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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17_금요일_06: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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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구멍의 세계 혹은 시멘트들 ● 몸은 무수한 구멍들로 이루어져 있다. 눈·코·귀·입·항문·성기는 그야말로 구멍들이며 가시적이지 않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세한 모공들이 몸을 장악하고 있다. 신체는 그런 점에서 거대한 구멍이며 텅 빈 공간이다. 몸의 표면만 그런 것은 아니다. 뼈와 내장기관 역시 구멍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멍'이 곧 몸의 조건임을 의미한다. 물론 구멍이 너무 크게 생겼을 때, 몸은 큰 위험에 처하거나 골다공증 등등으로 몸 자체를 유지하기 어려운 질병에 빠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몸의 본래적 조건보다 더 큰 '구멍'은 생명의 조건을 거두어들일 수도 있는 셈이다. ● 구멍이 생성되는 것과 달리 이 '구멍'을 무엇인가로 채우려는 시도도 그래서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몸을 도리어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혹은 성기와 같은 특정한 몸의 구멍을 지속적으로 채우려고 할 때도 그러하며 내장기관이 에너지를 다른 기관과 교환할 수 없게 되어버린 막힌 회로일 때에도 몸은 치명적인 위험에 빠진다. 특히 성기는 프로이트의 말을 빌자면 '피부인지 장기인지' 경계의 구분조차 어렵기 때문에 종종 치밀하게 국가·사회로부터 관리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말하자면, 구멍은 은폐되고 그 구멍을 무수한 사회적 담론에 의해서 채워 버린다는 것이다. 몸은 그 지점에서 사라진다. ● 그러므로 구멍은 가시적인 대상일 수 없으며 몸은 철저히 사회적 체계 내부로 옮아가 버린다. 예절과 의복 속으로 몸은 숨고 더 이상 몸을 몸으로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포르노조차 특정한 시선에 의해 제작되고 유통된다는 점을 떠올리면 몸에 걸려 있는 과부하를 떼어내기란 지극히 어렵다. 박자현이 '몸'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이런 점에서 비롯된다. 박자현에게 몸은 순수한 '구멍'이다. 박자현이 구현하는 '몸'은 '구멍'으로서 몸을 충실하게 뒤따르며 꼼꼼하게 때로는 지독하게 보일 정도로 구축한다. 박자현 자신의 말을 빌자면 몸을 구축하는 박자현의 팔은 말 그대로 '기계'와 다름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화폭에 '구멍'을 낸다.
그렇다고 해서 박자현이 화폭에 실제로 구멍을 뚫는 것은 아니다. 화폭은 무수한 '점'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화폭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것을 구멍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문제는 박자현이 찍는 '점'은 '구멍'이 실질적으로 은폐되는 면을 통해 몸을 구성하지 않고, '구멍'이 곧 몸임을 증명하는 데에 역점을 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구멍'을 드러내는 방식이 빈 화폭의 여백을 채움으로써 가능해진다는 역설 때문에 박자현의 작업이 채움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지만, 박자현은 채우기보다 섬세하게 비움으로써 몸을 몸 자체로 보존하려 한다. 박자현에게 몸은 무수한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펜으로 찍는 점은 곧 구멍이라는 의미이다. ● 일찍이 이 '점'에 대한 성찰은 인상주의자에서도 있어 왔고 개념적으로 칸딘스키에 의해 주장되어 왔지만, 박자현의 점은 그들이 제기한 점과는 다른 경로 위에 서 있는 듯하다. 점묘법이 실상 점이라기보다 (색)면이었다면, 박자현이 펜으로 찍는 점은 면의 조건이 아니라 그저 '점'으로 주어진다. 즉, 점묘법이 색면을 통해 의도적인 왜곡을 거쳐 대상을 드러내려했다면, 박자현은 대상의 피부 세포에 나 있는 모공을 하나하나 찍을 뿐 왜곡된 그리기를 통해 대상의 상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박자현은 '그리기'를 회화의 문제로 인식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칸딘스키의 주장처럼 그리기의 근본조건이 점·선·면이라면 박자현은 '점찍기' 혹은 '구멍내기'가 오히려 대상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작법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자현의 점―구멍을 통해 드러난 작업이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오인되는 것은 해명을 하고 넘어가야 한다.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 구멍을 냈음에도 대상이 마치 실제하는 그것과 동일한 형상을 지니는 것은 '효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예컨대, '하이퍼―리얼리즘' 계열의 작업들이 종종 실제 사물을 정밀하게 묘사하여 대상을 대상으로 남겨두지 않고 환상으로 전화시키는 데에 반해 박자현의 화폭에 드러난 몸은 환상으로 이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자현의 구멍들이 실제하는 대상과 동일하다고 착각하는 형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점―구멍이 지각되지 않고 형상이 덩어리로 주어져서다.
요컨대, 박자현의 작업이 점 하나 하나로 지각되지 않고 덩어리로 다가오기 때문에, 작업에 의해 표현된 대상은 현실로 안착한다. 너무 리얼하기 때문에 도리어 왜곡된 것처럼 여겨지는 하이퍼―리얼리즘 계열과 결별하는 대목은 이 지점이다. 물론 대상이 발산하는 빛의 양에 반응하는 흑백사진으로 받아들일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박자현의 점―구멍은, 마치 사진을 찍을 그 당시의 '현실'로 되돌아오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현실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그것이 환상은 아니다. 관람자들은 그러할 것이라는 현실을 스스로 구성하면서 지각된 대상이 실재할 것으로 오인하는 그 현실을 의식 속에 마련한다. 사실 그것은 의식 속의 현실, 즉 없지만 리얼한 현실을 생산한 것이다. ● 관람자가 구성하는 리얼하다고 착각하는 현실과 박자현이 제공하는 현실은 '시간' 관념이 탈색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무중력 공간을 창출하는 박자현의 작업은 현실이 개입하기 쉽도록 구멍으로 개방된다. 몸이 외부와 명백하게 분할되는 게 아니라, 구멍으로 비워져 있듯, 박자현의 '점'은 덩어리로 고정되지 않고 덩어리 외부와 연동된다. 즉, 박자현의 작업은 회화사 내에서 몸이 살과 피, 뼈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개념적으로 누누이 강조해온 계열체에 잇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몸의 안과 밖을 뒤바꾸거나 뒤섞는 프란시스 베이컨과 같은 계열체에 박자현의 작업은 더 가까이 놓여 있지 하이퍼―리얼리즘의 계열을 뒤따르지 않는다. ● 아니, 어쩌면 하이퍼―리얼리즘 계열의 회화들은 궁극적으로 사물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더 미세하고 섬세하게 대상에 다가간다면, 대상이 이루는 경계란 그리 명확하게 분절되어 있는 게 아니라 느슨하고 뿌옇게 서로 접속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호흡은 특정한 몸의 기관만이 담당하는 게 아니라 온 몸으로 하는 것이고 얼굴을 현미경으로 좀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몸과 몸 외부는 단절되지 않는다는 과학적 진술에도 귀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박자현의 드로잉 작업에서 이러한 사실을 보다 잘 알 수 있다. 마네킹처럼 분절된 몸과 텅 빈 몸 속에 똬리틀고 있는 '뱀'(욕망)의 형상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 박자현의 작업은 점―구멍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한국화의 방법을 연상하게 한다. '여백'을 핵심적인 모티브로 삼고 있는 한국화의 전통도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데에 주력하고 있지 않던가. 비약하자면, 박자현의 작업은 점―구멍과 빈 공간이 이루어내는 독특한 화법으로 이해될 법하다. 빈 공간에 다시 구멍을 뚫는 다소 기이하고 병리적으로까지 여겨지는 이 방법을 통해 박자현이 구성하는 작업들이 '동성(同性)'의 세계인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박자현의 작업이 이상적 세계를 표상하는 것은 아니다.) 작업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남성의 몸에 한정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남성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뮤즈'로 부르고 있는 것에 알 수 있듯, 박자현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은 남성의 표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어차피 구멍을 채우고 마름질하려는 남성적인 방식으로 형상이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박자현의 인물은 완전한 남성으로 파악하기에는 어딘가 미심쩍지 않는가? 혹시 그 인물들은 자웅동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박자현의 드로잉은 그 사실을 곧바로 지각하게 만들어준다. 드로잉 북의 제목이(이 제목은 어느 단편영화에서 빌려썼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를 악에서 구하지 마세요」도 이 자웅동체에 도달하려는 작가의 무의식적 욕망의 소산일 수도 있겠다. ● 그러므로 박자현의 작업에 등장하는 남성적으로 보이는―여성―남성은 '남성' 세계를 보완하는 일종의 '시멘트'로 자리잡는다. 주디스 버틀러가 지적한 것처럼 이들은 현실 내부에 있지만 현실에 존재할 수 없고 다만 '이성애'적 현실이 균열을 일으키는 자리에 위치하는, 벽돌이 붙도록 기능하는 접착제로만 생존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박자현이 구축하는 세계는 '나르시시즘'의 세계이며 시작 없는 시작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그래, 이제야 말하지만 박자현의 첫 개인전 이후가 기대되는 것도 그녀의 작업의 기조를 이루는 '나르시시즘' 이후가 더욱 기대되어서이다. 벽돌을 세우게 만드는 시멘트로서만이 아니라 혹은 점―구멍으로 그칠 게 아니라, 벽돌세계의 침입을 허용할 때 과연 박자현의 작업이 어떻게 변용될까가 궁금해서 계속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게 만들고 있으니까. ■ 김만석
Vol.20061125e | 박자현 펜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