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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906_수요일_06: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신관 2층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100일 사진의 피학적 기억, 10,000일 사진의 가학적 재연 ● 내겐 출생 후 100일을 축하하는 소위 백일사진이란 게 없다. 유년시절 동년배의 가정집 벽면과 그들이 보여준 모퉁이 낡은 앨범 첫 장에 차고앉은 흔하디흔한 그 백일사진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게도 출생 후 백일이라는 물리적 시점이 분명 존재했을 터인데. 이런 정황이 청소년기의 내게 진지한 불만으로 고민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상대적 박탈감, 내 부모의 자식에 대한 무관심과 무성의로의 추정까지 이어졌던 건 사실이다. 세대를 어디까지 잘라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출산 후 예정된 이벤트로 인식되는 이곳의 백일사진 촬영은 한동안 정형화된 틀거리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 하나 백일사진의 비윤리성에 관해 의문과 반성을 제기하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백일사진의 주인공은 남아(男兒)로 국한된다. 설령 여아의 백일 사진이 있다손 쳐도 비율 면에서 유의미한 수치를 확보하지 못한다. 과거의 낮은 의료수준과 유아사망 덕에 백일이라는 시간 단위는 그저 일정부분의 면역력 검증과 위험 고비를 넘기고 생존한 피붙이에 대한 기복적 성격이 강했으리라. 그러나 그 백일이라는 유의미성도 남아선호가 지대한 동아시아 여아에게까지 배려된 건 아니었다. 이 같은 백일사진의 편파성은 이 기념사진을 정형화의 굴레에 내동댕이쳤고 그것이 급기야 100일 남짓 된 전체 남아를 지시하는 동 아시아적 도상(icon)처럼 우리에겐 인지되었다. 백일사진 도상의 전형성은 다음과 같이 기술될 것이다. 직립 자체가 불가능한 아이에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준-가부좌 자세로 조악한 왕좌(王座)위에 앉혀 좌우대칭의 오브제 한편을 연출하는 것. 결과적으로 이런 포즈(들)는 식별조차 힘든 아이의 돌출한 남성기를 관자의 시야에 노출시키려는 속 보이는 제스처다. 100일 남짓의 아이란 자고로 얼굴로는 성을 구별할 수 없는 무성(無性)적 존재인지라 고작 번데기만한 성기를 화면 정중앙에 위치시키는 팔루스(pallus)적 프레이밍이다. 남근적 상상력 직설화법과 동 아시아 가족공동체의 기복신앙이 만난 결과물 속에 사내들의 유아기 한 순간을 반영구적으로 박제하는 절차가 백일사진을 바라보는 사회학이다. 그런고로 이 몰 취향 한 집단 기복신앙의 프레임 속에 내 유아기의 한 순간이 현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다행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판이다. 전형화 된 백일사진이 웅변하는 남아선호의 유형성이 오늘의 정서와 괴리되어서인지 혹은 철지난 미적 취향이라 간주되어서인지 이 유서 깊은 백일사진의 도상은 작금의 사진관과 젊은 부부 사이에서 더는 선호되지 않는 추세다. 그렇다고 백일사진 고유의 키치적 연출까지 포기된 건 아닌 듯하다. 여전히 벨벳 커튼과 유럽 풍경사진을 뒤 배경 삼아 아이를 천사처럼 차려 입힌, 모성애의 사행심은 변함이 없다. 다만 있는 듯 없는 한 그 작은 고추에 대한 열중만은 많은 부분 포기되고 있다. 참 다행스런 일이다. ● 여성 작가가 자신의 성정체성에 관한 자문을 위해 자신의 인체를 포함, 여체 일반으로 관심을 돌리는 사례는 여성주의 미술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되는 창작 태도다. 이에 비추어 김지숙의 방법은 동일한 주제의식에도 연구 대상을 타자(남성)의 신체에서 소구한다. 한국 사회의 보수성을 감안할 때, 그녀가 태어난 지역성(울산)을 전제할 때, 그녀의 어린 나이와 작품 주제 사이의 관계는 그래서 밀도가 높다. 지난해 아트스페이스 휴 에서 열린 첫 개인전 가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지는 한국 사회의 비대칭성에 관해 건장한 남성 나체를 매개로 추적한 시도였다면, 후속편 격에 해당하는 금번 관훈 갤러리 「지구적 인간에 관한 보고서」는 백일사진의 고색창연한 도상학을 빌려와 주제의 밀도를 높이려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리라. 이번 결과물은 백일사진의 도상에서 누락된 여아(女兒)인 작가 김지숙이 27여년의 세월을 지나서 되돌아본 동시대 남아(男兒)들의 백일사진 이후에 관한 보고서다. 촬영대상으로 선정된 성인 모델은 출산 후 일만(10,000)일 전후로 살아온 남성들이다. 김지숙이 이번 전시의 도상으로 빌려온 백일사진이 그녀에게는 피학적 기억일 밖에 없는 이유는 밝히기 힘든 유년기 경험 때문이다. 많은 이들의 유년기에는 사소하지만 암시적인 장난이나 성적 판타지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사춘기가 되어서야 그런 행위들이 사회가 검열하는 비윤리적 범주의 것임을 깨닫고 또 얼마나 많이들 부끄러워했던가. 작가에게도 비슷한 체험이 있었다는데 그 일은 자신에서 비롯된 게 아닌 지인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남성은 기피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백일사진 일반으로 대변되는 남성성은 김지숙에게는 부인되거나 기피되어야 할 도상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피학적 기억의 잔상이 남아의 백일 사진이다. 작가가 남성을 대등한 위치의 상대로 이해하고 수용하게 된 건 대학 진학 이후라고 진술한다. 강한 남성성 신화의 본질이 실은 그들에게 '타고난 것처럼' 교육되고 있는 현실은 그녀의 첫 번째 전시가 다루는 서사였다. 한편 이번 전시는 그 강요된 기억을 이미지로 각인하는 사회적 관례 중 하나인 백일사진의 기억을 오늘의 현실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재구성의 연출가는 백일사진에서 누락된 성인 여아(女兒) 김지숙이다.
출품된 모든 작품은 핫셀 6*6 포맷 정사각형 프레임에 잡혀있는데 그나마 네 모퉁이마저 도려내어 원형 프레임 속으로 시야를 몰아넣는 구조다. 말하자면 관자의 시선을 다 큰 성인 남성의 어설픈 누드 가부좌에 주목시키려는 의도된 형식 구성을 취한 것이다. 흔히 키홀(keyhole)의 관음 욕망을 검토할 곧잘 인용되는 앵그르의 「터키 탕」의 원형 프레임이 남성 관자의 몰래보기와 대상화 된 여성 인체 사이의 관계도를 폭로하지만, 김지숙의 원형 프레임은 대상이 된 남성의 시선과 관자의 시선이 일치하면서 몰래보기는 고사하고 누가 누구를 관찰하는 구조인지 종래의 바라보기 위상학 부터 의심하게 만든다. 이 일련의 성인 백일사진 연작의 또 다른 키워드는 가짜 남성기(fake penis)다. 건장한 성인 남성의 영근 남성기는 죄다 작가가 직접 주조한 유아의 맥없는 고추로 대체되었다. 결국 생식기를 달고는 있는 셈이지만, 성인의 성적 능력을 유아 수준으로 강등시킨 연출력이고 보면 일종의 남근 거세의 우회적 연출이다. 대등한 성의 파트너로서의 남성(이건 작가의 표현이다)보다 아직은 기피대상으로서의 남성(이 역시 작가의 표현)이 김지숙 머리속에서 우세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 큰 남성의 옷을 벗겨 생후 백일 전후의 어떤 순간으로 되돌리고 무력한 생식기를 작가가 다시 달아주고 그 결과를 반영구적으로 기록한 것이 이번 기획안의 총론이다. 그래서 모든 출품작은 모델들과 포즈만 약간씩 다를 뿐 큰 시각적 편차를 만들지 못한다. 말하자면 가학적으로 재 가공된 백일사진(만일(萬日)사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의 지루한 반복이다. 상이한 남성 모델에게 가짜 성기를 달아주는 반복 행위는 남성에 대한 작가의 피학적 기억을 대변하는 봉건적 백일사진의 이데올로기를 작가의 뇌리에서 지워나가는 의식(儀式)이다. 개별 작품들 간 차이점보다 가공된 백일사진들이 한데 모여 큰 함성을 내지르는 전략인데, 울림이 크지 않게 들리는 원인은 그녀의 피학적 유년 기억을 관자인 우리가 사전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보기 난처한 남성 누드의 원색 찬란한 열거 정도로 오인될 위험을 그녀의 작품은 안고 있다. 모든 진지한 사적 담화는 원인이 은폐될 경우 그저 사소하고 유치해 보이는 법이다. 무한 반복 이미지의 배열의 속사정이 작가 개인 체험에서 동기유발된 것이지만 전시의 주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에 대한 일반화 된 알레고리다. 결국 주제의 일반화로 진입하는 사적인 열쇠는 작품들은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작가가 쥐고 있는데, 궁금하시거든 김지숙 에게 직접 묻길 바란다. ■ 반이정
Vol.20060906c | 김지숙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