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31223b | 홍인숙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06_0913_수요일_06: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82.(0)2.734.1333
홍인숙의 그림에는 기묘한 동거가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적막하고 단순한 화면에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과 엉뚱하게 갖다 쓴 한문, 어눌하면서도 정감 있는 드로잉, 판화와 회화 사이에 자리한 이미지들이 마구 섞여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그러한 혼성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익숙히 보았던 민화풍의 그림이나 삽화, 만화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조금씩 균열이 드러난다. 그려진 게 아니라 지판화이고 채색 역시 밀착된 인쇄다. 드로잉 선은 먹지로 그려진 윤곽선들이고 화면에 자리한 한자는 엉터리로 쓴 붓글씨에 작가가 소리 나는 대로 편하게 갖다 쓴 것이다. 예를 들자면 '여행'을 女行으로 쓴다거나 '아부지'를 我父地로 쓰는 식이다. 엉터리 한자인 셈이다. 붓글씨 자체도 역시 되는 대로 써나갔다. 마치 박이소의 '바보서예'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런 식의 차용 혹은 발췌, 번안, 의도적인 오독은 전통회화와 서예에 대한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해독 불능과 그 전통문화와의 단절감과 고립감을 위축이나 절망감 대신 적극적인 유머와 패러디로 넘어서고자 하는 전략에 해당한다. 이 낙천적이면서도 대담한 차용, 농담과 유머는 전통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대응적 성격을 띤다. 그로인해 다소 광막한 거리감을 지닌 전통은 순간의 웃음과 언어에 대한 자의적인 놀이에 의해 문득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지고 남은 공간에 홍인숙은 자신의 가족들의 초상과 목단, 집, 새, 나무 등의 이미지와 함께 마치 곤충채집이나 인형놀이처럼 종이에 고정시켜 놓았다. 전통적인 시각이미지들이 현재 자신의 삶의 가계도 아래 재편되고 있다. 여기서 지판화 기법은 그런 배열과 고정을 압핀이나 핀셋을 대신해서 해준다.
혼성적이면서도 매우 전통적인 회화에 가깝고 소박하면서도 재기발랄함이 넘치고 꼼꼼한 재현 방식이면서도 상당히 키치적이다. 장식적이고 수공적인 공정을 통해 여성적인 이미지 연출에 능하고 패턴화 된 도상과 문자의 연결을 통해 함축적인 이야기전달과 몽상과 상상의 여운 역시 효과적으로 남긴다. 나로서는 홍인숙의 다소 낯선 발상과 생각의 생경함이 이런 작업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드로잉을 반복해서 하고 이를 응용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드로잉이란 생각을 옮기고 몸을 이동시키는 매력적인 행위다. 그렇게 흘러넘치는 드로잉을 지판화 기법으로 환생시켰다. 따라서 작가의 판화기법은 그 자체보다는 드로잉의 연장선에서, 이의 확장과 효과적인 이동이란 맥락에서 유위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판화를 이용한 드로잉작업, 회화작업이다. 그 제작방식은 유년시절에 처음 그림을 그리고 배우던 경험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한다. 재현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놀이는 본래의 이미지에 먹지를 받치고 윤곽을 따라 그리면서 밑에 깔린 종이의 피부 위에 그 이미지의 윤곽을 고스란히 옮기는 일이었다. 홍인숙은 그런 경험을 새롭게 각색한다. 그러니까 한지 위에 먹지로 그려진 이미지는 잉킹 되어진 조각조각의 종이판에 의해 판화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새겨진 유노각선 안에 색을 입힌다. 이것 역시 어린 시절 즐겨 했던 색칠놀이와도 유사하다.
작가가 즐겨 그리는 소녀이미지나 다른 도상들 또한 아이들 그림처럼 만화적이고 소박하다. 기성의 내음을 지우고 세련된 구성, 의도적인 그리기를 거둔 자리에 반복적이고 핵심적인 단어 같은 이미지의 출현과 지극히 사적인 관심과 집착의 상징들만이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뿐이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소녀상은 작가를 대신하기도 하고 가족과 결부된 유년시절의 추억, 꿈과 환상을 모두 아우르는 핵심적인 매개다. 밑이 넓게 퍼진 스커트나 드레스에 부푼 머리 리본이나 꽃 모양의 머리핀, 고무줄로 질끈 묶어 곱게 빗어 넘긴 머리, 굽이 있는 작은 구두, 커다란 눈을 지닌 이 소녀상은 만화책이나 동화의 삽화, 인형 혹은 종이인형놀이 등에서 영향 받은 이미지일 것이다. 작가는 그 이미지를 언제부터 어떻게, 왜 그리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까지 반복해서 즐겨 그리고 있다. 이 근원을 알 수 없는 이미지는 무의식 속에 자리한 모종의 원형이미지일까? 지금도 아이들은 그런 인물이미지를 하루 종일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작가의 앨범의 갈피에 깃든 사진, 가족사진에서 절취해왔다. 동시에 민화에서 따온 목단과 새 등의 이미지들은 다분히 주술적이고 기원적인 도상들이다. 장지 바탕에 자수처럼 수놓아지고 종이로 오려붙인 공예처럼 흩어져 있는 이 도상들이 현재 자신과 가족의 기복을 후광처럼 염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자기애적 시간과 기억의 응집에 의한 부단한 반복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영원하고 강렬한 동경이나 현재의 시점에서 유년의 기억을 반추하는 이 그리기는 일종의 키덜트적인 이미지에 해당한다. 마치 소꿉놀이나 인형놀이를 하듯 자기 추억의 매개물들을 하나씩 꺼내 이런 저런 치장이나 배열을 하고 있는 손놀림에는 향수와 연민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추억은 아름답지만,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것은 부재하고 상실과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다. 현재의 시간이 망실된 자리에 과거의 시간만이 자리해서 산다. 그래서인지 화면은 전체적으로 공허하고 다소 처량하다. 상대적으로 광활한 여백과 그 어느 한 켠에 위치한 도상들은 지워지고 잊혀진 옛 추억의 흐름 속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떠오르는 기억의 잔상이다. 가족들과의 추억의 반추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딸이자 남동생의 누나. 큰언니의 동생이란 관계망 속에서 순환하며 그 가족들은 그때그때 마다 번갈아 등장한다. 한 인간의 육체가 이룬 무수한 인연의 망들이 이 작가의 그림의 주된 동인인 셈이다. 그 망을 들어가 보고 이해하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인간의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만이 이 불확실하고 마음 줄 수 없는 무수한 타인들과의 삶에서 유독 간절하고 의미 있는 일, 위안을 주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아니 그의 판화 속 이미지들이 중얼거린다. ■ 박영택
Vol.20060917a | 홍인숙展 / HONGINSOOK / 洪仁淑 / painting.pr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