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그리는 풍경

변웅필 회화展   2006_1123 ▶ 2006_1227

변웅필_한 인간으로서의 자화상 38_캔버스에 유채_150×13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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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23_목요일_05:00pm

갤러리 잔다리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0-12번지 Tel. 02_323_4155 www.zandari.com

디지털 카메라 앞의 나르킷수스 - 변웅필의 자화상들 ● 디지털카메라를 신체의 연장인 양 사용하는 세대는 자신의 모습에 익숙하다. 거리며 카페며 심지어 식당에서 음식을 앞에 놓고도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얼짱각도'로 비춰진 자신의 모습에 탐닉한다.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새로운 놀이를 발견한 아이의 열광과 희열이 이와 크게 다를까. 변웅필의 자화상 연작들은 디지털 카메라 앞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찍은 자신의 이미지를 다시 회화로 작업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세태와 정서와 동일선상에 있는 듯 하다. ● 전통적인 자화상은 물론 거울에 비친 화가의 얼굴을 재현한 것들이다. 디지털 카메라는 금방 찍은 이미지를 바로 확인하여 취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지 거울처럼 마주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아날로그 카메라의 순간포착 능력과 거울의 기능을 동시에 구비한다. 디지털 시대의 자화상이 일찍이 사진을 이용해 온 자화상들과 다른 점은 우선 그와 같은 조건에서 발생한다. 누군가에 의해, 혹은 미리 설치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 앞에 스스로를 객체화하는 기묘한 순환관계, 자폐적인 유희의 기록들이 이른 바 셀프-카메라의 궤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거울 앞에서 난생 처음 자신의 이미지를 종합하게 되는 유아와도 같이 희열한다.

변웅필_한 인간으로서의 자화상 39_캔버스에 유채_150×130cm_2006
변웅필_한 인간으로서의 자화상 43_캔버스에 유채_150×130cm_2006
변웅필_한 인간으로서의 자화상-표출_캔버스에 유채_120×100cm_2006
변웅필_한 인간으로서의 자화상-키스_캔버스에 유채_120×100cm_2006
변웅필_한 인간으로서의 자화상-러브_캔버스에 유채_120×100cm_2006

일련의 자화상에서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꼬집고, 일그러뜨리면서 브루스 노먼의 90년대 비디오 작업에 등장할 법한 자해에 가까운 포즈를 취한다. 흡사 그와 같은 포즈들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려는 듯 얼굴에 가해지는 폭력은 점차 그 수위가 높아져서 급기야 끈이며 플라스틱 테잎 같은 소품들까지 동원된다.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보는 이미지, 즉 회화의 원본이 태생적으로 시뮬라크르, 즉 디지털 사진의 이미지라는 점이다. 물론 세상에 실재를 보고 그린 자화상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이 작가의 경우 카메라의 존재와 디지털 이미지 자체의 중요성이 결정적인 요소임은 여러 가지 사실을 근거로 주장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초기 자화상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거울이 아닌-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시선이 강조될 뿐 아니라 그와 같은 이미지를 좌우 반전시켜 두 개의 거울 이미지를 동시에 설치하는 경우가 있었다. 게다가 그가 확대하여 그린 거대한 얼굴이 가로방향의 붓질로 층층이 등고선처럼 채색된 방식은 디지털 이미지를 확대할 때 흔히 접할 수 있는 픽셀의 번짐 현상을 반영한다. 요컨대 이 이미지들에 반영된 것은 작가 자신의 시선만은 아니며, 어떤 의미로는 그보다 더 강력하게, 카메라라는 기계의 시선이 자취를 남기고 있다. 표현매체와 형식이 표현내용을 지배한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화면에, 혹은 그림 속의 거울에 얼굴을 밀어붙인 모습들을 그린 자화상들에서 발견된다. 이런 유형의 그림들이 캔버스 표면이라는 절대 투과불가능한 회화의 존재론적 장에 부딪힌 이미지의 운명을 보여주는 듯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최후의 절대적 거리, 눈 앞의 이미지와 우리를 영원히 갈라놓는 경계로서의 캔버스 표면은 그림 속의 가시적/비가시적 거울로 가시화되고 있다. 그래서 화가는 운명처럼 그 면에 부딪힌다.

변웅필展_갤러리 잔다리_2006

신화 속 나르킷수스가 죽음에 이른 것은 자신의 모습이 비친 샘물에 빠진 탓이 아니다. 정작 그가 헤어나오지 못한 것은 자신의 이미지를 바라본다는 행위의 중독성이다. 변웅필의 이 흥미로운 자화상 연작들의 과제 역시 그와 같은 중독을 어떻게 비켜나가거나 벗어날 것인가를 모색하는 데 있지 않나 싶다. ■ 정유경

Vol.20061123f | 변웅필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