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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경기문화재단 기획
하남시 덕풍시장 5일장터 내 Tel. 031_231_7233 / 011_922_5804
이원정의 길바닥 시리즈 _ 그것이 '공공미술'로서 실패하기를 바란다 ● 이원정(작가명, 이원)은 지금 「길바닥, 2006」 연작을 제작중이다. 길바닥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 길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 줍기, '지렁이 키워 잡초에 거름주기' '길바닥에 누워 그리기'길바닥에서 퍼포먼스 하기... 이런 것들이 「길바닥」 연작의 소재이다. 열 개의 이웃에서 이원정은 길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줍는다. 담배꽁초들을 한 줄로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 전체 모습을 비디오로 찍는다. 사전에 짜여진 줄거리도 없고 아무런 촬영의 효과나 특별한 테크닉도 없다. 아마도 비디오에서 차지하는 변화의 부분이나 볼 것이라곤, 대부분 오고 가는 시민들의 어떤 반응들일 뿐이다. ● 이원정은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꽁초를 주워, 이어나가고 있으며, 비디오는 담담하게 그 모습을 보여준다. 웨딩 비디오를 찍는 친구 최억규가 찍은 이원정의 행위를 담은 비디오는 다시 시장 길바닥에서 상영된다. 그리고, 이제 이원정은 그 상영의 장면에 모여드는 시선들과 맥락들을 찍을 것이다. 상인, 시민, 소비자, 경기문화재단의 직원들, 작가들, 평론가들... 이들은 각각 어떤 복합적인 맥락들을 갖고, 이원정의 5일 장터 상영회를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완결의 지점에서 이 맥락들은 부딪칠 것이다.
일단 우리가 걸려드는 맥락은, 하남시라는 곳이다. 우리에게 이곳 하남시는 카페촌과 술, 여관 문화 등 소비향락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인공적인 소비문화지역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원정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하남시 5일장은 허가를 받지 않은 비인가장, 즉 자연발생 장터이다. 장터는 삶과 문화, 자본이 자연스럽게 교역하고 소통하는 곳이다. 이곳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이웃들과 지역사회의 소문(정확한 정보가 아닌)을 공유한다. 부정확한 정치정보, 지역정보, 땅이나 집값 시세 등 이다. 이런 것이 모두 삶을 이루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요소들이다. ● 이원정이 길바닥에서 하는 행위를 보며, 주변의 사람들은 어떤 정의를 내려준다. 주변사람들은 또 하나의 맥락에 걸려드는 것이다. 그들은 그 속에 끼어들면서 이야기한다."예술이네..." 무엇을 보고 이원정의 행위를 그같이 명명하는 것일까. 어쩌면, 비꼬는 말일 수도 있고, 어쩌면 진정 감탄일 수도 있다. '예술가'라는 전문가의 행위만이 예술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어떤 '예술'은 바로 '삶' 자체라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들을 반추해보면서, 어떤 경계들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 순간이 있었는가. 그것이 길바닥에서건, 집안에서건, 회사에서건, 학교에서건 우리는 항상 어떤 부끄러움과, 어떤 사랑과, 어떤 기억과, 어떤 자취들을 남기고 있는가. 이것은 분명 윤리적인 문제에 걸려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 일상에서 이런 윤리적인 문제에 걸린 어떤 행위들이나 순간들, 그곳에서 기능하는 '예술'이 존재하고 있을까. 어쩌면 이원정의 일상과 예술이라는 모호한 행위를 묶는 이번 프로젝트는 그런 출발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 경기문화재단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가한 이원정의 행위는 물론 이원정의 시리즈 작업의 일환이면서, 분명 이원정이 하고 있는 폭력적 시선과, 그 시선 앞에 놓인 어떤 존재의 주체화 과정, 맥락들의 교환)의 일환이다. 이 곳 맥락, 어쩌면 세 번째 우리가 걸려드는 맥락일터인데, 여기서 이원정은 '공공미술'에 관한 혹은 '공공 미술'에 걸려있는 몇가지 맥락들을 교차시키고자 한다. 심지어 여기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미션도 있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그 행위가 이루어지고 상영되는 장소인 하남시와의 어떤 소통의 과정들을 보여주어야 하는 강박까지 느낀다. 그렇지만 항상 그랬듯이, 이원정이 보여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강박이건, 폭력적 상황이건, 맥락의 교차이건, 이원정은 어떤 우스꽝스러운 경계들을 찔러보기만 할 것이다. 단지 이원정은 일상이라는 복잡한 맥락 속에서 어떤 행위들(그것이 말이 되건 아니건)을 디스플레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원정이 억지로 인위적인 공론장을 형성하기 위한 제스쳐를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현 단계 공공미술에서 나아간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닐까. 하남시와 비디오는 이원정의 미디어다. 하남시 5일장은 그 미디어가 충돌하는 장소가 된다. 그 충돌로써 어떤 효과가 일어난다면, 그것이 바로 공공적인 효과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 미술관의 작품들은 관객의 시선의 대상이다. 다분히 폭력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경외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미술관에서 보여 지는 작품들은 어떤 폭력의 상황을 피할 순 없다. 그렇다고 해서 현장에 전시되거나 현장에서 지속되는 행위들은 '그렇지 않다'라고 할 순 없다. 누군가를 위한다기보다는 어떤 경계의 지점에서 기능하는 미술이 가능한지도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들, 어느 누구도 '미술의 행위가 건드리는, 혹은 건드려야하는'경계'를 인식하지 못한다거나, 아니면 무시하려한다는'폭력적 시선과 인식'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현장의 공공미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원정이 하남시라는 곳에서 문화적인 행위를 한다'는 다소 교과서적인 설정은 실패하여야만, 약간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성공한다면, 분명 이원정은 '페이크 예술가'의 가면을 써야만 한다. ■ 이병희
Vol.20060925d | GRAF 2006 : 열 개의 이웃_6 : 하남시 5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