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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921_목요일_06:00pm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주변인, 무법자의 무질서한 무한질주-임태규展 ● 자신의 정체성을 '역사적 변동'의 자장 안에서 찾아야 했던 시대가 있다. 1980년의 광주, 1987년 6월 등 중요한 지점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변동에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이 규정되던 시대였다. 섹스를 꿈꿀 때조차 NHK판 광주 비디오를 떠올리며 '죄책감'에 사로 잡혀야 했던 시대. 이러한 시대에는 당연지사 개인의 삶은 구체화 되지 못했다.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으며, 세상은 오히려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급부를 향해 질주하는 시대가 왔다.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문화'로 변모했다. 그러면서 소소한 일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다층적 공간이 탄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천편일률적이다. 속도감 나는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허둥지둥 한 발 한 발을 내딛고는 있지만, 언제나 불안하다.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거침없는 속도로 무한 반복되는 세계에서 낙오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삶을 구체화하여 자신을 규정할 시간이 없다. 단지 그들은 현실과 무연한 내면의 유곡으로 빠져 들 뿐이다.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무한질주 ● 그간 임태규의 작업에 보이는 인물들은 어디에서나 쉽게 마주 할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 만화적 느낌으로 재현되어 있다.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하거나, 속눈썹을 정리하는 여자 이거나, 책을 베고 누워 있거나, 거울을 보면서 이를 닦거나, 공중 화잘실에서 제각각 각자에게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주변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레빈(Lewin)에 기대어 작가가 이야기 하고 있는 '주변인'은 이곳에도 속하지 않고 그렇다고 저곳에도 속하지 않는, 즉 사회에서 자신이 거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지만, 실상 그들은 그제 쳇바퀴 돌아가듯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있을 뿐이지 정체성에 있어서는 아직 주변인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비슷한 신체 구조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이 좀 더 당당해졌다. 이들은 소심한 '주변인'이 더 이상 아니다. 그렇다고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도 아니다. 이들은 '무법자'이다. 그들 역시 주변인이다. 차분하게 자리하고 있던 선은 더 자유분방하게 화면 가득 장악하여 무질서한 속도감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속도감을 배가하는 또 다른 도상들은 자동차, 비행기, UFO이다. 섹시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자와 하트 무늬로 가득한 자동차에서 속도를 만끽하며 담배를 피고 있거나, 부끄러운 듯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와 동승하고 있거나(「desperado-hunters」에 등장하는 여자는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의 퇴폐적인 표정과 자세는 벌거벗은 것과 다름없을 뿐만 아니라 차에 무늬로 등장하는 여인들은 벌거벗고 있다.), 종종 그의 그림에 마스코트처럼 등장하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강아지. 이들은 분명 자유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욱 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들을 규제하고 있는 사회에서 부유한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순간적이고 부유하는 느낌은 그의 작업 방법과도 관련이 있다. (김상철, 박영택도 지적하고 있듯이 그의 그림에서 선, 제작방법, '주변인'이라는 주제, 이 세가지는 서로 상화 보완점을 제시하면서 어우러져 있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무법자'는 '주변인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이전 작업의 주변인은 체계에 거스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순응하고 있다면, 이번 전시되는 무법자들은 체계를 거스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변을 통하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 ● 그렇다면 왜 주변인들은 무한질주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그들은 불안하다. 삶의 구체적인 모습에 주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지만, 스펙타클만 강조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삶의 구체는 정당성을 부여받기 보다는 권태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서 밀려난다. 그러나 진실은 주변에 있었다. 적어도 임태규에게는 말이다. 그가 보여주는 무질서적 무한질주가 「kyutopia」를 이룰지는 모르겠다. 실상 「kyutopia」도 무질서와 도상들의 무질서한 혼합으로 이뤄져 있어 유토피아에 가깝기 보다는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여기' 아닌가. 임태규는 작금의 '주변'을 변증법적이고 고고학적으로 접근하여 '미래'를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임태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주변'이다. 이제는 '주변'을 통해서 본 미래'를 보여줄 시기이다. 다시 말해 '주변'이 주는 재치와 기발함에서 벗어날 때가 온 것이다. 그가 보여줄 '미래'가 궁금하다. ■ 이대범
Vol.20060923c | 임태규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