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30820b | 이승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06_1108_수요일_05:00pm
갤러리 토포하우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82.(0)2.722.9883 www.topohaus.com
소통의 사회학과 타자성(他者性) ● 언어는 약속이다. 더 엄밀하게 말해 언어는 소통(communication)을 전제로 한 약속의 약속이다. 언어와 기호 같은 약호체계들은 자아와 타자, 타자들 사이의 소통을 가능케 하며 그러한 약호체계가 없다면 세계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약호체계는 미결정의 언어를 순치시켜 제도화하는 기제이며, 우리가 그것들을 받아들여 익히지 못한다면 세계 속에 진입하지 못하며 타자와 교섭할 수 없다. 예술작품은 그러한 약호체계의 놀이를 구현하며 실행하는 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일상의 대화뿐만 아니라 젖먹이의 웅얼거림, 취객의 게걸스런 농지거리, 주막 아낙의 노골적 육담, 촌로의 걸쭉한 욕설, 입심 좋은 학자의 개똥철학, 사기꾼의 침 발린 요설 조차, 혹 그 이면에 어떤 오해와 불협화음이 있든 그것은 언어이며 소통의 한 방편임이 틀림없다. ●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있듯이 언어는 세계에서 가장 적절한 소통방식일까? 평온한 듯 지속되는 언어의 소통에는 전혀 균열이 없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이승진의 작품은 묵시적이지만 다소 역설적인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언어의 기능 중에는 소통만이 아니라 소통의 단절도 있음을 상기 시키는 것이 이승진 작품의 일관된 의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의 외연뿐만 아니라 언어의 그림자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독백이나 동문서답, 소통의 단절도 소통의 한형태다 (하긴 우선 음식물을 섭취해야 소화가 되든 소화불량이든 장에 탈이라도 날게 아닌가). 실제로 언어는 소통의 완성도와 편리성을 위하여 진화하지만 더불어 단절 또한 역진화를 거듭한다. 이렇듯 의사소통은 다분히 양면성을 지닌다. ● 이렇듯 짓눌린 소통의 염원은 소통의 퇴행을 경험하게 한다. 역설적으로 소통은 소통의 단절을 염두에 둔 행위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들이 이승진 작품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아니다. 문제는 소통의 형식이 아니라 소통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다. 소통은, 오작동을 차치하고라도,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를 사유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소통의 완전성과 그 완전성을 담보하는 순수성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소통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으로 말의 힘은진실로부터 비롯되고, 거짓을 낱낱이 파헤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현실적으로 진실을담기에는 심히 역부족이다. 결정적인 것은 말에는 도대체 100퍼센트의 진실이나 진정한 리얼리티는 없다는 점이다. 한 사건이나 대상의 이야기 주변을 배회하는 일종의 '시적 진실'(poetic truth)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허구라는 차원에서 언어가 제일 먼저 예술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요컨대 화자의 입을 떠난 말은 스스로 성장하고 변신하고 소멸되면서, 과장되고 확대된 파생 리얼리티, 혹은 아이러니를 구축하기도 하면서 결국 타자에 의해 재정의되고 수용되는 상대적 가치이다. 그렇다면 소통의 진정성은 나와 타자가 행위나 대상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공유할 때 나타날수도 있다. 하지만 인식을 공유할 때조차 말하는 주체와 듣는 객체가 분리될 수 밖에 없는 세계에서 소통의 유토피아는 애초에 덧없는 갈망이다. 두 개의 정체성은 전혀 다른 입장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 근본적인 애매함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승진의 작업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늘 소통의 변증법을 면밀히 관통하고 있다. 그 변증법은 소통의 가능성과 단절,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로부터 연유하는 소통의 미학적인 길항작용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분리와 차이를 통한 종합적 인식이 아니라 소통과 경험의 확장을 통해 실재와 부재를 하나로 묶어 고려하는 또 다른 종합적 인식이다. 이번 전시에서 마찬가지로 이승진작업이 감상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지점도 바로 거기이다. 우선 그의 작품에서 예외 없이 나타나는 말풍선에 주목해 보자. 여기에 흥미로운 점 두 가지를 요약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이 말풍선이 텅 비어 있다는 점이다. 이 텅 빈 여백은관객에게 열려 있는 장으로서 참여의 미끼로 작용하지만, 부동의 평면을 고집함으로써 예술개념의 존재형식에 있어 수동적 '응시'의 관조적 대상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해 이승진의 작품은 소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나 인터페이스(interface) 측면의 능동적인 상호작용 차원(interactive dimension)에 적극성을 띠고 있지는 않다. 물론 작품과 관객 사이의 상호개입의 연결고리가 '말풍선'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른바 대화가능성이라는 페이소스는 소통의 새로운 출발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때로 침묵이 소통으로서 언어보다 유효하며, 소통은 발화가 아니라 수용의 문제일 수도 있다. 즉 이 텅 빈 말풍선은 존재로서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사유와 언어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침묵이며, 그 독해 불가능한 미결정의 존재를 가지고 소통을 증명함으로써 기존의 체계를 벗어난, 예컨대 기존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소통의 방법론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여전히 그의 작품이 미적 지각의 패러다임에서 '결정론적 형식구조'와 '진행형 형질변화의 경험' 사이의 모호한 경계, 상호 영향력을 주고 받는 접점에 위치한다는 해석도 유효하다. ● 또 다른 하나는 그 말풍선들이 연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어떤 것들은 화면의 중첩된 사각 구조 속으로 스며들거나 점점 파열되어 간다는 점이다. 이는 수동적 응시를 넘어 능동적으로 자신의 언어를 담고자 하는 관객을 의혹과 불안에 빠지게 한다. 바꿔 말해서 관객의 의혹과 불안은 말풍선이 단순히 화면과 언어의 매개체이거나 언어를 담는 그릇이라는 객체가 아니라, 관객의 언어를 호명해냄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즉 주체와 객체가 전도되는 양상을 보여주는데 기인한다. 호명한다는 것, 그것은 언어가 말풍선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풍선이 언어를 규정하는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말풍선은 언어라는 감성적 질료의 게토(ghetto)가 아니라 관객들의 심리적인 게토인 것이다. 결국 말은 소통의 입구가 될 수 있을지언정 소통의 출구가 될 수 없음을현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승진의 작업은 문자와 이미지와 같은 매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매체학(mediologie)의 논점과도 많이 닮아 있다. 이 학문을 정초한 레지스 드브레(Regis Debray)의 견해는 사상의 내용보다 그것의 전파, 전수과정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심지어 사상 자체보다는 그것의 전달방식이 사상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잠시 막무가내로 빌리자면 커뮤니케이션은 언어나 말의 내용보다는 어떤 물질적 그릇에 담겨, 어떤 제도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이승진의 작품에서 말풍선이 소위 완결된 채 '주어진 것'이든 상호작용 차원의 '열린 것'으로 이해된다 해도 소통의 바라보기, 즉 소통의 용기라는 자신의 역할에는 아무런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상(언어)을 담는 그릇을 깨지는 말지어다. 이승진은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작업을 확장해나간다. 이번 전시에서 벽에 부착되지 않고 공간에 설치된, 말풍선이 전사된 투명 아크릴은 작품과 관객을 넘어 관객들 간의 쌍방향 소통을 염두에 둔 작품이다. 하지만 이 또한 방법론-인터페이스의 측면에서 그리 과격하지 않다. 차라리 조심스럽고 은밀하다.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번 전시에서 역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말풍선의 화자, 주체 혹은 캐릭터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데 있다. 그것들은 중첩된 컬러의 장막 뒤로 자신의 형상을 은폐하고 있다. 주체와 객체가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말풍선은 별 수 없이 주체/객체의 기이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관객 또한 주체/객체와 대면하여야 한다. 어쩌면 소통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주체/객체의 경험에서 얻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승진이 추구하는 진정한 소통의 범주는 어디까지 인가. ● 아마도 이승진의 작업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뤄 짐작할 수도 있겠다. 그의 작업은 디지털로 이루어지지만 캔버스 천 위에 전사를 한다든지, 미디움을 그 위에 덧칠하는 방식으로 아날로그와 화해를 시도 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미학적 사유의 공감대가 언제든 열려 있다. 사실 디지털이란 것도 '새로운 방식으로 예술을 만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는 도구'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는 이렇듯 여러 가지 층위에서 소통을 고려한다. 작품과 관객, 형식과 해체, 아날로그와 디지털, 자연과 도시, 순수예술과 디자인 등의 이분법을 파기하고, 이 상대적 가치들 간의 소통이라는 지층을 넘어 교감을 꿈꾼다. 여기서 교감은 소통과 단절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승진은 우리로 하여금 말풍선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소통/단절의 비밀로 접근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 유근오
Vol.20061108d | 이승진展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