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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29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은숙_김혜옥_임원진_손이숙_천명_한현수
갤러리 룩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02_720_8488 www.gallerylux.net
열심히 일하라. 일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니! ● 일요일 저녁이 되면 초점 풀린 눈으로 텔레비전 앞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우리를 향해 들려오는 목소리. 이제 내일부터는 너의 성공을 위해 한주 동안 최선을 다하라는 명령이 귓가를 맴돈다. 화면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이 살아온 인생의 모습과 그들의 수고로운 노력을 보여주면서 성공하려면 저렇게 열심히 일해야 한다며 잠시 흐트러진 우리의 마음과 잊었던 성공에 대한 욕망을 다시 일깨워 준다. 한편 그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이사이에 우리는 또 전혀 다른 세계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너무나 멋진 선남선녀들의 이야기와 함께 만약 이것들을 소유한다면 당신은 참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고 그 성공을 통한 부의 축적과 또 그 축적된 부를 통해 더욱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소유하고 소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게 된다. 결국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 ● 열심히 일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도 생산 체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모든 분석은 생산 활동과 함께 하였다. 서비스 보다는 제조가 우선이고 노동이 여가를 우선하며 노동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명제 아래에서 교육받고 살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생산한 모든 것들이 전부는 소비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어내는데 주력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열심히 소비하고 생산을 줄여야 하며 또 잘 놀아야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분배가 아닐까?) ● 사실, 열심히 일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보다는 생산 활동만을 일로 보는 데서 벗어나 그 이상의 것들을 일로 보는 유연함을 가져야 하며 어쩌면 그것이 이미 우리의 현실이다. 산업사회 이전의 사회 형태는 일과 여가를 구분하기보다 여가가 일 속에 섞여있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최근에 『몽골리안 핑퐁』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몽고인 가족은 먹고 살기 위해 하루 종일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여가의 구분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삶이 바로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삶일 터인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노동윤리라는 것에 의해 일을 할 때는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즉 일과 여가는 구분되어 있고, 이 둘의 명확한 분리는 오히려 여가에 대한 욕구를 점점 더 커져가게 하고 있다. 이제 일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소비와 여가가 우리의 삶을 구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우린 외쳐본다. 일, 노동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라고!! 달콤한 슈가 그리고 여가 ● 그러나 노동을 통해 구원받지 못한 우리는 이번에는 여가를 통해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달콤한 설탕 같은 휴식에 이어지는 여가. 이제 도시인들에게 일과 여가는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가의 근원이 어디에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다. 여가는 사실 산업화 과정에서 일이라고 하는 것의 체계화를 통해 생겨난 것이다. 즉 자본주의의 심화와 함께 노동의 체계를 통해 생산의 극대화를 이루어야 하는 상황은 일과 휴식을 구분해야만 하는데 이르게 된 것이다. ● 사실 과거의 우리는 일하는 것이 노는 것이고 노는 것이 일하는 것인 사회를 살아왔다. 여가와 일 사이에 구체적 구분은 필요 없었고 서구사회 또한 그러한 구분이 생긴 것은 산업사회 이후의 일이다. 그 구조가 만들어 내는 일과 여가의 분리를 통해서 자본주의 의 공고화를 목적으로 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사실 일의 윤리성과 결부된 여가는 기껏 금욕의 대상이거나 내일을 위한 휴식 또는 기분 전환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치부 되었다. 하지만 소비사회로의 전환에 따라 여가는 소비를 위한 중요한 방편이 되었으며 노동시간 이외의 시간을 여가라고 분리하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우리를 소비의 주체로 전락시켜 버린다. 따라서 여가는 이제 더 이상 단순히 달콤한 휴식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새로운 부의 창출, 이윤 추구 등을 강력하게 실천하면서 소비를 부추기고 완성하기 위한 규칙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이제 여가는 여가만을 위한 공간들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즉 테마파크, 까페 등과 같은 공간들은 여가만을 위한 공간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되기까지 한다. 이렇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왜 우리가 여가를 통해 사회를 보여주는 일을 주저할 것인가
김은숙의 작업들 속에는 무리지어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여진다. 마치 우리의 삶이 정형화된 패턴을 갖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여가 역시 그러하다. 여가는 현대에 와서 더욱 시스템을 갖추고 규칙에 의해 형태를 만들어내어 그 게임의 규칙을 따라서만 움직인다. 김은숙은 그 패턴에 관심을 드러낸다. 우리는 결국 노는 것에서 조차 어떠한 시각적 패턴을 만드는데 그녀는 시선은 거기에 모아진다. 커다란 홍수로 쓸려간 자연의 황량함 앞에 모여든 관광객들이 주변을 살피고 구경 한다든지, 분단 상황을 단순한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궁금해 하면서 그것들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들은 우리 삶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드러낸다. 언젠가 다리가 무너지거나 백화점이 부숴 졌을 때도 사람들은 텔레비전를 통해 그것들을 구경하고 있었던 생각이 난다. 세상은 온통 구경거리이고 스펙터클하다.
김혜옥은 오랫동안 한강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사람들의 여가행위를 관찰하고 찍어왔다. 연인들이나 운동을 위해 나온 사람들, 할 일없이 배회하는 사람들, 조금의 여유를 즐기려는 사람들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간인 한강은 얼핏 볼 때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 거기에는 여가에 대한 미세한 욕망과 그것을 누리는 방식 사이에 스테레오 타입이 드러난다. 마치 평화로운듯 하기도 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그 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그녀는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손이숙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여러 신분의 사람들 중 특히 주부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낮 시간에 집에 있을 수 있는 여자들의 모습인데 딱히 여자들만 그렇게 낮 시간에 여가를 즐겨야 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자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녀는 그들의 삶의 형태를 한발자국 떨어져 보고 있다. 사실 조금만 거리두기를 하면 그들의 삶이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렇게 정형화된 유형은 작업에 바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정형화된 삶은 규칙을 만들고, 자신들이 그 안에서 반복된 삶을 살아 가고 있다는 것을 잊게 만든다. 마치 그 장면들은 하나의 조작된 셋트장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그 곳은 행복을 만드는 장소같아 보인다. 그녀들의 행복은 그 안에서 너무나 잘 지켜지고 있다.
임원진의 작업은 우리의 전통을 현대화하는 것에 있다. 선조들이 즐기던 여가의 하나인 민화를 사진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이다. 민화는 서민의 놀이이고 여가였다. 그것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서 과거에 만들어낸 여가를 통한 예술행위들을 현대화 시킨다. 그녀의 작업에서는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꽃들이 등장하고, 벌레들을 대신한 초코 볼이나 나이키 골프공 같은 소품들이 유머 있게 등장하여 현대화된 초충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행위들은 그녀가 과거의 우리 선조들의 여가활동이 만들어낸 시각적 소산들을 어떻게 지금 현재와 연관시켜 작업으로 만들어 가려고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 보인다.
천명은 도시인들의 로망이 깃든 장소인 바다를 찾는다.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힘든 생활을 벗어나 바다라는 곳에 홀로 또는 함께 서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다는 여가의 중심에 있는 장소다. 우리의 판타지는 바다라는 장소를 여가활동을 위한 매우 중요한 장소로 인식한다. 그곳은 떠들썩하며 소비의 중심이 되는 시간인 여름의 바캉스와 함께 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어있다. 하지만 그녀의 바다는 그러한 소란스러움 대신 적막하고 쓸쓸하다. 모두가 떠나간 후의 바다에서 수평선을 향해 돌아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 그 모습은 여가의 소란스러움이 아닌 다른 유형의 여가에 관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여름의 소란스러운 소비적 여가와 적막함 속의 여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또한 사진 속의 사람들은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저 무심히 지나치고 사라져갈 뿐이다. 마치 바다가 그렇듯 다른 그 어딘가 피안의 세계를 향하여 있는 듯 말이다.
한현수는 여가를 즐기는 공간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들을 보여준다. 그녀는 처음에 여가의 공간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시작 했으나 차츰 다큐멘터리적 접근보다는 비현실적인 접근을 통한 일상의 비 일상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현실의 공간 안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만 보여 지는 것들은 점점 더 현실과 멀어지는 공허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것은 여가가 일상 속에서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데 현대인들은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서 여가를 즐기거나 혹은 일하거나 하는지가 보여지고 있다. ● 이렇게 6명의 작가들은 각자 여가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자신의 방식대로 보여준다. 여가는 현대에 와서 더욱 그 시스템을 공고히 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별 생각 없이 안락함의 상징이나 자유로움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여가라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산업의 형태가 되었고 우리는 거리 두기를 할 사이도 없이 그곳에 매몰되어 가고 있다. 숲을 보기 위해 숲에서 나오듯 여가라는 체계를 보기 위해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여가로부터 한발 뒤로 물러나 그것들을 관찰한다. 이제 그들은 여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은 누구에 의해 또는 무엇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지 회의하면서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 ■ 염중호
Vol.20061130b | 하니 슈가 여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