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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913_수요일_06: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www.noamgallery.com
박은진 개인전 『Seoul』: 이미지로 만들어진 벽 ● 오스카 와일드: 모든 예술은 상당히 무용하다 ● 예술은 태어날 때부터 실재reality의 적수였다. 역사가 시작할 무렵에, 시는 예술을 대표하여 철학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며, 어느 누가 문화를 결정할지, 지배권 싸움을 벌였다. 철학의 입장에서 봤을 때, 예술은 좋은 말로 아름다운 가상의 왕국이지만, 나쁜 말로 체계적인 착각의 원천이었다.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플라톤이 저 유명한 시인추방론을 내세우며 예술에 선전포고를 하였던 것은 유명한 철학적 일화다. 모름지기 문화라는 것은 삶의 무늬 같은 것이다. 인간과 역사의 몸짓과 말짓을 규정하는 거대한 틀거리인 까닭에, 싸움의 승패에 따라 이후 역사의 운동과 벡터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내기에 걸린 몫이 상당했던 탓에 갈등이 적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결과는 철학의 승리로 돌아갔고, 풍요로운 신화의 시대는, 예술로 세계를 몽상하던 시대는 끝나고 만다. 이때부터 예술은 알 듯도 모를 듯한 기능으로 전락하여, 정말로 '무용'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복수의 칼날을 품속에 감춰둔 매력적인 악녀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다 마침내 기회를 얻게 된다. 비록 모습을 달리했을지언정 말이다.
델리아: 당신을 사랑해, 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당신을 사랑해...그것이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하는 이유야 ● 옛 애인을 죽일 것, 암살자로 거듭 태어난 매춘부 델리아는 자신의 첫 번째 임무를 부여받고 침착하게 짐의 목을 옭아맨다. 악덕이야말로 그곳의 도덕인 것이다. 그래야만 죄악의 도시 'Sin City'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박은진은 여섯 개의 작업을 선보이지만, 단연코 으뜸은 「Sin City」 연작이다. 「Sin City」만큼 '영화와 도시'라는 모티브를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드러내는 텍스트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 익숙하지만, 「Sin City」는 원래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의 만화가 원작이다. 흑백이 선명한 영화의 화면도 만만치 않은 스타일을 자랑하지만, 흑백으로 세상을 조각내는 원작만화에 비교하기 힘들다. 이러한 스타일에 힘입어 밀러는 대도시가 뿜어내는 쾌락과 매혹을, 범죄와 악덕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흥미롭게도 이 어둠은 대도시를 빨아들이며 마치 매력적인 창녀처럼 화려하게 반짝인다. "도시의 참된 형상만큼 초현실주의적인 형상은 없다."(벤야민) 일찍이 보들레르는 가스조명에 반짝이는 대도시 파리를 매력적인 창녀로 묘사하지 않았던가. 어둠을 몰아낸 대도시의 밤풍경은 결국 '아름다운 가상', 즉 예술 자체다. 박은진의 눈길은 바로 그곳에 멈춰선 다음에, 시간을 따라가며 공간을 긁어내며 차분히 쫓아간다.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루카치: '현재' 즉 연기자의 현존은 드라마 속의 인간이 운명에 의해 신성하게 된 것에 관한 가장 명백한, 그러므로 가장 심오한 표현이다...이러한 '현재'가 결여되었다는 점이 '영화'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영화가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인물들이 말없이 움직여야만 해서가 아니라, 그 인물들조차 단지 인간의 움직임과 행위에 불과할 뿐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의 결점이 아니다. 이것은 영화의 한계이며, 양식화의 원칙이다 ● 영화는 예술의 오래된 숙원을 해결했다. (물론 완벽하진 않았지만) 현실을 따라 잡았던 것이다. 회화적 재현과 비교불가능하게 정밀한 것은 물론이요 현실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포획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회화가 독점하고 지배했던 전통적인 재현의 질서는 유지될 수 없게 됐을 뿐더러, 현실과 거의 동등한 영상들이 어지럽게 난무하며 질서 자체를 위협한다. 너무 눈에 뻔히 보여서 보이지 않게 되는 장막 같은 영상의 홍수. 박은진은 그 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Sin City+Seoul」을 보자. 얼핏 보기에 영화적 화면처럼 보인다. 브루스 윌리스가 어두운 대도시 밤거리를 뒤로하며 운전한다. 익숙한 풍경에 익숙한 인물이 아스라이 겹쳐서 운동한다. 별 달리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사진이나 영화장면 같았던 인물영상은 손으로 정밀하게 재현한 회화이미지였고, 배경만 기계로 찍은 영화적 영상이었다. 조화로운 전체였던 화면은 체계적으로 찢겨 나갔다. 고전적 창문은 이제 화면과 스크린 사이를 오고가며 흔들린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인물(회화)이 배경(영화)에 묻혀 있다는 것을, 그나마 인물이 조각나 있으며 영화의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이라는 것을. 그렇게 회화는 스크린에서 흔적만 남았다. 하지만 영화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루카치의 지적대로, 인간 역시 살아있음을 상실하며, 현재는 언제나 과거로 바뀌며, 그 결과 현실은 예술과 뒤엉켜 버린다. 대도시란 심미화된 현실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여기서 미학과 존재론은 겹쳐지기 시작한다) 예술은 드디어 승리했으나, 전리품을 챙기지 못할지 모른다.
꼴로미냐: 대중들, 백화점의 쇼핑객들, 기차여행자들 그리고 르 꼬르뷔제 주택의 거주자들은 이미지를 고정할 수 없다는 점을 영화관객들과 공유한다...그들은 안도 밖도 아닌, (전통적인 의미에서)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 공간에서 살고 있다. 공간은 벽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만들어진다. 벽으로서의 이미지. 혹은 르 꼬르뷔제의 표현대로 '빛의 벽들.' 즉, 공간을 정의하는 벽들은 더 이상 작은 유리창이 뚫려 있는 고형의 벽이 아니다. ● '빛의 벽'은 세상의 안과 밖을 둘러쌓다. 유리건축은 실외를 온통 반영으로 뒤덮었고, 영화는 똑같은 정도로 실내를 점유했다. 그곳에서 영상은 끊임없이 반사되고 흘러가며, 이에 따라 주체 역시 유동한다. 1824년 인공의 조명이 파리에서 처음으로 자연의 어둠을 몰아낸 지 대략 2백년이 흘러간 지금, 박은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엉킨 이미지들을 있는 그대로 베껴내어 드러낸다. 흘러가고 섞여있고, 그 와중에 현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앞서 기다렸던 풍경은 이제 오지 않을 것이다. ■ 김상우
Vol.20060918f | 박은진 회화 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