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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20_금요일_06:00pm
협찬_포토랜드_디웍스 후원_한국문화예술진흥회
가나포럼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Tel. 02_720_1020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 이원철의 풍경사진들은 아름답다, 대단히 아름답다. 그 흠집 없는 아름다움은 물론 작가의 뛰어난 조형감각과 그 감각을 구체적인 사진 이미지로 바꾸는 표현능력의 산물이다. 철저하게 이분화 된 구도, 멈과 가까움의 조율, 전체와 디테일의 긴장 등등... 프레임 속 풍경들에게 고전적 긴장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작가의 세련된 능력은 사진의 표층 곳곳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것만으로는 이 풍경사진들의 아름다움이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건 무엇 때문일까? 그의 풍경들을 응시하다 보면, 적어도 내 경우, 모르는 사이에 눈앞에서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풍경이 있다. 이 무의지적 풍경은 고전적 균형성의 사진 풍경들과 내밀한 관계가 있으면서도 그러한 고전미의 원칙들로는 설명되지 않는 독자적인 풍경처럼 여겨진다. 이 풍경은 무엇의 풍경일까? 그리고 프레임 속 풍경과 이 독자적인 풍경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원철의 풍경사진들 속에는 3개의 풍경 층위가 있다. 우선 '외적 풍경의 층위(Exterieur-Landscape)'가 있다. 이 외적 풍경 층위를 구성하는 원칙은 정지(discontinuity)와 적요(stillness)다. 그의 사진들 속에는 저마다 의미를 지니는 다양한 풍경의 오브제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등대이든 새이든 풍력 발전기이든 파인더로 포착되어 프레임 안에 소속된 그 오브제들은 마치 핀에 꽂혀 채집상자 안에 들어있는 나비들처럼 제자리에 붙박여있다. 물론 그러한 정지 이미지는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은 것들로 재현할 수밖에 없는 사진 본래의 운명이며 그 사진의 피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거의 모든 사진의 정지된 이미지 속에서는 포착된 대상의 생생함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발견된다. 하지만 이원철의 풍경 사진 속에서 그러한 의도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의 풍경 사진들의 정지 이미지는 그 목적이 생생함의 표현이 아니라 정지 그 자체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인상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진의 프레임 안에 포만해 있는 적요다. 이원철의 풍경사진들은 진공상태처럼 적막하다. 비록 바다 위에서는 파도가 일렁이고, 들판에서는 새들이 날아오르고. 무거운 풍력 발전기가 쉼없이 돌아가고 있지만 가능한 먼 거리에서 포착되는 풍경들은 그 원거리 속에서 소리를 빼앗겨 더 깊은 정지 상태에 빠져 있을 뿐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 소리를 빼앗길 때 그 대상을 감싸는 정적은 거의 치명적이다. 고전적인 하모니로 잘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그의 풍경사진들이 어쩐지 낯선 분위기로 다가온다면 그건 다름아닌 정지와 적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 효과 때문일 것이다.
이원철의 사진들 속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풍경의 층위는 '내적 풍경의 층위(Interieur-Landscape)'다. 이 내적 풍경의 층위를 결정하는 원칙은 수렴(reduction)과 확장(expansion)이다. 정지와 적요의 층위가 사진 속 풍경들을 정태적인 것으로 만든다면 수렴과 확장은 그 정물성의 풍경들을 역동적인 이미지로 변모 시키는 내적인 힘들을 드러낸다. 그 힘은 먼저 풍경 오브제들을 가능한 축소시키려는 작가의 미니멀 아트적 시선을 통해서 나타난다. 풍경의 대상들을 되도록 원경으로 포착함으로써 그 물질성을 극소화 하려는 미니멀리즘의 시선 속에서 개개의 대상들은 하나의 물질공간으로 정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끝없이 미분화 하여 마침내 탈물질화 시키려는 수렴 운동을 따라간다. 때문에 우리가 사진 속에서 눈으로 확인하는 바다 위의 오리 한 마리, 점점이 날아오르는 새들, 작은 섬 위의 등대들 또한 더 이상 고정된 오브제들이 아니라 시각적 대상들을 한없이 작은 것으로 축소시켜 마침내 프레임 안을 공백으로 비워가는 수렴운동의 한 순간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사진들 속에는 수렴의 운동성과 더불어 내적 풍경의 층위를 결정하는 또 하나의 힘이 있다. 그건 무엇보다 프레임 공간의 거의 모두를 차지하고 있는 빈 하늘의 역동성에서 확인되는 확장의 힘이다. 정지 시킬 수 없이 부단히 모양을 바꾸는 대기권의 형상 운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 확장의 힘은 시각적 대상들을 소실시키려는 수렴의 운동과 달리 아직 형상화 되지 않은 그 어떤 이미지의 생성과정을 보여준다. 그 결과 이원철의 사진 프레임 안에서는 일종의 풍경 패러독스가 발생 한다: 한편으로는 수렴 운동에 의해서 풍경이 증발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힘인 확장 운동에 의해서 비워지는 프레임 안이 불특정한 풍경으로 점점 포만해지는 것이다. 구도가 분명하고 미니멀한 대상들의 디테일이 모두 살아 있으면서도 그의 풍경사진들이 모종의 불확실성으로 다가온다면 그건 수렴과 확장의 두 힘으로부터 비롯하는 풍경의 패러독스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3의 풍경 층위가 있다. 이 풍경에는 이름을 붙이기가 힘들다. 하지만 굳이 명명하자면 나는 그 풍경을 '에피파니의 풍경(Epiphanie-Landscape)'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의 현현'이라는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신의 얼굴을 직접 육안으로 목격하는 종교적 엑스타시를 일컫는 에피파니 체험의 특성은 무엇보다 독자성(sovereignty)이다. 다시 말해서 오로지 나만이 볼 수 있는, 그래서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우연한 이미지와의 만남이 에피파니의 체험이다. 만일 이원철의 풍경사진들이 제3의 풍경 층위를 지닌다면 그 풍경의 힘은 보는 이에게 다름아닌 에피파니의 체험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이원철의 풍경사진들은 아름답지만 그 풍경의 아름다움이 보는 이를 끌어들여서 프레임 속에 가두는 이미지의 힘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풍경의 힘은 정지와 적요, 수렴과 확장의 변증법을 통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모르는 사이에 프레임을 벗어나 또 하나의 풍경, 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우연적이고 독자적인 풍경과 조우하게 만든다는데 있다. 하지만 제3의 풍경 층위를 통해서 우리들 각자가 체험하게 되는 에피파니의 풍경이 오로지 개별적이고 특수하기만 한 것일까? 나의 경우, 이원철의 풍경사진들이 해후하게 만드는 풍경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노스탤지어의 풍경이다. 그 풍경은, 굳이 묘사하자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한 번도 떠나 본적도 없는 그 어느 곳의 풍경이다. 그런데 이 '어느 곳'이 나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장소일까? 아닐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 미지의 고향, 장소 아닌 그 어느 장소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간직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김진영
Vol.20061020a | 이원철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