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형식물

이희명展 / LEEHEEMYOUNG / 李希明 / painting.installation   2006_0719 ▶ 2006_0725

이희명_변형식물 No.013_혼합재료, 조화, 화분_50×15×15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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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명 인스타그램_@heemyoung_lee

초대일시 / 2006_0719_수요일_05:00pm

창 갤러리 기획공모 당선작

창 갤러리 CHANG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0)2.732.5556 www.changgallery.net

환상적 리얼리즘, 그로테스크의 미학 ● 이희명이 '변형식물' 연작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그녀의 내적 세계의 예민한 촉수들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얼어서 말라비틀어진 식물과의 조우를 통해서일 것이다. 화분 속에 갇혀 관심의 대상의 되지 못하는 힘없는 식물, 가지가 멋대로 잘려나간 흉물의 가로수, 철지난 크리스마스 장식 전구를 온 몸에 감고 있는 나무 등은 작가 자신과 동일시의 투사가 일어난 대상들이다. 이는 작가 자신의 감정을 자기의 내부로부터 대상에 투사하되, 유비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독특한 심적 활동이 미학적으로는 감정이입(Einfuhlung)인데, 예술창작의 근본적 충동에 작용하여 예술의욕(Kunstwollen)을 고취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희명_변형식물 No.001(기생식물)_혼합재료, 조화_10×5×7cm_2005
이희명_변형식물 No.001(기생식물)_혼합재료, 조화, 화분_20×10×10cm_2005

변형식물, 이빨 달린 자궁 ● 그녀의 대표적 작품인 '변형식물' 연작은 초현실주의적 데페이즈망으로 제작된다. 그 기법들은 달리와 마그리트와 이브 탕기 등의 그림에 나타나는 환영적(혹은 마술적) 리얼리즘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사물들의 긴밀한 연계를 환기시키며 언어와 텍스트의 문제를 다루는 마그리트보다는, 기민하고 광신적인 달리의 편집증적 비판적 방법(paranoiac-critical method)에 가까워 보인다. 자아가 외계의 이미지와 현실을 자기 자신의 내적 필요와 욕망에 일치하도록 재구성해내는 착란 상태의 기술에 가깝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세부를 주의 깊고 정확하게 묘사하지만, 이는 외부적인 현실이 아니라 공상과 환상의 영역을 그린 것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 '변형식물' 연작은 데페이즈망이라는 기법적 일관성을 지니지만 형식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하나는 식물에 육체성 혹은 동물성이 부여되는 작업군과, 다른 하나는 인간 혹은 동물의 육체와 식물성이 접맥되는 작업군이 그것이다. 편의상 식물의 육체화로 분류되는 첫 번째의 '변형식물' 연작은 주지하듯 동일시와 투사의 메커니즘을 통해 만들어진 오브제이다. 일종의 분신의 모티프에 해당되는 이 오브제들은 뾰족하게 날이 서 있거나 무엇인가를 삼킬 듯이 공격적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어떤 식으로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래서인지 오브제들은 매우 성적인 이미지처럼 보이는데, 예컨대 데리다가 거세공포를 환기시키는 여성성(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용했던 '이빨 달린 자궁(질)'을 연상시킨다. 더군다나 작가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수많은 눈들이 모여 남성성기 모양으로 표현된다거나, 식물 속에서 튀어나온 집게발이 눈알을 삼키려고 하는 모습 등은 결국 눈과 성기가 동일시되었던 오이디푸스 신화의 거세 콤플렉스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 두 번째 '변형식물' 연작은, 역으로 육체에서 식물이 자라나는 것으로 '기생식물'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인간의 신체 혹은 박제된 동물의 몸에서 자라나는 식물들은 앞선 식물의 육체화보다 더욱 섬뜩한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준다. 절단된 손과 떨어져 나온 팔, 잘려진 머리 등 신체에서 파편화된 부분대상들은 신체 없는 기관으로서 '두려운 낯설음'이라고 불리는 '언캐니'(uncanny, das Unheimliche)의 감정을 환기한다. 원래 언캐니는 억압되었던 무의식의 귀환 혹은 낯익은 것이 낯선 것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지만, '기생식물'의 경우는 동물과 식물의 낯선 결합이라든지, 생명이 없는 것이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충분히 언캐니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물론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초현실주의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언캐니 혹은 언캐니의 풍크툼으로 설명될 수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변형식물' 연작은 처음에는 강인한 여성성의 표명이라는 모토를 충실히 추구하다가, 다음 단계에 오면 환경파괴와 유전자 복제 등 암울한 미래사회에 대한 묵시록적 경고의 메시지로 의미의 진화가 일어난다.

이희명_기생식물의 침투_콜라쥬, 캔버스에 과슈, 아크릴_65×53cm_2005
이희명_변형식물 No.024_혼합재료, 조화, 화분_30×10×10cm_2005

환상과 욕망의 변증법 ● 이희명은 자신의 내면 속에 관념적으로 존재하던 수동적 여성성의 식물을 즉발적이고 능동적인, 그리하여 식물도 동물도 아닌 양성성의 돌연변이의 생물로 변환시킨다. 이는 동일시의 투사를 통한 무의식적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의 산물들이다. 환상은 낡은 경험을 낯설게 만듦으로서 자주 그로테스크와 연결되며, 자연스럽게 과장이나 왜곡을 함축한다. 예술에서 환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의적이고 비현존적인 사물들과 교유하는, 변덕스러운 공상의 실행에서 기인한다. ● 그렇다면 환상을 통해 드러난 작가의 욕망은 무엇이며, 그녀는 욕망을 어떻게 가시화하고 있는가? 예술가에게 있어 현실과 이상 혹은 실재와 환상의 간극이 클수록, 그 괴리감의 진폭에서 환상과 몽상이 자라난다. 그녀 역시 현실세계에서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와 가부장적 체계로부터 부여된 과중한 스트레스에 상처와 자극을 받은 사람이다. 예컨대, 그녀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 남자가 아닌 것 등 페니스를 가지지 못한 존재 혹은 결핍의 존재로서 열등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 속에서 자라났던 것이다. 이런 가족적ㆍ사회적 갈등은 어쩌면 타인의 욕망을 욕망 할 수밖에 없는 자아를 직시하게 했을 것이고,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들었을 것이며,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하는 경이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남성에게조차 결핍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팰러스'를 가진 존재로서의 막강한 카리스마의 여성 자신을 꿈꾸어왔을 것이다. ● 이처럼 환상이 현실세계와는 반대되는 소망 충족으로 가득 찬 내적 세계, 상상의 세계를 의미한다면, 환상은 욕망의 장면화이자 무대화에 다름 아니다. 이때 환상은 순간적으로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듯 보이지만, 욕망 그 자체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므로,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은 지속적으로 몽상과 환상을 움직이는 원천이 된다. 오히려 그 욕망들은 이 세계를 친숙하고 편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면서 이 세계에 부재하는 은밀한 영역을 지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재편성되고 탈위치화된 대안적 세계의 창조이다. 이로써 그녀의 작품의 환상성은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게 된다. 예컨대, 카프카의『변신』 속 주인공 그레고리가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몸을 보면서 놀라지 않듯이, 그 기괴한 사건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음으로 인해 환상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듯이, 그녀가 구성한 환상의 세계는 현실성을 부여받는다.

이희명_변형식물_혼합재료, 조화, 화분_47×43×45cm_2005
이희명_변형식물 No.038_혼합재료, 조화, 화분_60×20×20cm_2006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 이희명의 작업은 익숙한 우리의 감각을 뒤집고, 관습을 거부하며, 실재의 세계를 시험한다. 이런 그녀의 작품을 대하는 관자의 시선에는 불안과 공포와 혐오가 공존하는 한편, 엽기와 우스꽝스러움, 풍자와 같은 상반되는 반응들의 충돌이 상존한다. 그런 측면에서 그로테스크 미학이 성립한다고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전복성과 풍자성이라는 정치적 함의가 중요한 것이 그로테스크 예술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쨌거나 이질적 사물의 기발한 연계를 통한 시각적 충격을 가시화한 작품들은 관자를 놀라게 하지만, 관자로 하여금 사유와 성찰을 이끌어내기에는 어딘지 좀 허약하다. 그러니까 진정 그녀의 작품이 기존 가치체계를 파괴하고, 지배질서에 대한 풍자를 표상하는 차원까지 확산되었는지, 그리하여 미학적 쾌를 담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초현실적 발상은 기발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낯선 사물들의 만남조차 우리에게는 식상한 것일지 모른다. 다시 말해 사물의 이질적 만남의 개연성은 어쩌면 확연하고 예측가능하다는 측면에서, 풍부한 시적 개념과 역동적인 상상력의 차원에 대한 정교한 미학적 성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이와 더불어 조형성의 문제 또한 숙고해보아야 한다. 개념과 사유가 중시되는 현대미술에서는 재료를 잘 가공하고 능숙하게 취급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다. 개념적 발상이 우선시되는 그녀의 작품에서 재료의 조악함과 미흡한 마무리는 의도하지 않은 키치적 조형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취약성을 보여준다. 예컨대 레디메이드를 비롯한 기성의 오브제와 작가 스스로 제작한 오브제가 공존할 경우 둘의 표면적 차이를 상쇄할 만큼 정밀한 디테일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인 고민들이 해결될 때, 내용적 함축성과 더불어 중층적 의미의 두께라든가 상징적 다의성과 같은 심도 또한 점진적으로 굳건해질 것이다. 이희명은 다재다능의 소유자다. 나는 이희명이 앞으로 자신만의 미적 자의식에 근간한 명석함을 아낌없이 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보들레르와 마찬가지로 마그리트가 그랬던 것처럼. ■ 유경희

Vol.20060719a | 이희명展 / LEEHEEMYOUNG / 李希明 / paint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