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Human + Fish)

수경 회화展   2006_1122 ▶ 2006_1128

수경_수영에 미친 인어가 되는 꿈_한지에 연필드로잉 수간채색_90×7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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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22_수요일_06:00pm

갤러리 도스 2006 하반기 공모기획전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갤러리 도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55-1번지 2층 Tel. 02_735_4678 www.gallerydos.com

수경 개인전: 치료의 실마리자아의 동일성과 자기소외는 애초부터 한짝이다. 그러므로 자기소외는 잘못된 낭만적 개념이다.(T. Adorno) ● 1.정신분열의 모티브는 E.T.A.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젊은 수도사 메다르두스가 정체불명의 약을 먹고서, 온갖 악행과 범죄를 일삼으며 자신의 망령과 싸우다가, 결국 파멸한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도플갱어Doppelganger'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여러 가지로 옮길 수 있으나, 보통 '자신과 똑같은 인간'을 지칭한다. 소설 탓인지 속설 탓인지, 현실에서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고 한다. 하기야 어떤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만은, 어쨌든 이러한 테마는 지금까지 반복되고 변주되고 있다. 그만큼 흥미로운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흥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자아의 변화를 함축하는 지극히 철학적인 문제였다. 우선 이 텍스트가 출간됐던 시기를 생각해 보자. 때는 1816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가 1796년 출판됐으니까, 20년 흐른 후다. 젊을 때의 권총 자살을 한 베르테르를 뒤로 하고 괴테는, 현실과 어떻게 하면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지 고심하며, 고전주의로 돌아선다. 그의 소설을 형용하는 '아름다운 영혼schone Seele'은 그렇게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배신은 측근의 몫인가 보다. 바로 그곳 독일에서 아름다운 영혼은 악마의 묘약을 먹고서 제 정신을 잃어버리니까. (근대 주체철학을 완성한 헤겔의 "논리학"이 출판된 시기도 이때였다) 그때부터였다. 분열의 모티브는 아예 자신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은. "환상성은 여기서 진실의 적극적인 구현이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자극이며, 보다 중요하게는 진실을 시험하는 것이다."(바흐찐) 환상(장르)fantasy은 칼과 마법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명민한 근대주체를 의심하고 투명한 근대세계를 시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분열의 모티브가 겨냥하는 과녁은 명확하다. 자아의 동일성을 비웃는 것이다. 분열의 모티브가 "악마의 묘약"처럼 똑같은 인간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정도는 약과에 불과하다. 카프카의 "변신"은 훨씬 극적이어서, 그레고르를 아예 벌레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자 비웃는 정도를 넘어서, 실존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 "성"에서 하염없이 헤매는 주체를 생각해 보라. 보이지 않는 외부의 손길 때문에, 그는 현실의 좌표를 상실하지 않았는가. "사람이란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여기기 위해서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깊이 내려가 보았어야 하지요."(보들레르) 카프카는 밑바닥보다 깊이 내려갔는지, 결국 올라가지 못했다. 수경은, 바로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수경이 묘사한 존재는, 그곳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사다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수경_찾아간다_한지에 연필드로잉 수간채색_47×28cm_2006
수경_아닌 너_컬러, 스테레오, DVD_00:01:40_2006

2.먼저, 수경의 작업에서 눈에 띠는 '형상'부터 살펴보자. 대략 두 명의 존재가 등장한다. 한명은 가냘픈 육체에 머리가 무겁고 손발은 빨갛다. 이 존재는 때때로 머리와 육체는 자유자재로 분열되기도 한다. 다른 한명은 빨간 머리 소녀다. 하지만 무엇인가 이상하다. 눈이, 물고기인 것이다. 물고기가 없으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존재, 그래서 물고기는 마치 영혼처럼 보이며 소녀는 속없는 껍질처럼 보인다. 머리가 분리되는 존재나 영혼이 물고기인 존재는, 모습을 달리 했을 뿐이지, 메다르두스와 그레고르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현실에서 소외됐을 뿐더러, 현실로 들어갈 입구를 찾지 못해서, 아니면 찾지 않아서 떠도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존재와 상황은, 수경의 전작인 「가수 앵앵이양의 삶과 죽음」과 비교해 보면, 상당한 퇴행이다. 전작에서 삶과 죽음은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상투적인 이야기를 구축하며, 현실을 조롱하는 전략을 선택했던 그녀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롱의 화살을 자기자신에 겨누었다. 그 결과, 얼마간 남아있던 재치마저 사라지고, 조금씩 작아지고 속내가 비어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주체를 왜소하고 무능력하게 만드는 일이란, 현실에서 매일매일 겪는 일이므로, 하나씩 열거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현실에서 물러나고 주체가 '하강'한 변형을 읽어내는 것은 필요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질적인 존재의 침투다. 물고기 옷을 뒤집어는 쓰는 경우, 물고기가 눈에 들어가 영혼이 되는 경우, 물고기를 배속에서 토하는 경우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여러 종류다. 그런데, 어느 경우든 침투가 완벽하질 못하다. 두 존재가 완고하게 자신의 존재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존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이질적인 것의 결합, 즉 병치에 가깝다. 주체의 분열은 더욱 심란해졌다. 한쪽을 죽일 수도 없고, 아예 한쪽으로 통합될 수도 없는 상태. 더구나, 두 존재 모두 눈이 멀었다. 한쪽은 두툼한 안경을 썼고, 한쪽은 물고기 눈이다. 마음의 창문이라는 눈이다. 세상이 비치는 곳이 눈이다.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사다리를 찾기란 더욱 어려워진 것 같다.

수경_악설_한지에 연필드로잉 수간채색_130×190cm_2006
수경_모두 다 말라갈 때_한지에 연필드로잉 수간채색_35×53cm_2006
수경_너에게 간다_한지에 연필드로잉 수간채색_53×35cm_2006

3.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이전과 다르게 이미지가 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중요한 점은 그녀가 이미지에 시간을 부여하며, 서사를 진행시켰다는 것이다. 정지된 이미지의 확장 정도가 아닌 것이다. 오늘날 서사는 부당하게 비판받고 있다. 서사가 언제나 대문자 전형Typus을 구축하며 미시적인 경험을 희생시킨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이다. 자기구술은 고통을 읊어가며 주체 스스로 치료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고통의 기원이 밝혀지고 현재의 위치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미로에 빠졌다면, 부정하기보다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도르노가 하는 말은 뼈에 사무친다. 그의 말대로, 무엇이 됐든 자기기만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고, 더불어 끌고 갈 방법을 찾는 수밖에. 그것이 작업의 '형식'에 남아있는 작은 실마리일 것이다. ■ 김상우

Vol.20061122c | 수경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