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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830_수요일_06: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www.noamgallery.com
'메멘토-모리'(memento-mori)의 트라우마 혹은 공포의 쾌락 ● 우리는 쾌락에 무지한 것처럼 공포에도 무지하다. 내가 감히 고백하지 못하는 공포, 그것은 예술이다. (셀린, 『밤의 끝으로의 여행』) 예술에 있어서, 인간 조건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은 더할 나위 없는 효력을 갖춘 소재다. 이것을 공포 혹은 불안이라는 말로 치환해도 크게 의미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정작 공포와 불안이 외부의 타자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타자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즉 공포는 인간 내면의 타자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프로이트적으로는 '두려운 낯설음'(Uncanny)의 감정이며, 라캉적으로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의 귀환'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언캐니란 낯선 공포인데, 사실은 억압되었던 낯익은 무의식이 낯선 모습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포는 내 안의 낯선 타자 혹은 이방인과의 피할 수 없는 대면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 공포의 주체인 것이다. 무력한 공포 속에서 억압된 얼굴 없는 것들이 삶 속으로 급작스럽게 돌아온 것, 그것은 바로 우리 안의 타자인 죽음이며, 소외이고, 전쟁이며, 폭력이고, 횡포이며, 자만이고, 이기심이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으로서의 공포와 불안은 어쩌면 어떤 대상(타자)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 혹은 절대 알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기도 한다. 예컨대 인간이 직접 자신의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는 사실, 죽음에 대한 무수한 이론 등은 오히려 죽음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느끼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기보다는 우리가 타자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선 안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편이 세상과 평화롭게 타협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인간이 더 이상 잃을게 없다는 자각은 인간을 더 이상 불안이나 공포에 떨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우리는 저당 잡힌 죽음을 애써 초연한 척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혐오하거나, 무시하거나, 유보하면서 삶을 지탱할 것이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우회하여 삶을 연장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무엇인가가 죽지 않는다면, 사라지지 않는다면 예술은 또 얼마나 무용지물인가? 예술은 모든 사라지거나 스러지는 존재들에 대한 집착 혹은 열망 그 자체가 아닌가?
차갑거나 혹은 숭고하거나 ● 오새미가 그려내는 공포와 욕망은 무엇이며, 그녀는 왜 그것에 천착하는가? 오새미의 작업을 보면서, 영화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의 『히든 Hidden』의 첫 장면(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전통적인 도입부의 상투성을 역이용한 첫 장면은, 롱테이크와 약간의 슬로우모션으로, 아무 일도 없는 듯 고요한, 가느다란 바람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유럽 중산층의 한 집 앞을 묘사하고 있다. 섬뜩하리 만치 적요한 골목의 풍경은 이미지의 이미지, 시선과 시선의 교차, 응시로서의 베일이 작용하는 듯 무언지 석연치 않은 공포를 환기한다. 관객은 비디오테이프의 노이즈가 전체 스크린을 뒤덮을 때, 집 앞 골목 풍경인줄 알았던 장면이 비디오테이프의 풍경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인공 부부는 이 '불가사의한 시선'의 정체에 대해 물리적인 탐사를 감행한다. 그러나 정작 그 정체는 갑작스럽게 남자 주인공의 유년시절 억압된 무의식이 낯선 모습으로 귀환한 것이었다. 바로 죄의식과 불안과 공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따라서 명민한 관객이라면 공포의 대상이 외부의 타자가 아닌, 자아가 만들어낸 무의식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리게 된다. 물론 오새미의 작업은 하네케와 표면적인 유사성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네케가 초기작부터 최근의 『히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죄의식과 공포를 까발린다는 점에서 그녀가 포착하는 세계 역시 일정 부분 동질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 오새미가 그려내는 공포와 불안이 하네케의 그것처럼, 억압된 것이 되돌아온다는, 낯익은 것이 낯설게 돌아온다는 측면에서, 언캐니의 감정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동일선상에서 논의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낯선 것 같지만 사실은 낯익은 공포는 어떤 식으로든 익숙한 현실에 흠집을 내며, 현실과 갈등을 일으킨다. 바로 이런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관심이 오새미가 그려내는 실존적 회화인 것이다.
시각적 트라우마(trauma) ● 오새미의 작업은 군악대, 동물, 손, 지하철 등과 같은 몇 가지의 대표적인 모티프로 드러난다. 특히 주목되는 모티프는 군악대의 인간군상이다.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사진 이미지에서 차용했다는 '북 치는 사람' 들은 우연히도 현대인의 초상과 닮아 있다. 똑같은 의복을 갖춰 입고, 선두에서 열심히 북을 두드리며, 음률과 박자에 맞추어 전진하고 있는, 후진이 허용되지 않는, 낙오자가 없는, 눈이 없는 이들의 모습은 왠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획일적 사고, 단조로운 일상, 유사한 욕망을 체현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지워진 눈'은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존재, 존재감 없는 존재를 묘사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로서의 거세공포 -그리스인들에게는 눈을 뽑는다는 것, 즉 실명은 곧 거세를 의미하며, 눈과 성기의 동일성이라는 메커니즘은 정신분석학적 사유의 핵심을 이룬다― 를 환기한다. 더불어 죽은 말의 사진은 인간 존재조건의 시각적 트라우마를 환기시킨다. 초지에 방목된 말조차 결국 경계의 울타리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이 작품은 인간이 곧 '죽음을 향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상상적 죽음(실명, 거세)과 상징적 죽음(말로 상징화된 인간의 죽음)이 교차되는 인간조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총알받이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드러내기 위한 가미가제 특공대를 그린 작품이라든지, 권력자와 지배자와 우월자의 손을 묘사함으로써 인간사회의 소외와 방관과 무관심을 표출해낸 작품이라든지, 가장 치열한 삶충동과 죽음충동이 대립하는 욕망의 극적 공간으로서의 지하철과 에스컬레이터를 묘사한 작품들도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극명한 대립과 모순을 통해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바는, 바로 라캉적 실재계에 대한 만남이자 자각이다. 실재계란 무엇인가? 삶충동과 죽음충동이 만나는 곳, 시선과 응시가 교차하는 곳, 한편으로는 죽음의 보편적인 베일이 견고한 철망임을 알려는 동시에 삶이 이미 그 죽음의 철망을 찢고서 울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차원은 아닐까?
색채의 과잉, 풍크툼의 아우라 ● 오새미의 작품은 풍크툼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풍크툼은 응시자의 내재적 시각에 의해 감지되는 것으로, 객관적 영역 밖에 무언가 분명히 존재하는 '의미의 과잉 또는 결핍'을 의미한다. 보통, 그녀의 작품에서 소름끼치도록 정교한 털을 가진 쥐, 빨간 손톱, 에스컬레이터의 뒤돌아보는 여자, 북치는 남자의 입술 등이 풍크툼으로 각인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오새미 작품의 풍크툼적인 요소는 색채다. 오새미는 치밀한 계산에 의해 제한된 색채와 과장된 대립구도를 사용한다. 작품의 색채와 구도와 같은 형식은 그녀가 드러내고자하는 내용과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한 몸이듯이 빨강과 검정 또한 극명한 대비로 한 화면을 아우르고 있다. 바로 이런 빨강과 검정 자체가 트라우마이며 그것은 곧 풍크툼이 된다. 그것은 할 포스터(Hal Poster)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루디 삼촌 Uncle Ruddi」과 같은 일련의 흐린 사진들을 - 더욱 정확하게는 색의 겹침을 통해 색채가 어긋나 보이게 한다거나, 색을 씻어내 바래게 하는 것 같은 - 실재적인 것과의 어긋난 만남에 대한 시각적 등가물로서 풍크툼으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을 가진다. 그러니까 리히터에게 있어 풍크툼이 세부보다는 오히려 이미지 전체를 흐릿하게 한 것에 존재하는 것처럼, 오새미에게는 과도한 색채의 대비적 사용이 풍크툼의 아우라를 환기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더불어 푸른색이 주조를 이루는 작품이 있다. 칸딘스키의 「점·선·면」에 따르면, 푸른색은 죽음의 색이며 무거운 울림을 가진 색이다. 오새미에게 푸른색은 도저히 경험할 수 없고, 그 근원을 알 수도 없는, 탈코드적인 것으로서 풍크툼이다. 삶은 죽음을 덮는 베일이고, 죽음은 삶을 덮고 있는 베일이지만, 양쪽에 구멍이 뚫려 있어 그 구멍을 통해 서로가 흘러 나와 상대방에게 흘러 들어가는 듯 한 상황을 연결해주는 것이 푸른색인 것이다. 따라서 그녀 작품에서 푸른색을 통한 시각적 이미지는 죽음과 함께 죽음의 배후에 은폐된 근원적인 삶을 드러내는, 이른바 삶과 죽음이 오버랩 되는 공간으로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판 메멘토모리 ● 오새미의 주요작품들은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 혹은 '메멘토-모리(memento-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의 인간 삶의 부조리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공포를 예술로 치환하는 오새미의 실존적 선택이었다. 그녀는 공포스러운 것을 예술적으로 통제하는 경우, 고상한 것이 되는 것은 물론 불합리의 구역질로부터 인간을 예술적으로 해방하게 하는 등 긍정의 힘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새미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완벽하게 표현할 줄 알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와 완벽하게 상응하는 형식을 가지고 작업할 줄 아는 상당히 흥미로운 작가다. 그녀는 감정을 자극하는 동시에 그것을 억제하기 위한 그녀다운 방식을 고안해냈는데, 이른바 뜨거운 공포를 아주 차갑게, 비유하자면 잔혹극을 미니멀적 리얼리즘으로 묘사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새미의 이런 절제와 자제는 다소 작품을 상투적이며 인위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러니까 그녀의 지적 냉정함이 작품의 비의적 측면을 놓치는 요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녀의 공포가 피와 살의 냄새가 베인 체험적 공포가 아니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박제된 공포'에 가까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존경하는 화가로 등재한 베이컨처럼 살의 외침을 그리면서도 고도의 사유를 매개할 줄 아는 능력이 그녀에게 절실한 시점은 아닐까? 더불어 나는 오새미가 적어도 하네케가 지적한대로 "사회의 상처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영원히 소금을 발라대는 존재로서의 예술가"로 성장할 것을 예감한다. ■ 유경희
Vol.20060831a | 오새미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