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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913_수요일_06:00pm_관훈갤러리 신관
조직위원장_성완경 / 사무총장_김남진 본전시 큐레이터_최봉림_박영택_이원일(해외섹션 큐레이터) 특별전 큐레이터_김남진_민병직_김미령
주최_SIPF 조직위원회 www.sipf.net 주관_(주)애드임팩트 후원_문화관광부_한국문화예술위원회 협력_Coma_LOAD 'N STOCK_트렁크 갤러리 협찬_사진예술_포토넷_엡손_SK텔레콤_이미지원(주)_이 현상소(e-photo) (주)포토섬(photosome)_액자전문점 green art_(주)대성그룹
갤러리 토포하우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02_734_7555
갤러리 쌈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38번지 쌈지길 내 아랫길 Tel. 02_736_0088
덕원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갤러리 나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3번지 Tel. 02_725_2930
갤러리 룩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02_720_8488
김영섭사진화랑 서울 종로구 관훈동 146-1번지 Tel. 02_733_6331
갤러리 카페 브레송 서울 중구 충무로1가 고려빌딩 B1 Tel. 02_2269_2613~4
행사소개 ● 사진의 현재 모습은 분명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예술로서의 사진에 대한 지위도 이제 되물어보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일반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적 보급과 인터넷 문화의 확산으로 인해 사진은 그 어떤 매체보다도 익숙하고 친근한 매체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마디로 현대의 지형 속에서 사진은 사진예술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넘어서 일상의 문화적 소통의 주요한 매체로, 향유하고 즐기는 매체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번 행사가 일회적인 전시형식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진페스티벌의 형식으로, 사진문화의 다양한 양상을 공유할 수 있는 한바탕 축제의 장으로 제기되는 것도 이러한 상황에서 기인합니다. ● 하지만 예술사진에 대한 시장의 확대나 관심의 증대, 디지털 이미지의 확산은 사진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긴 하지만 보다 전문화된 사진에 대한 다양한 수요와 욕구를 해결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문화로서의 사진이 갖고 있는 다양한 잠재성과 사진예술이 갖고 있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광범위한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문제제기로 이어지고 있고, 이미 몇 해 전부터 사진계 안팎에서는 단순한 사진 기획전을 넘어서는 축제로서의 사진행사의 필요성을 제기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미 2-30년 전부터 사진페스티벌을 주요한 도시문화축제로 성공시켜온 해외의 유수의 사례들도 이러한 주장들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 이번 사진 페스티벌은 사진계를 둘러싼 대내외적인 상황변화, 곧 대중적인 사진문화의 확산을 사진문화의 질적인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기회로 전환시키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사진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공통의 문제제기나 사진계 전반에 관한 현안들을 이슈화, 담론화시키고, 한국의 사진예술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평가하는 기회로 삼아 한국 사진문화의 보다 나은 질적인 발전을 도모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으며, 대중적 매체로서의 사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유도하고,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진문화를 향유시키고자 하는 데에도 그 중요한 기획의 방향성을 두고자 합니다. 물론 한국의 사진문화, 사진예술을 포괄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장을 마련하여 보다 발전적인 한국 사진의 미래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도 중요한 기획의 배경입니다. ● 이번 사진페스티벌은 사진예술의 축제화를 통해 대중과 함께하는 새로운 교류와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사진은 어떤 면에서는 파인아트나 미디어 아트보다도 훨씬 더 친근하고 익숙한 매체입니다. 이런 이유로 대중적 참여의 계기가 높은 미디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축제는 대중과 함께하는 다양한 사진예술과 문화의 한마당이며, 사진을 통한 즐거움과 놀이의 장이라는 면에서 사진문화를 즐기고 향유하는 축제의 장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현 시기 사진문화가 갖고 있는 현실적 함의들을 공유하고 이해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 더구나 이번 사진 페스티벌은 서울에서 개최되는 최초의 본격적인 사진페스티벌이기에 그 의미 또한 각별하리라 예상합니다. 향후 지속적이고 발전적인 사진페스티벌의 개최를 통해 사진문화의 실재적인 발전을 이루어내는 소중한 기회로 자리매김 될 수 있도록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조직위원회는 노력할 것입니다.
행사의 구성 ● 본전시_울트라센스Ultra Sense_토포하우스, 관훈갤러리, 인사아트센터B1 ● 특별전시 포토 루덴스Photo Ludens_덕원갤러리 영 포트폴리오Young Portfolio_갤러리 룩스, 갤러리 나우, 갤러리 카페 브레송 명예의 전당The Hall of Fame_김영섭사진화랑 하이브리디즘hybridism_갤러리쌈지 포토 인터페이스Photo Interface(대중 참여전시)_토포하우스, 쌈지길
● 부대행사 ○ 포토 페어 Photo Fair_관훈갤러리 특관 ○ 사진장터 Photo Market_인사동 쌈지길 마당 입구, 관훈갤러리 특관 ○ 작가와의 대화 Photographer's Talk_토포하우스, 덕원갤러리 ○ 포트폴리오 리뷰 Portfolio Review_갤러리카페 브레송 ○ 디지털 촬영축제 Digital Printing Festival_인사동 거리 일대 ○ 야외 디지털 영상쇼 Night Photoshow in Autumn_김영섭사진화랑 갤러리카페, 인사동 대성빌딩 앞마당 ○ 모바일 사진전 Mobile Photo Exhibition_쌈지길 ■ 행사문의 : 02-2269-2613
■ 울트라 센스_Ultra Sense ○ 큐레이터_박영택(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최봉림(사진평론가, 작가) 이원일(해외섹션 큐레이터_상하이 비엔날레 전시 공동감독(현), 미디어시티 서울 총감독) ○ 전시장소_토포하우스 전관, 관훈갤러리 전관, 인사아트센터 지하 ○ 참여작가_강홍구_고명근_구성연_데비한_박진호_심혜정_안창홍_이상현_이윤진_이정_임선영_장미라_정동석_정소영_정은정_정현명_조습-조용준-파야_황규태 캐더린 야스(Catherine Yass, 영국)_쿠이 시우웬(Cui Xiuwen, 중국)_미야오 춘(Mio Xiao Chun, 중국)_마시모 비탈리(Massimo Vitali, 이탈리아)_빅토리아 빈슈톡(Victoria Binschtok, 러시아)_올라프 브루닝(Olaf Breuning, 독일)_홍치펭(Hung chih Peng,대만)_홍동루(Hong Dong Lu, 대만)_리우 렌(Liu Ren, 중국)_타이콴 티엔(Tiantaquan, 중국)
울트라센스 ● 감각이란 인간의 몸과 밀접하게 결부된 단어다. 몸과 감각은 그러니까 거의 동일하게 붙어있다. 아니 감각의 총체가 곧 몸일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감각기관을 갖고 살아가지만 인간은 특히 그 감각기관에 의존해 비로소 인간이 된다. 그가 인간이라는 것은 그가 '감각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인간이기에 그 감각으로 인한 다양한 행위는 역사를 반복해서 거의 변함없이 되풀이 된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지구상에 최초로 출현한 인간과 그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들의 삶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내 몸으로 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닌 감각기관은 고대인과 현재의 우리들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매개가 된다. 나 역시 그리스인의 시선과 고구려인들의 청각, 조선시대 사람들의 후각을 지녔고 이를 거듭 사용하고 체득한다. 여전히 우리는 당. 송의 시와 세익스피어의 문학, 렘브란트의 그림에 공감한다. 그러니까 수천년의 세월 동안 육체/감각기관은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감각으로 전달된 그리고 그 감각에 의해 정해진 정보는 거의 같은 것이다.
인간이 의식적인 존재라면 그는 감각 기관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감각이 온 몸에서 빠져나갔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기를 그친다. '혼이 빠졌다'거나 '넋이 나갔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그가 거의 죽었다는 것, 죽음과 진배없다는 말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가 감각기능을 갖고 있고 그 감각으로 인해 모든 것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더듬이와 같은 감각기관을 저마다 갑옷처럼 두르고 타인들과 살아가는 인간은 무척 고립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같은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 받기도 한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감각의 코드와 그 예민함의 영역차이가 개별성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감각이 없는 존재는 귀신이나 천사뿐이다. 당연히 죽은 이도 감각은 없다. 시신은 무엇보다도 부동과 차가움, 아무런 움직임이나 기운도 전해주지 않는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절연되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몸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다. 감각기관이 정지되어 있다면 몸은 곧 소멸로 치닫는다. 감각을 지닌 인간들이 감각기관 자체가 무화되어 버린 시신 앞에서 절망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반향이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폐쇄로 인한 접촉 불가능은 더 이상 그 대상과 소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참혹하게 알려준다. 그런가하면 감각이 둔하다거나 느리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감각이 예민하고 빠른 이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다소 느린 이도 있을 것이다. 감각은 그런 면에서 보편적이면서도 상대적인 편이다. 감각기관은 선천적이면서도 후천적으로 학습되거나 매우 문화적인 행위에 해당한다. 감각이란 세계와 나 사이에 놓인 일종의 창이다. 그 창을 통해 세계를 보고 느끼고 만난다. 세계와 나와의 관계를 인식함으로써 나라는 존재에 가닿는다. 감각이란 레이더망을 통하지 않고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있는 길은 없어 보인다. 우리가 이 몸을 통하지 않고 저 세게, 타인과 만나고 접촉할 수 있는 일은 불가능하다. 감각은 의식의 경계를 규정한다. 감각은 현실을 아주 잘개 쪼갠 다음 그것을 다시 모아 의미 있는 형태를 만든다. 그렇게 새로운 종합을 통해 감각은 눈에 보이게 되며 이렇게 포착된 감각이 형상이며 이미지이고 사진이 된다. 문화와 예술은 감각기관 자체를 매우 예리하게 가다듬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바로 인간다움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인간의 자존과 존엄성으로 비약한다. 여전히 감각을 고양시키기 위해, 감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더 많은 감각을 보태기 위해 예술작품이 그렇게 끊임없이 창조되고 있음을 기억해보라. 알다시피 예술이란 삶을 바라보는 고도로 조직된 방법의 하나다. 그래서 흔히 '예술은 자연을 문진文鎭속에 가두는 일'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회화라는 것이 감각을 자극한 생의 힘과 리듬을 포착하여 관자의 감각을 통해 그 힘을 다시 재주입 하려는 것이라면 같은 맥락에서 사진 역시 그럴 것이다. 아니 오늘날 사진은 다른 어떤 예술장르보다도 그 감각에 기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사진과 감각, 감각의 과잉과 사진이미지의 관계 등을 생각해보려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인간은 불가피하게 감각과 함께 살아간다. 감각은 인간을 확장시키지만, 구속하고 속박하기도 한다. 감각은 우리를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이들과 연결시켜주는 유전의 사슬의 연장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과 모든 우연한 사건을 넘어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 동물들과 연결시켜준다. 감각은 인간과 비인간을, 한 영혼과 그의 많은 친척들을, 개인과 우주를,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다 이어준다. 이 세계는 미지의 영역이 너무 많이 남아있고 우리를 유혹할 것이고 우리는 가능한 다양하게 살고 호기심을 간직하고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의 밸브를 죄다 열어두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삶은 대개 직접적인 삶의 감각을 피해 황량하고, 단순하고, 엄숙하고, 금욕적이며, 사무적인 일상으로 찌그러지게 만들기도 하고 상투적인 감각에 소모되도록 독려하는 가하면 말초적인 감각만을 기형적으로 극대화한다. 오늘날 감각의 과잉,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 새삼 '울트라센스'적인 사진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어쩌면 그 감각의 과잉에 보폭을 맞추려는 것 보다는 다시 감각과 과잉을 성찰해보고 그 틈새랄까 혹은 다소 대안적인 의미 안에서 사진이미지의 진정한 감각과 그 힘에 주목해보자는 것은 아닐까? '울트란 센스'란 '초감각' 혹은 '감각너머'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사진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표현 혹은 관습적인 시각적 차원을 과잉으로 혹은 그 반대로 넘어서는 작업을 주목해봤다. 그런 작업을 모아보았지만 사실 모든 사진치고 감각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고 또 어떤 것이 과연 울트라센스에 합당한 작업이냐고 했을 때는 무척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울트라센스라는 사전적 정의에 충실하게 몸이 지닌 감각, 특히 시지각을 극단으로 혹은 새로운 시각에서 보여주는 작업에 일단 주목해 보았다. 시각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사진은 인간과 시각이란 감각과의 관계와 그 영향, 시각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다룰 것인가에 대한 보다 정치하고 치밀한 논의를 거듭 요구한다. 그것은 기존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진에 관한 시각적 연출과 표현방법론에 대한 의문의 제기와 함께 사진이 지닌 잠재력과 힘에 또한 주목하게 한다. 사진 발명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실제는 우리의 재단된 시각에 도전하고 또 그것을 거부하는 사진의 능력은 여전히 새롭다. 사진가란, 예술가란 삶의 실재에 대한 자신의 감각을 가지런히 해주고 단순화시켜 주는, 새로운 구조물을 찾는 사람을 말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사진을 통해 우리들 몸이 지닌 시각과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아울러 그렇게 바라본 세계를 어떻게 울트라센스하게 드러내고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 박영택
일상의 감각을 넘어서는, 상식을 거부하는 사진들 ● 프랑스 혁명 전까지 서구사회가 향유하고 일반에게 공개한 소위 공식예술 official arts은 지배계층의 취향과 이데올로기를 미화하고 전파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기성 사회질서와 권력의 안녕을 위해 봉사했다. 공식예술은 지배계층의 위엄을 표상하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예술의 이름으로 미화하고 신비롭게 만들면서 기성질서를 공고히 유지하는 것을 그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서서히 부르주아 사회를 혐오하는 낭만주의 예술가와 더불어, 그리고 정치적 이념으로 무장한 예술가와 더불어, 소수의 예술은 지배계층의 허위와 타락, 지배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세속성을 공격하는 양상을 구체화한다.
1839년에 발명이 공표된 사진도 예술적 기능의 이러한 시대적 변모를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구현했다. 19세기 내내 지배계층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던 사진은 20세기와 더불어 기성 사회의 모순과 지배이념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본의 불합리한 분배 (예를 들면 제이콥 리스 Jacob Riis)와 부조리한 노동구조 (예를 들면 루이스 하인 Lewis Hine)를 폭로하고, 사회주의 이념의 홍보 (예를 들면 Alexander Rodchenko)에 사진을 활용한다. 사진의 지배계급과 지배이념에 대한 공격은 자본과 노동, 혁명이라는 거대한 주제에만 머물지 않았다. 1920년대의 초현실주의와 더불어 사진은 합리주의적 이성, 부르주아의 성윤리, 일상적 관습, 상투적 시선 등을 전복하려는 시도들을 배가했다. 초현실주의의 세례를 받은 사진가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일상성 전반을 전복하려는 과도한 파격, 과다한 제스처, 일탈적 시각을 주저하지 않았다. 과격한 아이러니와 패러디, 블랙 유머와 풍자는 이를 위한 방책이었다.
무엇보다도 기획자는 제1회 서울 국제사진페스티발의 주제인 '울트라 센스'를 바로 초현실주의의 예술적 실천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았다.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일상적 관념을 전복하며, 합리적 이성이 따라올 수 없는 감각적 상상력으로 사진으로 실천하는 작가들을 '울트라 센스'에 초대하고자 했다. 'ultra'와 'sense'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통해 초대 작품의 의미를 구획해 보자.
'ultra'는 부사 혹은 접두어로 쓰이는 라틴어이다. 부사는 '저편, 저 너머'의 뜻을 담고 있고, 접두어는 수식하는 명사, 형용사의 어의를 '저편, 저 너머'로 몰고 가, '과도, 과잉, 과장, 극단'의 어의를 함유한 명사와 형용사를 창출한다. 라틴어 'sensus'에서 유래한 'sense'는 물질 대상이 주는 인상을 경험하는 육체의 감각 능력으로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을 포괄한다. 'sense'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공유하는 능력으로 각 종(種)에 따라 감지 능력의 편차가 존재하며, 각 동물의 종은 일반적인 쾌감과 불쾌감을 공유한다. 그러니까 인간과 동물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에 있어서 각 종에 고유한 공통적인 쾌감과 불쾌감을 소유한다. 따라서 'ultra sense'는 오감에 관련된 'sense'의 의미 속에서, 일반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쾌감과 불쾌감을 벗어나는 특이한 감각으로 규정될 것이다, 극도로 민감한 시각과 청각성, 예외적인 촉각과 미각, 정상을 넘어서는 후각성이 'ultra sense'일 것이다.
'sense'의 두 번째 어의는 육체적 쾌락, 쾌감 physical pleasure과 상응한다. 영화 『감각의 제국 L'Empire des sens』은 그 용례의 전형으로, 그것은 성적 본능이며 이를 만족시키려는 욕망이다. 이 어의는 성적 욕망과 쾌락이 인간의 오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증거하며,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은 인간의 성적 욕망이 발산되고 수렴되는 장소임을 드러낸다. 즉 인간의 오감은 성적 충동이 방황하고 전율하고 가라앉는 자리인 셈이다. 따라서 이때의 'ultra sense'는 사회가 규정한 성적 표현, 한 시대와 사회를 지배하는 통념적인 성의식을 넘어서는 과도한 성적 욕망 그리고 기존의 성윤리의 저편으로 일탈하는 육체적 욕망의 양태일 것이다. 'sense'의 세 번째 의미는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사태,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일컫는다. 'sense'는 어떤 이성적 사고, 합리적 추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험과 직관 등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ultra sense'는 평균적이라 여겨지는 일반인의 센스가 간과하는 일상의 상황들 속에서도 극도로 명민한 유머, 시의적절한 재치, 풍자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어의 경우 'sense'는 형용사와 결합하여 하나의 단어처럼 통용되는 두 용례를 만들어 낸다. 그 하나는 'bon sens'로 영어로 번역하면 'good sense', 우리말로는 양식(良識)이다. 'bon', 다시 말해 'good'이라는 도덕적, 윤리적 '선(善)'의 개념을 'sense'에 결합시킨 것이다. '선'의 개념이 부가됨에 따라 'bon sens'는 한 시대와 사회를 지배하는 도덕적, 윤리적 통념에 비추어 '현명한 처신, 좋은 판단'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또 다른 하나는 'sens commun'으로 영어로 번역하면 'common sense', 우리말로는 상식이다. 일반인들이 한 시대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판단과 처신의 양태를 가리키는 단어다. 'sense'와 관련된 이 두 어사들은 분명 특정 시기의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관련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해 어떤 'sense'가 '좋은 good' 것인지, 어떤 'sense'가 '일반적인 common'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한 사회를 훈육하고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특정 시기의 한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울트라 센스'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양식, 상식을 내파(內破)하는 파격적 센스일 것이다. ■ 최봉림
■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SIPF) 2006 사무국 (갤러리카페 브레송)_SIPF 2006 Executive Office(Gallery Cafe Bresson) /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52-10 고려빌딩 B1 100-861 B1, Korea bldg. 52-10, Chingmu-ro 2ga, Chung-gu, Seoul, Korea / Tel. 02-2269-2613 Fax. 02-2269-2617 www.sipf.net
Vol.20060914f |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SIPF 2006-울트라 센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