 이야기이든 나쁜 이야기이든 눈에 띄게 함축된 거창한 발언이 우리를 기다린다. 우리의 일상과 그 감정이 이렇게 둔탁하고 난폭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되레 이상할 것이다. 이것들보다 더 공격적이고 야비한 어조의 광고판들은 우리의 낯을 간지럽힐 뿐이다. 거의 아무런 인물도, 인기척도 없이 텅 빈 광장과 거리를 촬영하면서, 작가는 사진관을 촬영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움직임이 없이 그 재현된 이미지가 반영하는 여러 가지 어법과 수사학을 주목하게 한다.

안수영_한우 복숭아_디지털 프린트_50×60"_2005
안수영_생활 속의 오랜 벗_디지털 프린트_50×60"_2002

거대한 황금빛 물고기 형상으로 둔갑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널 때, 우리의 관광산업이 겨냥하는, 눈길을 끌기 위해 휘황하게 분장한 물고기가 우리의 눈앞을 유유히 지난다. 숭고하고 경이로운 자연을 그저 심심풀이나 볼거리로 분장시키는 이 분주한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관광을 통해서 자연만이 훼손되거나 그 신비함을 잃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향토가 우스꽝스런 가상의 체험관이나 놀이동산 같은 것으로 바뀌고 있다. 이렇게 우리를 안내하는 친절한 이미지 때문에 향토와 자연은 더욱 희극적인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닐까? 향토 이미지의 개발은 그 땅에 집을 짓고 거대한 생산단지로 만들고자 가해지는 개발 못지 않게 파괴적이고 반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구전을 통해서 전해지던 전설의 고향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각자의 상상 속에서 그 이미지의 날개를 펼 때 더욱 풍부하고 재미있게 생동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전형과 상투형에 따라 빚어진 사물과 인물들이 이렇게 동구 밖까지 나와 우리를 영접할 때, 우리의 기대와 공상은 그 마을 속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벌써 바람이 빠지고 시큰둥해지는 것은 아닐까? 구전되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구전의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닐까? 오래 된 가옥과 절과 공공 건물에서 그 현판에 새겨진 글자를 음미하면서 한 시대와 한 지역의 풍취를 되새겨보는 대신, 이런 이야기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 기이한 조급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각박해진 인심과, 해체되는 공동체와, 잃어버린 풍속의 자리를 대신 채우자면 이렇게 요란하고 안심해도 좋을 정도로 눈앞에 확신을 주는 우상들이 필요하다는 말일까?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만 고유한 가치를 지니는 것을 외면하고서, 오직 눈에 띄는 구경거리 속에서만 확증을 얻고 싶어하는 이러한 조형물의 과잉과 과장은 여론과 인기와 대중매체처럼 왕왕 대고, 과시하고 시위하는, 크고 많은 것에만 가치를 두고 싶어하는 우리네 민심의 반영일 것이다. 소박하고 조촐하며, 작지만 진솔하고, 나직하지만 진지한 것에 대한 사랑은 이제 정녕 되찾기 힘든 일일까? ● 사진관 앞에서나, 마을 어귀에서나 작가는 환하게 드러난 우리 이미지 문화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일종의 통제사 같은 임무를 수행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악몽까지는 아니더라도 백일몽처럼 빨리 깨어나고 싶고, 스쳐 지나도록 내버려두고 싶은 그 장면을 그는 사진 속에 "길이 보전"함으로써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이미지 숭배의 한 연대기를 쓰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 정진국

Vol.20061206a | 안수영 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