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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016_월요일_06:00pm
정 갤러리 기획 초대展
정 갤러리 서울 종로구 내수동 110-36번지 Tel. 02_733_1911 www.artjungwon.co.kr
방대한 사적(私的) 모뉴멘트, 한 장의 와이셔츠로 접혀지다. ● 박현곤의 2005년 작 「1만6천1백 원」은 만원권, 오천원권, 천원권, 그리고 백원 주화가 각기 담고 있는 세종, 이이, 이황, 이순신 이렇게 조선시대 위인 전집 4인방을 입체 공간 설치물로 각색한 작업이다. 자국 태생의 덕망 있는 위인 흉상을 통화(通貨) 속 상징인물로 설정하는 추세는 동서를 막론하고 대체로 흡사한 듯하다. 실물 가치를 갖는 재화와 교환할 만한 권위를 갖추게 할 요량으로, 일개 종이와 금속 위에 인지도 높은 명망가의 얼굴값이 올려지는 것일 게다. 별 대단치 않은 트릭이지만, 이러한 사회적 합의에 만인의 공감이 더해진다. 그 결과 시장 경제적 가치관에 따라 세종은 이순신보다 더 많은 예우와 존경을 받는다. 「1만6천1백 원」은 지폐에 납작하게 붙박인 채 단지 통화 가치만을 지시하던 위인의 초상을 수백 배의 입체물로 부풀려 세워놓은 악동 취향의 이벤트물이다. 크게 확대된 위인 4인이 모여 봐야 단지 통화가치 '1만6천1백 원'만 지시할 뿐이라는 유머를 통해 우리의 심성 속에 부풀어 오른 물신숭배의 실상을 더불어 냉소한다. 이 같은 전작의 연장된 컨셉트로, 고유한 사물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일찌감치 눈 뜬 박현곤은 근작에서도 그가 목격한 동일한 내역을 박물관적으로 연출했다. 다만 전작이 주변에서 쉽게 관찰 가능한 오브제로부터 보편타당한 진실을 유추했다면, 근작은 작가만이 독점 경험할 수 있는 특정 인물의 수집 욕구에 관한 재구성으로 이뤄졌다. 전시는 그 한 인물의 사적인 소사를 그가 일생 수집한 오브제의 박물관적 열거를 통해 관객이 유추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소사의 주인공이 평생 공들여 모은 물품은 작가 뿐 아니라 만인이 기왕에 가담한 보편성과 연관되고 만다. 끝으로 연구 대상이 된 소사의 주인공이란 다름 아닌 작가의 작고하신 부친이다.
전시는 크게 셋으로 구성된다. 작가 부친의 생전 수집품의 실제 전시와, 부친의 수집품을 촬영한 작가의 사진기록과, 작가가 직접 제작한 오브제 작업이다. 전시될 실제 수집품이란 부친이 평생 모은 수석(壽石) 600 점을 말하며, 사진 촬영된 수집품이란 부친이 생전 모아온 펜던트와 모자 그리고 훈장 같은 특정 '행사'와 연관된 기념품 일반을 지칭한다. 끝으로 작가가 직접 제작한 오브제란 「공무원」이란 제목의 FRP 조각으로 새마을운동 배지가 깃에 부착된 백색 와이셔츠를 재현하고 있는데, 각 잡히게 접혀 모양새가 공무원하면 연상되는 날선 기강이 떠오르지만, 실은 공무원 신분이었던 그의 부친의 트리뷰트(tribute)로 사용된 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출품작의 99%를 부친의 유품에서 빌려왔으니, 부친의 대리전을 치르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지만 이 전시는 부친이 남긴 방대한 소장품에 대한 아들의 재검토의 성격을 갖으며, 셋으로 재구성된 전시의 형태도 부친과 수집품 사이의 관계를 조망하는 작가의 분류법을 반영한 결과다.
600점의 수석과 500점의 펜던트와 40점의 기념모자는 결국 관람의 과정에서 도합 1140개의 개별 감상 대상으로 간주되진 않을 것이다. 간혹 눈에 띄는 괴상한 수석을 제하고는 카테고리별로 나뉜 수집품들은, 그저 한 무더기의 수석과, 벽지 무늬처럼 무표정한 펜던트의 모자이크 정도로 용이하게 지각될 공산이 크다. 이는 또한 일생의 한 부분을 수집 욕구에 집중한 어느 공무원 신분의 완고한 영남 사내가 몰입한 상태를 허망하게 요약하는 효과를 갖는다. 비록 특정 개인에게는 심혈을 쏟아 부은 애장품이지만, 객관적 분류법에 입각해서 서너 개로 범주화되는 것도 달리 피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범주화를 통해 이는 십 수 톤에 육박하는 돌무덤과, 조야한 키치에 불과한 고만고만한 디자인의 기념품들(모자와 펜던트 그리고 심지어 훈장)의 분류 사진 그 이상도 아니다. 일렬로 층 지워 세워 올린 수석과 그 무거움을 지탱하는 진열대의 모습 역시 상이한 목적에서 수집되었을지언정 고만고만한 색상과 도안으로 장식된 금속 펜던트의 반복을 포착한 인화지 속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즉 그 둘은 실체는 다르지만 속성은 결국 같은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사진에 담긴 기념 모자와 펜던트의 속성이란 본디 미관보다는 명분을 우선시 하는 태도에서 비롯한 프로덕션이다. 지속적인 수집을 통해 이것들의 개수가 불어나는 건 수집자의 명분은 구체화시키지만, 그의 미감까지 좋은 것으로 입증해주진 못한다. 왜냐하면 기념품이란 당초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게 아니기에 그렇다. 백 단위로 수집된 기념품과 수석들의 엇비슷한 반복 노출을 지켜보며 관자들이 지겨움을 느낄 무렵 이 전시에서 유일하게 단품으로 제작된 단색 오브제와 만나면서 이 혼란스런 상황이 명쾌해진다. 그 단품은 작가가 직접 제작한 「공무원」이다. 600개의 수석과, 500개의 펜던트와 40개의 기념모자 훈장이 작가가 관찰한 바, 그의 부친이 쌓아올린 명분의 모뉴멘트라면, 반들반들한 백색 와이셔츠 조형물은 작가가 부친의 방대한 유품을 한 개의 지시체로 정리한 결과물이다. 1,000점이 넘는 부친의 수집품들은 가지런히 접힌 '가짜' 와이셔츠 「공무원」으로 수렴되면서, 그 오랜 기록의 마침표를 찍는다. ■ 반이정
Vol.20061016a | 박현곤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