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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27_금요일_06: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www.noamgallery.com
행복한 자의 아름다운 축제 ● 박민준 작가를 보면, 짧은 소견이지만, 니체가 페르시아 예언자의 입을 빌어 "고독한 자여, 너는 창조자의 길을 가고 있다"라고 읊은 문구가 생각난다. 그는 재미있는 얘기도 잘하고, 잘 챙겨주고, 자주 실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예술'같은 얘기만 하면, 진지해지고 담배도 많이 피워댄다. 예전부터 그의 그림을 보면 다소 어둡긴 해도 참으로 좋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리고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서 "그림 그리는 것은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사실 어떤 장르보다 그림이 어려운 일일지 모를 거라는 생각은 했어도 그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르네상스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그 시대에 유행한 모티브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 당혹스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르네상스시대에는 육체적인 노동을 감수하는 것을 '예술적'이라는 말에 첨부시켰고, 예술을 감상하는 것을 작가가 이토록 어렵게 극복한 것을 감상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노고를 예술의 고귀한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위대한 화가의 기술을 '두려움'에 비유할 정도인데다, 예술가를 "영원히 고통 받는 자"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여하튼 박민준의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 현대미술은 다양해졌다. 그냥 다양해진 것이 아니라, 기존에 봤던 것과 닮아 있으면 안 된다고 요구하기 때문에 다양해졌다. 사실 예술이 창조와 자유를 실천할 수 있는 꽤 적합한 장르기에 '요구'라는 표현이 다소 무리는 있지만, 개념을 찾고 논리를 필요로 하는 것을 목격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예술은 더욱 그러하리라는 것은 옳은 생각이다. 그렇다고 르네상스 화풍이 르-르네상스니까 다양성의 맥락에서 보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으로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외부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자연스레 형식으로 드러날 때 그것이 다양성의 의미를 바람직하게 실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 박민준 작가는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죽음에 대해서 그림을 그린다. 이러한 점은 카라밧지오를 많이 닮아있다. 사실 그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의 예술 의지를 확인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죽음을 그리는 이유는 사뭇 다르다. 살펴보면, 첫 번째 개인전 제목인 『작아짐의 평안함』에서 추측해 보건데, 앞서 말했던 '두려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두 번째 개인전인 『死者의 노래』는 말 그대로 죽음 자체를 다뤘다. 이번 세 번째 전시의 주제는 '행복'이다. 이전 개인전이 현재 자신의 모습이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라면, 이번 전시는 그러한 태도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좀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존재론적인 삶'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고백하고 있다. 삶의 궁극은 '죽음'이기도 하지만 '행복'이기도 하다. 그래서 완성한 자만이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거나, 죽음을 '아름다운 축제'라고 하지 않는가. 단, 이러한 환희에 찬 숭배는 이 세계, 이 삶에 대한 것이지, 저 세계나 저 세계의 삶에 대한 것은 아니다. 죽음은 삶의 다른 표현이자 삶을 가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 신화가 있고, 알레고리가 있고, 르네상스가 있게 된다. ● 이제 알게 되겠지만 그는 르네상스 회화를 답습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예술에 대한 광적인 열정이 그의 그림을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구식을 답습한답시고 "죽음을 삼키는 것"이라 한다면, 그는 '트리스탄'이 그랬듯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예술을 사랑하는 나의 아픔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내 생명이라고 말하겠소.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세상에서 내리는 벌을 가리킨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겠소.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지옥의 영원한 저주를 가리킨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겠소." 내일도 그는 스스로의 몸으로 자신의 고통을 먹여 살리듯 자신의 독백을 되뇌면서, 완성한 자의 아름다운 축제를 꿈꾼다. ● "작디작고 가냘픈 날개 짓이라도 온전한 날개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바치더라도 아깝지 않으리라." ■ 박순영
Morssola - 타나토스와의 결혼 ● 이 그림은 죽음과 삶에 대한 알레고리를 타나토스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우선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 타나토스는 죽은자의 영혼을 하데스의 세계로 데려가는 죽음의 신으로서 화폭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이상을 상징하는 백마를 탄 인물로 등장한다. 백마의 뒤편에서 화면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인물은 신화에서 그와 항상 같이 다니는 잠의 신 히프노스로서 죽음을 상징하는 부러진 신전 기둥과 함께 타나토스를 암시하게 해주는 모티브중의 하나이다. 그가 히프노스인 것은 그의 졸린 눈과 발 언저리에 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 그리고 대리석 기둥에 있는 해골에 손을 올리고 있는 동작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화면의 구성을 보면, 큐피드와 해골이 조각된 대리석 기둥을 중심으로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로 나누어지고, 화면의 앞쪽으로 백마를 안내하는 곱추가 있다. 화면의 오른편인 삶의 세계에서 신부와 주례를 맡은 성직자가 타나토스를 맞이하기 위해 서 있는데, 성직자는 지금의 결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관심이 없는 듯 성경책만 보고 있고, 신부 역시 시선을 타나토스의 반대편으로 돌리면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눌한 표정을 짓는 개는 맹목적인 충성에 대한 상징으로서 성직자의 모습을 대변한다. 곱추는 이러한 양분된 세계를 매개하는 자로서 죽음을 기억하지만 완성된 삶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결핍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곱추의 팔이 셋이라는 점이다. 하나는 타나토스를 가리키면서 여자에게 이상이자 죽음을 제시하고, 하나는 현실의 팔로서 우리를 향해 있고, 하나는 십자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데, 사실 십자가를 든 팔은 현실에는 없는 잠재된 팔로서 이상을 향한 믿음을 상징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 그림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데, 말하자면 죽음은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된 삶이자 이상의 실현으로서 '화려한 축제'와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곱추로 등장시켜서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도록 하는 예술가의 임무를 넌지시 말하고 있다. 또한 작가가 예술작품의 모티브로 「벨베데레 토르소」상을 등장시키고 그 하단에 "영혼은 지상에서는 낯선 나그네이다"라는 문구를 적어 놓았는데, 언뜻 보면 천상의 영혼을 상정한 플라톤적인 사유를 담은 듯하다. 그러나 낯설다(fremd)의 고대 독일어인 fram이 '장래를 위해 간직하여야 할 곳을 향하여'라는 뜻을 가졌다는 점에 비춰볼 때, 영혼의 본질은 지상, 즉 대지를 향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의 본질이 그렇듯 예술품에 영혼을 불어 넣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Vol.20061027a | 박민준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