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tings And Paper Collages-in between color

탐리 회화展   2006_0816 ▶ 2006_0910

탐리_arcanum series_리넨에 페이퍼 콜라쥬_40×37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40322a | 탐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081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 마노 서울 종로구 가회동 1-71번지 Tel. 02_741_6030

Paintings And Paper Collages-In Between Color키워드는 칼라 ● 작가 탐리가 지난 2년간 뉴욕에서 완성시킨 40여개의 페인팅과 콜라쥬 작품들을 가지고 한국에서 다시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유일무이한 그만의 독특한 페이퍼 콜라쥬와 그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페인팅들이 출품되었다. 그만의 트레이드마크인 유기적 형태의 이미지는 작업이 진행되는 순간의 장소성과 시간성의 에너지를 담고 있으며 이는 자연스러운 웨이브의 형태로 도출된다. 캔버스 위로 바짝 밀착된, 다색으로 중첩시켜 얇게 입혀진 오일은 둔탁하지 않고 투영하게 비쳐지며, 야리한 칼라들은 자유로운 선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뻗어나간다. 평소 대가의 페인팅을 흠모하여 왔던 작가의 관심사는 이번 전시의 부제에서 명시한 바와 같이 '칼라'라는 한 가지 요소로 집약된다. "제대로 된 오일페인팅에서 보이는 표면의 깊이는 언어로 묘사가 불가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작가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 오일페인팅만이 가지고 있는 고집스러움과 순수함에 대한 탐리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일 지경이다. ● 붓질을 위해 칼질을 한다-페이퍼 콜라쥬 ●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퍼 콜라쥬를 꾸준하게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흩트러진 정신을 가다듬고 페인팅 작업을 하기위한 마음의 자세를 잡아주기 때문이다. 이는 몇 년 전 정교하게 종이를 잘라 만든 12개의 콜라쥬 시리즈를 발표했을 시절 이미 명시한 바와 같이 심상을 가다듬고 명상의 상태에서 의식과 무의식 잠재 의식등 의식의 차원을 나누어 그의 마음 깊숙이 떠돌아다니는 이미지들을 표면위로 떠올리는 수단으로서, 즉 페인팅을 위한 밑작업 이었으며 몸과 마음의 훈련이었다. 따라서 그는 페이퍼 콜라쥬를 할 때와 오일페인팅을 할 때가 다르지 않고 똑같다고 말한다. 얼핏보아 오일페인팅은 쉬워 보이고 종이 콜라쥬는 어렵고 힘들었겠다고 생각하는 관객에게는 그야말로 아리송하게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간혹 생각이 막혔을 때, 혹은 작업 환경이 바뀌었을때 주변의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우선 색종이부터 잘라나가는 탐리의 작업 습관은 이미 오래되었다.

탐리_arcanum series 18_리넨에 페이퍼 콜라쥬_47×31cm_2006
탐리_페이퍼 콜라쥬 작품_2006

칼라의 묘약-오일페인팅 ● 탐리는 페인팅을 할 때 오일만 쓴다. 그것도 한번 쓰고 나서는 중독이 되버린 특정 브렌드만 쓴다. 그 이유는 오일페인트가 가지고 있는 재질과 색상, 보존능력 등등 그 모든 특징들을 열렬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콜라쥬를 통한 훈련으로 인해 집약된 마음의 상태는 그대로 캔버스 위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작가에게 중요한 환경은 작업실의 분위기이다. 작가가 현재 쓰고 있는 작업실은 맨하탄 이스트 빌리지에 위치한 1894년에 지어진 초등학교 건물로 4층의 좁은 통로를 지나 맨 끝 코너에 위치한 넓찍한 교실이다. 처음 그곳을 들어섰을 때 100년도 넘은 그 장소에서 당시 공간의 주인이였을 초등학생들이 고사리 손으로 만들어 논 자그마한 흔적들을 찾는 재미는 색다른 즐거움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넓찍한 창문은 기억자 모양으로 뻥 뚫어져있고 하늘과 주변 빌딩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러한 환경에서 그가 흡수하는 에너지는 작업으로 고스란히 투영된다. 그러고 보니 색깔만 다른 40센티 남짓한 정사각형의 작은 페인팅이 스무개 붙어있는 시리즈 작업은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하지만 누구하나 같지 않고 모두 나름의 개성을 지닌 귀여운 어린아이들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 ● 초월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 지난번 전시에서 보여주었던 페인팅들의 중첩된 색과 선들은 이번 작품에선 모두 제거되었다. 색의 겹겹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었던 예전의 페인팅과는 달리 중층의 이미지들은 심플한 몇 개의 라인으로 모아지고 다채로왔던 색들은 단순한 이미지 위에 다회 쌓임으로 해서 칼라가 농후해지고 깊어졌다. 표면으로 떠오른 이미지들은 안에서 배어나오는 존재들을 내재하고 그러한 존재를 감추기 위한 붓질은 화면을 단순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신세계를 다루던 내용도 페인팅 자체로 더 집중이 된다. 미니멀해진 그의 작품들은 회화라는 영역내에서 시대를 초월하고, 내재하는 메시지를 초월하고, 그가 지금껏 살아왔던 그리고 앞으로 살아나가야 할 삶의 이유를 초월하려는 그만의 몸짓으로 보인다. ■ 오숙진

탐리_brown orange_캔버스에 유채_39×39cm_2006
탐리_red yellow_캔버스에 유채_56×392cm_2006

탐리의 틈새의 색(IN-BETWEEN COLOR) ● 탐리(Tom Lee)는 대단히 "형식적"인 그림을 그린다. 이미 귀신이 되어버린 그린버거(Clement Greenberg)의 "형식주의 미술이론(formalism)"이 탐리의 작품을 통해 되살아난 듯하게 보일 정도다. 선과면, 색채, 공간, 명암 등이 엮어내는 균형과 질서가 맥박처럼 꿈틀거리며 리듬감을 주는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마치 과거 "후기 회화적 추상파(Post Painterly Abstraction)"의 그림들처럼 입체를 지향하는 중앙에 대한 집중이 해체되어 색면을 통해서 회화적 공간은 확산된다. 공간 자체가 주는 일루젼은 제거되고 공간이 해체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자체에도 어떠한 중력도 느껴지지 않고 상하 구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회화적 추상파와 그린버거가 옹호했던 순수한 평면형식으로서 회화는 탐리의 작품에서는 포기 되어서 물체로서 그림과 형상으로서 그림이 지니는 이원성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 리드미컬하게 파동을 치는 듯한 곡선과 곡선 사이 메어진 면과 그 바깥의 면 사이가 선명하게 분할 되어서 확산되던 평면이 돌연 한정되는 듯 보이고, 반면에 선들은 리듬이 주는 효과 때문에 살아 움직이듯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평면을 이루는 각종 요소들이 리듬 때문에 생명을 얻고 회화적 공간은 입체화되면서 유기체적인 생물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극단적으로 단순화 된 형식성이 빚어내는 감각적 만족감은 대체로 유지되면서 의식과 감정은 색채의 깊이와 그 덧칠을 통하여 형식의 밖으로 나아간다. 뒤샹이 말한 바와 같이 회화가 시각적, 망막적 한계를 뛰어넘어 "인식의 욕망"으로의 지향을 추구하는 것이다. 형태가 억제되고 내용이 스며들어 개념이 회화의 대상으로 고안된다. ● 탐리의 이번 전시, "틈새에 있는 색(IN-BETWEEN COLOR)"은 색으로 어떤 초월적 공간을 표현하기 위한 그의 시각적 모험의 결과다. 탐리에게 틈은 사물이 놓여지는 물리적 장소로서 공간이라기보다는 공간에 대한 메타포다. 선과 선 사이에 면이 있고, 면과 면 사이에 선이 있다. 면의 자리에서 선은 구분이자 경계요, 선의 자리에서 면은 분할된 공간이고 내면이다. 그 공간 또는 내면은 특정한 채색과 색의 깊이, 그리고 덧칠 등으로 나타난다. ● 탐리의 회화적 공간은 의식과 무의식과 그 경계에 대한 메타포다. 경계란 의식과 무의식을 나누는 선이 아니고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관계다. 흔히 생각하듯 무의식은 실제로 존재하는 범주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 내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가설이나 논리적 범주다. 무의식은 의식이 아닌 것의 총체가 아니며, 의식의 맥락이나 배경, 또는 심층구조도 아니다. 무의식은 의식을 의식하는 방법으로 의식 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탐리는 무의식을 의식과의 관계에서 의식의 형식화를 통해서 의식의 외부에 드러내려고 하였다. 회화는 이 형식화의 결과물이다. 동시에 탐리는 종이 콜라주에서 반대의 궤적을 밟는다. 무의식을 형식화해서 의식을 드러낸다. 이는 마치 현실에서 명상이나 참선을 행할 때, 의식의 끈을 무의식의 압박으로 풀어버리려고 하면, 그 풀어진 의식들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의식을 집중할 때 나타나는 잡념처럼 도처에서 불쑥 솟아나는 것과 같다. 이 솟아나는 의식이야말로 무의식의 작동하는 원리가 되고 무의식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탐리_in between_캔버스에 유채_27.5×25cm_2006
탐리_오일페인팅 소품_2006
탐리_오일페인팅 소품_2006
탐리_갤러리 마노 1층_2006

탐리의 회화가 의식을 통한 무의식에 대한 탐구라면, 콜라주는 무의식의 부재를 통한 무의식의 탐구다. 촘촘하게 붙은 색색 종이 조각의 밀도 때문에 공간의 결여나 부재가 두드러진다. 이 부재나 결여 때문에 종이 조각들의 운동성과 방향성이 더 선명해진다. 여기서 무의식은 수학에서 제로(0)처럼 그 자신은 무이면서 의식의 체계성과 중심성을 성립시키는 기능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부재하는 원인이다. 형태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작용으로 숨겨진 것 속에서 드러나며, 드러나는 순간 은폐되는,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초월적 의식이 무의식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의식은 초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담론의 부분이다. 라캉의 말대로 이는 "타자의 담론"으로 "지향적으로 내재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으로 초월"적인 것이다. ● 탐리는 회화와 콜라주를 통해서 대칭적으로 의식과 무의식을 상호 형식화 시켜서 둘의 관계를 이 전시에서 재현한다. 그런데 상호 형식화 과정에서 회화와 콜라주에서 어떤 불연속적 파열이 느껴진다. 콜라주에서 숨어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무의식이 회화에서는 형식화된 면의 색으로 나타나는데, 그 면의 안과 밖의 경계가 지나치게 분명해서 폐쇄적이고 개인적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의식과 무의식이 구분되는 지점이 너무 평면적으로 파악되어 초월론적 환원이 가능할 여지를 배제시켜 버린 것이다. 형식화된 무의식이 그 자체로 완결되어 초월적 계기가 상실된 것이다. 무의식을 예술의 대상으로 되게 하는 형식이 무엇인지, 그 근거를 끊임없이 보려는 의지가 희미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타자의 담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아론(solipsism)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 예술이라는 것은 일상은 물론 도덕적으로나 인식적인 판단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주관도 객관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형식화되고 규범화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화 자체가 예술을 그것이 생겨난 사회나 역사에서 소외시키고 분리시킨 작위적이고 의지적인 결과였다는 사실이 망각되고, 그 자체가 구조와 맥락에서 자립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기가 쉽다. 그럴 경우에 예술이 예술이게끔 하는 원론의 장으로 되돌려 놓는 초월론적인 환원의 계기가 은폐되고, 형식은 그 기원과 역사를 망각한다. 원인과 결과는 전도되고 순수하게 내용이 없는 형식이 자기 지시적 폐쇄성에 갇힌다.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 건축을 전공했던 탐리에게 예술은 유토피아적 세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남에게 보일 수 없는, 어떤 그림도 완성된 적이 없는 그리기 위한 그림을 그렸다. 그런 자폐적인 그림 그리기의 궤도를 벗어나게 한 외부의 충격은 9/11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현장을 이스트 리버 건너 부르클린에서 바라보면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정신적 외상을 받았다. 그는 그 트라우마를 종이 콜라주를 통해서 벗어났다. 명상이나 참선처럼 콜라주 작업은 치유의 과정이었다. 표면을 빈틈없이 나란히 중첩되지 않게 종이 조각으로 붙여나가면서 트라우마가 새겨진 무의식을 불러내어서 지워나갔던 것이다. 그 치유의 과정에서 탐리는 의식과 그 의식에 딴지를 걸면서 파열시키는 원인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강력한 예술적 의지로 예술적 대상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승화된 그 무엇이 굳건한 토대 위에서 새로운 미술적 가능성을 여는 돌파구가 될 것인가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 신지웅

Vol.20060815a | 탐리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