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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09_목요일_06: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2:00pm~07:00pm
갤러리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참여연대 옆) Tel. 02_720_9282
단체 사진 위로 반사된 고요한 자상(刺傷) ● 깨끗한 살갗과 그 위로 어울리지 않게 올라앉은 깊은 자상(刺傷) 사이의 극적인 대조는 시각적 거북함 이상의 인위적 어색함을 자아낸다. 앤틱 소품으로 엄숙함이 내리깔린 인테리어와 그 속에 던져진 젊은 여성의 반나체는 신고전주의가 선사하는 익숙한 구도일 게다. 그러나 이 보수적인 광경은 특수 분장이 실현한 갈라진 피부의 재질감으로 인해 부자연스러운 균열을 갖는다. 2년 전 발표된 「Lost in desire」(2004)의 형식은 대강 이렇다. 이 연작은 어지간히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라, 육감적 여체 위로 새겨진 깊은 생채기는 작가 곽윤주의 대표 포트폴리오 마냥 각인되었다. 또 '욕망에 빠진'으로 풀이될 제목과 거의 반은 벗은 여체의 뒷모습과 가늘게 갈라진 환부는 타이틀과 형상 사이를 친숙하게 연관시킨다. 설령 그것이 오독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곧잘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틀거리를 통해 익숙한 해답에 다다를 이 연작은 곧잘 떠올리는 '바로 그' 욕망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게 작가의 변이다. 이렇듯 곽윤주는 곧잘 오해를 받는다. 정상 사회가 요구하는 욕망은 정형성을 띈다. 신고전주의의 구도와 하얀 살갗의 여체가 결합하면 매우 정합적이다. 그렇지만, 완벽에 가까운 '욕망의 화면' 속에 고의로 칼집을 낸 곽윤주의 난도질은 숙달된 기대심리의 정상성에 흠집을 낸다. 이렇듯 곽윤주의 지난 작업 연보를 살피면, 다분히 상식적 해석자의 오해를 살만한 이력이 잦다. 「의지의 승리」연작(2006)만 해도 그렇다. 제목만 접하면 정치적 파시즘이 투영된 결과물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작가 스스로 그 제목을 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을 대표해 온 정치 선전 영화 「Triumph des Willens(한역된 제목: 의지의 승리)」(1935)에서 빌려왔다고 실토한 터라 더더욱. 그렇지만 작가가 30년대 기록영화의 제목을 차용한 것은, 해당 영화의 전체 골격이나 내용과는 연관성이 깊지 않다.
단지 '의지의 승리'라는 선언이 연상시키는 바와 곽윤주가 수 개월간 어린 무용수를 관찰하며 얻은 인상이 동형적이었기에 제목으로 선택되었다. 또 감독 리펜슈탈의 일대기가 일개인의 의지의 연대기라는 점에 크게 감화되어서란다. 따라서 전후 설명 없이 우리가 마주한 어린 무용수의 단체 초상사진은 주제를 추정하기가 매우 힘겹다. 「의지의 승리」라는 직설적인 제목 역시 이미 길 잃은 해독에는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무용수들이 취한 경직된 포즈와 '의지의 승리'가 무슨 연관이람? 이 같은 난독이 또 다른 오해와 연결 되리라. 올 연초 제작된 「The Korean dance girls」(2006)는 「의지의 승리」의 밑그림 격이 된 습작이다. 앞에 거론된 두 작업보다 이 작업은 제목과 작품 사이의 연관은 비교적 선명하다. 글자 그대로 한국 태생 청소년 무용수의 상반신 프로필을 턱도 없이 많이 촬영한 결과로, 이름과 내용 간의 정확한 일치가 역설적으로 관객의 호기심 유발을 이끄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가 상반신으로 가득 찬 프레임 속에 안쓰럽게 붙들린 탓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The Korean dance girls」가 반복하는 소녀 무용수의 상반신을 지켜보노라면, 전작인 「Lost in desire」와 「의지의 승리」의 연결 고리 같은 생각이 든다. 과도한 화장으로 범벅이 된 어린 소녀들의 안면은, 「Lost in desire」의 깊은 상처만큼 부자연스럽고, 그로테스크하며, 또한 대상을 익명화시킨다. 근거리 촬영치고는 전통 의상으로 치장한 어린 무용수들의 얼굴은 짙은 화장으로 인해, 고만고만한 '어떤' 무용수로 기억될 뿐이다. 마치 「Lost in desire」의 '얼굴 없는' 반나체의 여성들이 개성이 자상이라는 단일성으로 대체되듯 말이다. 색조 화장의 인위적 연출력은 어린 소녀들을 흡사 어정쩡하게 성장한 어른처럼 보이게 만들어, 그 인상은 매우 기괴하다. 마치 「Lost in desire」의 등짝마다 드리워진 기괴한 상처처럼. 「The Korean dance girls」에서 반복 제시되는 소녀 무용수는 짙은 화장을 통해 성인과 청소년 사이를 불완전하게 오간다. 마찬가지로 「Lost in desire」의 반나체의 여성은 고전적 구도와 육감적 인체를 결합시켰지만, 결정적으로 인위적 상처가 더해지면서 불완전한 마감으로 정리되었다.
「The Korean dance girls」에 등장한 개별 무용수들이 스테이지에 한데 모여 「의지의 승리」라는 이름으로 완결된다. 「의지의 승리」는 전작만큼 미완의 느낌이 들지는 않지만, 125*200의 거대한 화면 가득 들어찬 무용수의 연출된 스틸 샷은 여전히 허전한 감이 남는다. 더군다나 전작 「Lost in desire」와의 연계성을 애써 찾으려 들 경우 길을 헤맬 가능성은 더 높다. 「의지의 승리」에서 '의지'의 주체는 중의적이다. 완벽을 향한 수련으로 결국 찬란한 무대 위에 올라선 어린 무용수의 설익은 의지일수도 있지만, 십수명의 한복 차림 무용수를 장기판 위에 말을 놓듯 지휘 통제하는 연출자(혹은 촬영자)의 의지일수도 있겠다. 본디 곽윤주는 제3자를 제어하는 일에 친숙한 성품을 지니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뷰파인더를 확보한 그녀는 자신의 앞에 도열한 무용수들이 큰 화면을 채우는 구성 요소로 순간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미뤄볼 때 「의지의 승리」라는 제목과 그것의 원작인 1935년 기록영화 「의지의 승리」는 가까스로 교차점을 공유한다. 전운이 감돌던 당시 유럽에서 특정 정치집단과 정치지도자의 의지를 관철시킨 이 영화는 오와 열을 무섭게 통일시킨 사열 장면을 반복 등장시킨다. 비이성적 국가주의의 최면으로 개체이길 포기하고 군중으로 수렴하는 인류의 모습을 담는다. 따라서 사열 스펙터클은 조형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인도주의적으로는 불완전하다. 아니 그보다 그로테스크하다. 마찬가지로 곽윤주의 「의지의 승리」가 재현하는 십여 무용수는 팔의 각도와 시선 처리를 통일시키면서 단체사진 고유의 경직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의 이 같은 동형성에도 불구하고 리펜슈탈이 그려내려 했던 파시스트적 의지는 무용수를 일시적으로 통솔한 촬영자 곽윤주의 의지와 유사하지 않다. 이 역시 그녀가 오해받기 쉬운 부분이리라. 털어놓기 쉽지 않은 사연이 있다. 곽윤주는 6살 때 청력을 상실했고, 그로부터 12년이 지나 수술을 통해 청력을 '부분적으로' 되찾은 병력이 있다. 현재 그녀의 청력은 완벽과 미완 중간에 있다. 「Lost in desire」에서 특수 분장으로 육감적 매력과 기괴한 거부감의 사이에 놓인 반나체 여성 모델, 「The Korean dance girls」에서 어색한 화장으로 어른과 소녀 사이에 놓인 무용수, 「의지의 승리」에서 완벽한 조화를 위해 스테이지에 올랐으나,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게 연출된 무용수의 어색함은 작가의 심성 상태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 세 연작에 출연하는 모델은 곽윤주가 연민을 투사하는 대상이며 또한 자기 자신이다. 특수 분장, 과도한 화장, 절도 있는 오와 열. 이처럼 각기 다른 매개체를 통해 작가는 대상들에게 자기 연민을 투영한다. 이들 매개체 간의 비 유기성 때문에, 그녀의 근작은 자칫 '무용 기록 사진'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이 같은 오해의 굴레에 그녀가 놓이는 까닭은 완성과 불완성의 중간지대에서 자기 입장을 몰입하듯 풀어대는 작업 이력과 관계하리라. ■ 반이정
Vol.20061108f | 곽윤주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