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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26_목요일_05:00pm
금호영아티스트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무중력의 공간과 큐브로 구조화된 삶의 풍경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그린 그림 아래쪽에다가 이렇게 썼다. 이것은 단순한 그림일 뿐 실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실제와의 닮은꼴은 우연한 일치에 지나지 않으며, 동일시에 길들여진 관성의 습성일 뿐이며, 이를 재확인시켜주는 재현의 간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마그리트는 다른 그림에다 이것은 파이프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일단 그림과 실제와의 불일치를 확인한 연후에, 그려진 이미지와 그것이 떠올려주는 의미와의 관계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 역시 동일성을 배반한다. 자크 데리다의 의미의 산종 이론에서처럼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를 불러들이고, 하나의 의미는 다른 의미를 일깨워주기 위한 최소한의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지들의 연쇄, 의미들의 연쇄와 더불어 어떤 이미지가 떠올려주는 궁극적이면서도 최종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의미는 끝내 찾아지지가 않는다. 결국 그림을 그리는 행위, 이미지를 생산하는 행위, 그리고 이를 매개로 해서 타자와의 소통을 꾀하는 행위는 인식론적 행위이다. 결정적인 인식을 재확인하는(시켜주는) 행위(자기동일성의 행위)가 아니라, 차이나는 의미들의 연쇄(비동일성의 연쇄)로써 결정적인 인식을 부풀리고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보는 행위 또한 그저 보기만 하는 수동적인 감각 행위가 아니다. 보이는 대상을 객체화하고 사물화하는 과정을 통해 그 대상을 지식의 안쪽으로 견인해 들이는 능동적인 인식 행위인 것이다. 이를 통해 주체는 대상의 의미를 부풀리고 왜곡시키고 변질시킨다. 따라서 하나의 의미란 결코 그 의미를 사용하는 주체의 욕망을 전달해주거나 실현시켜주지는 못한다. 의미란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과 전제와 문맥과 맥락으로부터 매순간 생성될 뿐, 결코 사전에서처럼 영속성을 부여받지는 못한다. 실상 사전은 죽은 의미들의 집, 마치 미라처럼 굳은 의미들의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들이 부풀려지고 왜곡되고 변질될 수 있는(차이나는 연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우연적이고 돌발적이고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부터 놓여나 있는, 결정론적 의미에 대한 강박관념의 집, 그 신화의 집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신화의 저편으로부터 마그리트는 이젤 위에 놓여진 하늘 그림에다가 큐브로 떠낸 하늘의 이미지를 포개고, 유리창이나 거울에 비친 하늘의 반영상을 중첩시킨다. 이미지들의 연쇄가 불러일으키는 차이나는 의미들의 놀이를 실현한 것이다.
정규리의 그림은 마치 마그리트의 그림에서처럼 모든 것들이 붕 떠있다. 전면균질회화를 연상시키는 플렛한 평면 위에 이미지를 오려 붙인 듯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미지들은 상호간의 연계성을 상실한 채 마치 섬처럼 서로로부터 고립돼 있으며, 일관성의 맥락으로부터도 동떨어져 있다. 추상화면을 연상시키는 무표정한 평면과 그 위에 얹혀진 사실적인 모티브가 서로 대비되면서, 화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모티브들은 손에 잡힐 듯한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현실감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으며, 화면과 일체를 이루지도 못한다. 그림 속 모티브들은 그것들이 서 있거나 놓여진 바탕도 없고, 게다가 실제를 암시하는 그림자마저도 없다. 모티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실제와의 감각적 닮은꼴을 제외한다면 그림 속에서는 어떠한 실재감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대개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감각적 현실이 사실은 무중력의 공간 속을 부유하는 그림 속 모티브들처럼 비현실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자체 한갓 꿈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러니까 현실감이란 그 자체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기보다는, 다만 인식행위의 소산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주지시킨다. ● 인도사람들에게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없다. 티베트의 라마승에게 현실에서의 삶은 다만 사후 세계를 준비하는 수행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승려들이 정성스레 그린 후 가차 없이 지워버리는 모래그림은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보게 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집인 무덤에서 산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한 집에서 동거하는 것이다. 나비와 주체가 일체가 되는 장자몽이나, 물(物)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험은 단순한 깨달음의 경지라기보다는, 그 자체 현실에 대한 인식 즉 현실감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실과 비현실은, 삶과 죽음은, 실제와 비실제는 서로 다르지도 동떨어져 있지도 않다. 모든 것은 꿈이고 환영일 수 있다. 이를 실재로 느끼는 것은 다만 이성의 간계, 인식행위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감이란 이처럼 다양하게 나타나며, 감각적 현실을 현실과 동일시하는 태도는 다만 그 다양한 양상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 정규리의 붕 떠있는 그림들은 이러한 감각적 현실에 연유한 현실감에의 신뢰를 의심하게 하는 한편, 주체의 인식행위가 그린 차이나는 이미지들의 연쇄를 통해 현실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엿보게 한다. 현실 혹은 현실감은 말하자면 저절로 주어진 지평과 이에 대한 단순한 수동적인 반응의 소산이기보다는, 주체의 인식작용을 통해 재구성되는 것이며, 나아가 주체의 인식작용으로부터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다. 결국 주체의 수만큼이나 많은 현실이 존재한다. 현실은 언제나 주체에 의해 인식된 현실, 해석된 현실의 형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관 즉 주체와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세계가 비롯된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이는 자연관, 우주관, 인생관, 예술관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사태는 주체의 관점에 따라서 이렇게도 보일 수 있고, 저렇게도 보일 수 있다. 나에게 현실로 보이는 것이 네게는 다만 환영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는 단순한 상대성의 논리가 아니라, 현실의 용량과 관련된 문제다. 즉 현실은 그 속에 감각적 현실과 함께 비현실마저 포함한 것이며, 주체의 수만큼이나 많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현실들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예술가적 주체의 인식행위 속에는 다양한 차원으로부터 호출된 상호간 이질적인 현실의 계기들이 중층화돼 있으며, 이는 그대로 작가의 그림을 설명하는 계기가 된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 모두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거대한 큐브가 그려져 있고, 이는 더 작은 큐브들로 구조화돼 있다. 큐브들은 다른 큐브들을 향해 열려져 있는가 하면, 그 자체로 닫혀져 있기도 하다. 큐브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공간의 안쪽처럼 보이는가 하면, 공간의 바깥쪽처럼도 보인다. 이렇게 큐브로 구조화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이 서성거리거나,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거나, 큐브 속을 날아오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정규리의 그림에서의 큐브는 그대로 세계의, 현실의 축소판으로 기능하는 셈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속해 있는 큐브가 현실인 줄 믿고 있다. 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 큐브를 조망해 보면, 큐브들이 서로 약간씩 어긋나 있거나, 마치 에셔의 그림에서처럼 현실에 대한 신뢰 즉 현실감이 그 의심스러운 실체를 드러낸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이를테면 동굴 속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실재로 알고 있는 플라톤의 동굴사람에 대한 다른 한 버전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여타의 일부 그림들에선 이런 큐브마저도 없다. 화면 전체를 공간적으로 구획하는 최소한의 경계선이 주어져 있지만, 이는 그 위에 얹혀지는 모티브와의 일관성을 유지하지도 조화를 이뤄내지도 못한다. 마치 망망대해의 부표처럼 고립돼 있는 그림 속 이미지들이 타자와의 불연속성에 바탕을 둔, 그리고 타자와의 진정한 소통에 이르지 못한 현대인의 실존적 자의식을 반영한다. 타자와의 불연속적 관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보다 본질적으론 언어(이미지)의 형식을 통해 강화된다. 예컨대 그림에는 비행기가 등장한다. 비행기는 소녀의 손에 들려진 장난감의 형태로서, 프레임 속에 갇힌 그림의 형태로서, 구겨서 버려진 종이 속의 그림의 형태로서, 그리고 무중력의 공간 속을 비행하는 형태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림 속 비행기들(비행기의 이미지들)은 연속적인 서사, 일관된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만 서로 무관계한 이미지들의 연쇄를, 서로 이질적인 의미들의 연쇄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러니까 이는 단순히 사물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넘어, 이미지와 이미지, 의미와 의미간의 불연속적인 관계를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 정규리의 그림은 새장에서 풀려난 새가 과연 자유를 획득했는가를 의심케 하며, 공간을 벗어난 사람이 또 다른 공간 속에 갇힌 것은 아닌지 의심케 한다. 무중력의 공간 속을 부유하는 이미지들이 공간에 대한 감각적 현실감을 의심케 하며, 물리적 시간개념에다가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주관적이고 심정적인 시간개념을 대질시킨다. 또한 큐브가 변주된 형태일 수 있는 주사위를 통해서는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예기치 못한 사태가 삶의 장 속에 끼어들 수 있는 개연성마저 열어 놓는다. ● 이처럼 정규리의 그림은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연속적인 서사, 일관된 서사가 사실은 순전한 환상임을 주지시키고, 그 환상의 더께를 걷어내고 나면 이처럼 불연속적인 서사,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서사, 조각나고 균열된 서사가 그 지층을 이루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 고충환
Vol.20061022a | 정규리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