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6_1025_수요일_05:00pm
갤러리 타블로 서울 종로구 관훈동 23번지 원빌딩 3층 Tel. 02_723_6081
이홍전, 사랑스러움의 달콤함 ● 이홍전씨는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흥겹다고 한다. 물론 본업이 화가니까 작업을 할때 기분이 고조되겠지만 그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미술을 하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깨달으니 정말 신이 난다는 뜻이었다. 독신한 크리스천인 이홍전씨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 안에서 거하는 것을 작품을 하면서 느낀다고 한다. 하나님과의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교감이 그를 더없이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 그림을 살펴보면, 그가 느끼는 감흥을 감지할 수 있다. 종래 화면의 색깔은 대체로 원색이 주조색을 이뤘다. 빨강과 노랑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근래에 와서는 펄의 황금빛이 화면을 노랗게 물들이는 형국이다. 이전보다 약간 가라앉아 있는 편이나 여전히 화려한 펄 색깔이 화면을 주름잡는다. 그 느낌을 형용한다면, 발랄하고 희망차고 낙관적이다. ● 한편으로 그의 화면은 흡사 덩실덩실 춤추는 것같다. 붓질이 자유로이 부유하고 어떤 리듬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이는 것같다. 화면에 채색 및 착색을 하기 위한 붓놀림이라기보다 스트로크의 운용묘미를 충분히 발휘하기 위한 날렵한 놀림을 볼 수 있는 터이다. 따라서 스트로크가 마치 숭어뜀을 뛰듯 가볍게 화면을 박차고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화면에는 잔잔한 동요가 그 흔적으로 물결치게 된다. 운필을 남기되 문인화에서 보듯 품격이나 풍류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고조된 마음상태를 형용하기 위해 남겨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가 표상하고 있는 것은 '기쁨에 충만한 마음상태'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 기쁨은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에 머물지 않고 또 머물 수도 없을 것이다. 그 기쁨은 언제나 더 멀리에, 더 높은 곳에, 닿을 수 없는 곳 너머에서 온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기쁨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꽃이나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산봉우리에 올랐을 때 느끼는 만족이 아니라, 시공간적인 제약을 받는 존재양식 속에서 인간영혼이 결코 완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 아무리 만끽해도 소진되지 않고 그럴수록 자꾸만 되살아나며 부풀려지는 기쁨이야말로 최고의, 최상의 기쁨이 아닐까. 그러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야말로 더없이 행복한 사람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 이홍전씨의 「내려놓음-풍경」은 종래에 바탕을 가득 메우던 방식에서 벗어나 화면을 비우는 시도로 나가고 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했는지 근작에서는 동양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공간의 의미를 강조한다. 최소한의 몸짓을 투여한 것을 빼고 나머지 화면은 비운 채로 남겨두었다. 그러면서도 과묵하거나 추상적인 사유에 빠지지 않고 실재의 생동감을 묘출한다. ● 작가에게 공간을 비우는 이유를 묻자 '마음을 비우고 대상을 포용했으면 하는 바람의 표시'라고 했다. 빈 공간은 채워진 공간보다 더 많은 것을 함축한다. 그렇다. 이 포용의 정신을 작가는 작품기조로 삼고 있는 것이다. 과연 대상을 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대상과 연합한다는 것이요 대상을 존중한다는 뜻이요 상대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혼자 주저리주저리 독백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면서 상대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고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며 호응하는 덕목을 이 빈 공간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한편 작업진행의 프로세스로 볼때 그의 작품은 대번에 이뤄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정추상 화가의 경우, 그때그때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해야 하므로 순간적인 붓놀림과 화면구성에 의존하는 경향을 띤다. 흔히 즉흥성과 자발성이 작품형성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이 즉흥성과 자발성의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단순한 자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신앙의 발로, 즉 하나님과의 교감의 결과로 그의 작품이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신앙의 정서는 쉽게 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곳을 순식간에 닿게 하는 속성이 있다. ● 흔히 이성의 기능은 진리를 인식하는 데 있지만 어떤 것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직접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마음의 감각'(조나단 에드워즈)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꿀맛을 본다고 했을 때 미각을 상실한 사람은 꿀맛을 자기 수준 이상으로 생각할 수 없지만 미각을 가진 사람은 꿀의 단맛을 알기 때문에 그 꿀을 무척 좋아한다. 꿀맛을 아는 사람이 그 꿀맛의 탁월함과 달콤함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나 느낌은 그 꿀을 사랑하는 기초가 되는데 그것은 미각을 갖지 못한 사람이 꿀맛에 대해 가지는 어떤 상념과 전혀 다른 것이다. ● 같은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작품속에 깃든 감각의 내용은 현저히 다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 탁월함과 달콤함을 경험한 자의 즐거움, 환희가 작품안에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말로써 그 영광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는 있어도 그 아름다움의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줄 수는 없다. 그것의 관할은 마음, 곧 신앙의 정서를 담당하는 영적 지각 영역에서 관할하며 작가는 자신의 마음상태를 그림으로써 우리에게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쁨을 실감나게 전달한다. ● 작가의 기쁨의 감흥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까지 조용히 그의 그림을 지켜보는 것은 어떨까? 이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세상을 벗어난 사람의 자유로움이 느껴지지 않은가. ■ 서성록
Vol.20061022b | 이홍전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