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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26_목요일_05:00pm
혜원 갤러리 인천시 남구 주안4동 453-18번지 혜원빌딩 Tel. 032_422_8863 www.topohaus.com
혼돈의 숲에 서있는 미망의 초상들 ● 존재의 이면(裏面) 차경진. 그가 다시, 10년 만에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가 들고 온 것은 실존의 그림자, 실체가 사라지고 그 실체를 대체하는 기이한 가면들이다. 그는 가면 속에서 실존의 자각들을 독백하듯이 새겨왔다. 그러나 그것은 밀림의 수풀 속에 갇힌 듯이 불안하고 일그러진 미망(迷妄)의 형상들이다. 낯선 이방인이 원시문명과 맞닥뜨렸을 때, 가질 수 있는 가장 급작스런 모습으로 우리의 시각을 전율시킨다. 그것은 또한, 알 수없는 정체성에 대한 불안과 대화를 회피케 하는 심리적 갈등을 정지시키지 않는다. 관객들은 가면과의 대면, 그 녹아 흐르는 시간의 표류 속에서 일순간 숨을 멈추고 상처투성이의 영혼과 만나야만 한다. 상처입은 영혼들....녹아내리고, 일그러진 가면들이 우리의 사유를 대리발언하며 끝없이 우리를 향해 다가서려 한다. 차경진이 만든 음습한 형상의가면들이 예술의 배면(背面)을 배회하며,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우리에게 '너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 가면의 기원은 원시문화에 있어서 페스티벌(festival)과 깊은 관련이 있다. 페스티벌은 인간이 자연의 절대적인 존재로 믿었던 신에 바치는 하나의 의식(儀式, ritual)이었다. 그러한 페스티벌 속에서 가면은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상(表象)이었던 것이다. 장엄한 의식의 제사장 혹은 그 의식의 참여자들은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현실 너머의 어떤 접신(接神)을 꿈꾸게 된다. 그 향연 속에서 피는 생명의 신실한 제물이 되고, 춤과 음악은 영혼의 깊은 잠을 깨우고 시간의 축적된 껍질들을 벗긴다. 가면은 그러한 페스티벌을 극화(劇化)시키는 하나의 장치였으며, 실존을 넘어서려는 초월적인 의지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가면을 지칭하는 '페르소나(persona)'는 그리스어에서 연유된 말로, '외적 인격' 혹은 '가면을 쓴 자아의 또 다른 이미지'를 의미한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사람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림자와 같은 페르소나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 내지는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융은 자아(ego)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 내가 차경진의 작품을 처음 대면하면서 가졌던 의문은 그가 왜 가면에 집착하였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때, 그는 자신이 가면에 천착한 배경에 성장기의 교통사고로 인한 참혹했던 체험이 자리잡고 있음을 스스럼없이 들려주었다. 불의의 사고는 한 사람을 예기치 않은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잠 못들게 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자문들을 밤하늘에 새겨나가게 되는 것이리라.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인 군산으로 내려가 방앗간을 작업실로 개조하여 은거의 창작생활에 들어간 것은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는 여기서 신들과 대화하며 문명의 뒤안길에 나뒹굴고 있는 인간의 표정들을 조각했다. 그 처연하고, 초점없는 허망한 인간의 표정들은 머리만 남아있는 목이 긴 두상으로 다듬어져 나무 위에 혹은 땅 위에 솟아있었다. 그의 조각정신은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예술계로부터 한 발짝 물러선 상태로 소금기가 진한 군산의 앞바다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인간 군상들은 어쩌면 자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 땅과 집단 속의 배척과 소외, 갈망과 연정(戀情) 등에 관한 자전적 독백을 전달하는 침묵의 소리,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이러한 군상들을 부둥켜안고 1996년 서울 공평아트센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 당시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인간의 두상들이 폐쇄적 양감의 덩어리였다면, 그는 첫 개인전 이후 점차 존재의 이면(裏面), 실존의 배면을 판재(板材)의 결을 따라 탐색해 나가게 된다. 그가 집착했던 '문명의 발굴'을 마치고 서울로 상경한 것은 어쩌면 자신에게 배정된 삶의 궤도로의 온전한 이전을 의미한다. 그것은 음악이 세상의 소음과 화음을 구별케 하듯이, 그가 신의 세계에서 내려와 덧없는 욕망이 넘실대는 사바(娑婆)의 땅에서 자신의 조각적 의미들을 파종(播種)키로 결심한 것은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인천에 정착한 그는 새로운 원시문명의 향기를 조형적 표현으로 가시화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인천 역시 그가 자란 군산처럼 바닷바람의 짠 소금기가 돌기는 마찬가지였다.
거울 속의 실체 ● 차경진의 작업실에 걸려있는 가면들 속에서 나는 욕망이 사라지고 남긴, 거친 숨결들의 응결된 자국들을 엿보았다. 그것은 가면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가면이 되고자 하는, 그래서 이제는 영욕(榮辱)의 굴레를 대변하는 어떤 역사가 두고 간 시간의 외투를 연상시킨다. 저 먼 원시의 계곡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유물의 피부처럼 낡고, 퇴락한 빛깔들....그것은 자아와 타자의 구분을 무화(無化)시키고, 스스로가 객체화되어 버린 거울 속의 실체, 바로 그것이다. ● "작품은 작가의 페르소나이다. 원형은 작가의 페르소나로 스스로를 현시한다. 작품 속의 원형적 이미지를 통하여 나는 우리의 무의식의 영역에 도사린 우리의 근원을 바라본다. 우리의 억눌린 두려움, 공포, 불안, 고통, 슬픔을 본다."(차경진) ● 차경진의 작가노트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의 이번 조각작품들은 자아의 그림자이면서 또한 가면의 형태를 빌은 실존의 껍질들이다. 아프리카, 중동지방, 인디언 문화의 한 단층을 연상시키는 그의 가면들은 그러한 형태의 유사한 미메시스(mimesis)들이지만, 그러나 그의 조각적 용접방식에 의해 상당히 왜곡되고 변형된 형태로 귀결되고 있다. 그가 필연적으로 정면성(正面性)이 부각되는 가면의 속성을 중심축에 두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조형적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음은 바로 이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이번 개인전의 역작으로 들 수 있는「실존의 그림자 1」에서 수평선으로 처리된 선의 수없는 교직들은 일종의 억압과 굴레에 종속된 어떤 상황을 환기시킨다. 밑면의 거미줄 형태 위로 서있는 거대한 가면의 형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절박함 속에 놓여있다. 여기서 거미줄이 하나의 실존적 정황이라면, 그의 가면은 그 상황 속에 놓여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 소외,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한 두려움의 대리적 표상이다. 그가 인간의 형상이 아닌 가면을 하나의 기표로 설정하여 조각적 개념을 발현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다층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실체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원형의 그림자로서 가면을 표현의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일종의 오브제성(object-hood)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 혹은 객체를 주체화시키려는 것으로, 사물의 의인화 내지는 중의적(重意的) 메타포(metaphor)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음습하고 괴기스런 상황은 『 실존의 그림자 2』에서 더욱 극적인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마치 거미를 연상시키는 복잡다단한 구조 속에 놓여진 가면의 형상은 절망과 공포, 괴기스러움(grotesque)을 동시에 발산하고 있다. 기어서 다가올 듯한 섬짓함과 그로테스크함이 충일된 이 작품은 실체의 미메시스지만, 가면의 형태는 조명에 의해 또다시 다른 실체의 미메시스를 반영한다. 의미론적으로 이 세 겹의 미메시스 그림자들은 복제의 생성과 실체없는 실체로서 우리의 시각체험을 다른 영토 속으로 미끄러지게 한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음을 예정하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증거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심리적 불안을 던져주고, 가면은 그것의 원형적 존재가 있었음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사유의 회귀(回歸)를 유발한다. 차경진은 가면이라는 사물적인 존재, 거미라는 인간과의 공존적 생명체를 파편적으로 차용하면서 공포의 정서, 그 미망(迷妄)의 불안을 외화(外化)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그로테스크 미학은 여섯 개의 대형 가면을 용접하여 세우고 전쟁의 잔해처럼 가면들을 바닥에 자유롭게 배치한 『 존재의 집』에서 더욱 정점을 치닫고 있다. 가면과 가면이 서로 엉키고, 선과 면으로 응결된 용접의 흔적들 속에서 그의 조각적 특징인 즉흥성과 괴기성은 한층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다. 무덤 속에서 발굴된 유해를 연상시키는 그의 이번 조각작품들에서는 비일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정서가 마치 연금술사의 주문처럼 피어오른다.
욕망의 너머 ● 차경진이 이번에 발표하는 가면 연작들은 그것이 개별적이던, 집합적이던 간에 그로테스크 미학과 프리미티브(primitive)한 조형성이 이끼처럼 돋아있다. 그러면서도 그가 천착하고 있는 가면들은 페르소나, 즉 사회 속에서 자신을 감추고 또 다른 인격을 발현하려는 인간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기표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의 절대적인 성전에 기대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괴기스러움과 추함, 역설의 상대적인 해안에 당도해 있다. 그 해안을 향해 불어오는 음습함과 공포의 바람은 매우 푸른 날이 서있고, 밀림 속의 표류처럼 위태롭다. 이 실존의 땅에서 그가 용접하고 덧붙여가는 가면들의 표정들은 바로 우리들의 욕망, 그 허무(虛無)의 뿌리일지도 모른다. 차경진의 조각 작품들은 이런 맥락에서 다분히 염세주의(pessimism)적인 향기를 강하게 발산한다. 그러나 실존이 관념을 대치하고 관념이 실존을 보완하듯이, 그의 이번 조각 작품들에서 엿보이는 가면들은 혼돈 너머에 존재하는 생명의 숲을 향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그러한 구체적인 사례를 나는 『공존의 틀』에서 여실히 목격하게 된다. 허무의 뿌리 속에서 공포로 전율하는 그의 실존적 자각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너머(beyond)의 희망'에 그가 더 다가가고 있음을 예감하게 되는 역설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작가의 가면'이라는 그의 생각은 다시금 황금깃털처럼 내 공감의 가지 위에서 분분히 날아오른다. 나의 비평적 시선 속에는 차경진의 『 바람의 넋』이 세상에 존재하는 욕망의 그림자들을 진혼(鎭魂)하는 밤의 달빛이 되고, 그의 가면 연작들이 혼돈의 세상에서 우리의 실존을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로 정지되어 있다. 조각에 대한 열정, 우리의 문명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치열한 눈빛이 그것을 끝없이 실증(實證)해 줄 것이다. ■ 장동광
Vol.20061023c | 차경진 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