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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01_수요일_06:00pm
갤러리 아트 앤 드림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6-9번지 Tel. 02_543_3162 www.artndream.co.kr
상상의 산들 ● 세상에는 내가 갖지 않았지만 값없이 보여주는 놀랍고 황홀한 보석이 많다. 그러나 일상인의 밋밋한 삶의 눈으로는 철따라 뒤바뀌는 세상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놀라움이고 화려함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 여행이다. 번번이 약속은 깨져 버렸지만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그곳에 가고 싶어 했다. 그 낙원으로 여행을 꿈꾸는 자는 늘 전흥수였다. 그러나 게으른 나는 언제나 일상인으로 서울에 남고 그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땅으로 길을 떠났다. 다시 귀향할 때쯤이면 사진가의 디지털 카메라 메모리는 세상을 주유(周遊)한 이미지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어느 한 곳에 정주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보헤미안 사진가가 나를 작업실로 끌어들인 것을 보아 또 어딘가 떠돌다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보여준 모니터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으로 가득했다. 나도 젊어서부터 웬만큼 이 땅의 산을 쏘다녔는데 그의 산은 지도에도 없는 그런 산이었다. 그 산들이 지리산, 덕유산, 설악산 같은 한국의 대표적 산이라는 것을 그의 작업 노트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 그 산들은 사진가 전흥수가 꿈꾸는 인공의 산이고 상상력의 산이다. 하긴 그가 지금까지 선보인 사진들은 촬영시의 세상을 그대로 보여준 적이 한번도 없었다.
꽃, 누드, 도시 같은, 찍혀진 것을 온전히 보여주기보다 이미지를 비틀고 색을 입히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이것은 확실히 반사진적인 금기사항이고 분명히 사진으로부터의 일탈이다. 그러나 이 놀라운 불온한 깃발은, 처음 자신의 작품을 보여줄 때부터 지금까지, 주변의 의혹어린 눈길을 견디어내며 힘차게 펄럭였다. 그때마다 깃발에 실려 오는 소리는"당신은 사진을 예술로 받아드리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가 내게 해줄 답변을 나름대로 정리한다. "사진이 예술이라면, 예술은 전적으로 작가의 주관이 지배하는 세상이다."라고. 그는 보이는 실체의 집착보다 자신의 상상력에 근거한 순수한 조형세계를 더듬는다. ● 아니다. 예술이 자신만의 인공낙원을 만들어가는 세계임을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재현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사진도 그러하다. 과소노출이나 과다노출, 깊은 심도와 낮은 심도 역시 세상을 폭넓게 껴안고 싶은 사진가가 꿈을 꾸는 수단인 것이다. 고운 입자와 거친 입자의 선택적 사용도 그렇고 셔터속도의 조절도 마찬가지이다. 촬영, 현상 그리고 인화의 과정에서 사진가의 개입은 되풀이된다. 그것들이 사진가의 정신 속에서 아름답게 태어난다는 점에서 관념적이다. 다만 초월적 세계로 적극적으로 밀고 올라가지 않은 점에서 현실의 울타리에 남겨져있다. 전흥수의'산 사진'도 현실에 근거하지만 현실로부터 보다 멀리 떠나있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다. '산(현실)'에 대한 작가의 개입 정도가 작가가 세상을 보는 관점의 근거가 된다.
산은 만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사진가는 말한다. 산을 자주 오르는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산은 자기의 얼굴 변화만큼 많은 예술을 산 안에 거느리길 원할 것이다. 전흥수는 디지털 산을 가지고 산으로 들어간다. 종래의 아날로그 산과 대척점에 서있는 작가 개인의 산이다. 이 낯선, 그러나 아름다운 산의 이미지를 가지고 창조주의 산과 맞짱뜨고 싶은 속내를 드러낸다. 원근감이 없어진 디지털 산은 몇 줄의 곡선으로 산임을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사진은 마크 로드코(Mark Rothko)나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강열한 색면(color field)으로 물든 것 같은 느낌을 볼 수 있는 극적인 색체를 사용하기도 한다. 사실로서의 산이 아니라 표현적인 산으로 변모된 것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난 화가 중 유영국의「산」시리즈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러나 전흥수의 경우 사진을 모태로 만든 디지털 산은 비록 그 구성이 평면성과 인공적인 색을 위주로 한 자유로운 형태를 내세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가 쓰는 면의 배분이나 선의 사용은 작가가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의 혜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래서 유영국의 산처럼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이 이 사진에 들어 올 틈이 없다. 비대칭적이고 우연적인 선들이 만났다 헤어지면서 원근감을 생략하고 디테일을 지움으로 단순한 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즈음에서 사진가는 화가와 자연스럽게 헤어진다. 사진가의 상상력은 산이라는 자연물과 디지털을 결합시킴으로써 초현실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유동적인 자연의 리듬을 때로는 과장하고 생략함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사진이라는 울타리에 갇혀있는 작가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 사진을 원본삼아 새로운 이미지를 얻어내는 응용사진가 일지도 모른다. 그 명칭이 무엇이면 어떠랴! 칸막이가 뭐 그리 중요하랴! 나는 그가 90년대가 낳은 아주 중요한 사진가 중의 하나임을 믿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가 2000년대에 닥칠 디지털 이미지의 확산을 가장 먼저 예민한 촉수로 더듬었고 그것을 작품으로 말하기를 시도해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중 안간힘을 쓰며 익힌 모든 칼라암실기법을 디지털화 하는 시도를 수년전부터 준비해왔다. 지난여름 작업실에 마지막 남은 칼라 확대기를 폐기한 자리에는 하나 둘씩 디지털 장비가 늘어가고 있다. ■ 최건수
Vol.20061107a | 전흥수展 / CHUNHEUNGSOO / 田興秀 / photography.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