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6_0920_수요일_05:00pm
조형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27번지 Tel. 02_736_4804
"백색 공간, 그리고 나 -그 해후의 꽃" ● "둑이 없이 강이 있겠는가? " 세계적으로 알려진 지혜서 탈무드의 연구가 L. 긴즈버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강물이 흐른다. 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이 세월을 낚아챈다. 인생도 저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간다. ● 정지된 것은 오직 호수와 늪이며 죽음뿐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흐른다. 인생과 사랑도, 전기와 저 강물도 시간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 ● 흐르는 모든 것은 생명을 가졌다. 그리고 자유를 동시에 획득한다. 그러나 흐르는 강물조차도 그가 진정한 자유의지로 자유를 획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둑이 있기 때문이다. 둑은 강에게 있어 하나의 굴레이다. 그가 흐르기 위해서는 그 속박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강의 운명이다. 둑이 없는 강은 존재할 수 없다. 사막이 있을 뿐이다. ● 그렇듯, 인생에도 둑이 있다. 인생에는 여러 켜의 둑이 존재한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둑들이 우리를 존재케 한다. 그 둑으로 인해 우리는 각 자의 역사를 지닌다. ● "좌절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만의 역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인생을 통제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길로 들어선다. 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사람만이 물결의 세기를 알 수 있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 맞바람을 거슬러야만 날 수 있는 비행기처럼, 흐르는 강물의 세찬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갈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물결이 얼마나 험난하고 위험한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좌절을 맛본 사람만이 자신의 소중한 역사를 쓸 수 있다. 좌절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무슨 삶의 질풍노도가 있단 말인가? ● 모든 인간은 각자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시인은 글로, 조각가는 돌로, 그리고 혁명가는 그를 추종하는 군중을 낳으며, 화가는 자신만의 역사를 기록한 시각언어를 낳는다. 이것이 삶이고 인생이다.
침묵이 내려앉는 허허로운 공간에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그 가냘픈 손가락 사이로 인생의 화음이 흐른다. 그리고 지금, 그 손가락 사이에 물감이 얼룩져 있다. 이제 조만간 육십갑자를 바라보는 이 인애의 삶은 화실 창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물살처럼 느리고 아주 천천히 그러나 격정의 세월을 안은 채 긴 세월의 그림자를 뒤로 하고 사각의 흰 캔버스와 마주하고 있다. ● 음악을 전공했던 그녀가 오래도록 강둑의 언저리를 배회하다 이제 백색의 공간 앞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결코 늦은 귀환이거나 변신이 아니다. 애초부터 그에게 흐르는 피 속에는 예술이라는 긴 끈이 그를 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물수제비뜨듯 피아노 건반을 유영하던 그의 손가락에 붓이 쥐어진 것은 단순히 변신한 모습이 아니라 어쩌면 본래의 그의 모습으로 회귀한 것이다. ●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모든 예술은 음악적 상태를 동경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피아노 건반을 치던 붓으로 한 획을 긋던 그의 내재된 예술에 대한 열망은 결국 이제야 결실의 계절을 맞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는 소리의 신비를 색으로 엮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필자가 그의 작업실을 찾았던 날, 수많은 작품들이 사면의 벽에 기대어 있었고 그 사이에서 색으로 물든 환희의 음률들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그 작품들 속에 오색의 향연이 펼쳐지며 동시에 생의 오케스트라가 연주되고 있었다.' ● '위대함이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주 격렬하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빈센트 반 고호는 말하고 있다. 관심과 관계 속에서만 모든 것이 구체화될 수 있다. 관계하지 않는 대상과 무슨 언어가 기록될 수 있겠는가. 모든 위대한 것들이 정렬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정렬이 위대함을 만든다. 그에게 생의 질곡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범속한 모든 이들이 겪는 아픔들 바로 그것이다.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갑작스런 사고로 떠나간 생의 동반자, 그것은 그에게 허무와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런 좌절을 넘어서지 못할 지혜는 없었다. 그가 의지할 곳은 오직 주님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의 내면을 토해낼 공간인 캔버스, 그것이 유일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 숱한 좌절과 고통의 시간이 아물어갈 무렵, 그녀와 비슷한 삶의 이야기를 가진 황혼의 청년이 그의 반려자로 재회의 삶이 주어졌다. ● 그들의 재회는 서녘에 드리워진 황혼의 장관, 그것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이었다. 많은 지인들이 격려와 갈채, 그리고 부러움의 미소로 그들에게 사랑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가 완성한 그림들 속에서 서정이 자라나고 소설이 엮어지고 있다. 모든 것을 잠재운 백설, 그 속에서 산이 솟아난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가, 고즈넉한 시골 길, 이름도 없는 들꽃들 사이로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저 산길 사이로 사랑이 달려온다. 이삼월 논둑길에 불을 놓듯 붉게 번져 오르는 맨드라미-그것은 차라리 꽃이라기보다 거대한 사랑의 불꽃이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의 마음이 생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 태안반도와 안면도 바다를 그린 사계절의 해경은 바다풍경이기 보다는 색의 유희라는 말이 보다 적절한 듯하다. ● 그녀의 화면 위에서 색들이 향연을 베풀고 절규한다. 꽃들과 산, 바다정경과 들녘, 일렁이는 물결과 수련들 속에서 생명체들이 약동한다. 그 생명체들의 향연은 곧 하나의 시가 되고 구름이 되어 유유히 사라진다. 비갠 뒤의 그 청명함으로 아주 투명하게 우리의 눈앞에 소설처럼 펼쳐진다. ● 그가 다녔던 수많은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들, 그리고 수없이 포토 스케치한 정경들이 그의 근면과 작품을 대하는 정직함을 읽을 수 있다. 유럽을 꽃피운 사실주의와 인상파화가들, 색채의 마술사라는 보나르, 현대미술의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그의 엄청난 작품수와 연대기별로 분류된 작품세계와 조형성의 변화과정을 섭렵함으로써 그의 회화사적 감흥과 미술지식을 가늠해볼 수 있다. ● 샤갈의 꿈이 있는 정원을 거닐며 행복한 꿈을 꾸어본다. 서커스단의 광대 뒤에 고인 눈물을 본다. 염소와 새 물고기들을 안고 있는 마을의 이웃과 바이올린을 들고 하늘로 나는 신부를 본다. 강렬한 색채가 그를 흡인해 하늘로 휘감고 올라간다. 꿈속을 나는 새처럼 그런 자유분방함과 상상의 세계로 그가 귀착한다. ● 이제 그는 많은 것을 지녔고 그것이 소중한 자신의 분신인 것을 안다. 그의 생애의 반려자가 있어 그는 더욱 풍요롭고 더 아름다워질 생애를 향해 닻을 올린다. ● 그녀가 마주한 백색의 공간은 이제 더 이상 공허의 세계가 아니다. 그 공간은 폭우 뒤에 피어난 저 산 너머의 무지개이며 삶이 그리는 호흡소리이다. 그것은 멈추지 않는 예술의지의 항해가 시작된 경적에 다름 아니다. ■ 정택영
Vol.20060924d | 이인애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