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백 속의 산수와 자연 속의 산수

구모경展 / GUMOKYOUNG / 具慕慶 / painting   2006_0705 ▶ 2006_0711

구모경_山水-Shopping_장지에 수묵_130.2×162.2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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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경 인스타그램_@gu_mokyoung

초대일시_2006_0705_수요일_06:00pm

청년작가조망전 우수작가초대전

갤러리 올 서울 종로구 안국동 1번지 Tel. 02_720_0054

물화(物化)된 현대 도시인 ●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 현대인들은 그들이 태어난 민족이나 민족의 역사보다는, 그래서 그들의 유전 소인보다는 전 세계를 트랜드화하고 있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종교도 우리 종교나 토착화된 종교보다 서구의 종교에 더 관심이 많다. 그래서 인간은 서양의 성경의 창세기의 말씀대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고, 서양의 자본주의에 의해 개인 및 사회, 국가의 자본력에 의해 그 가치를 평가받기도 한다. ● 도시에는 인간을 위주로 한 인공품들이 넘쳐난다. 자연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고, 누구나 고급품을 갖고 싶어하고, 자신도 일종의 고급품이 되려고 한다. 초, 중, 고, 대학교는 물론이고 주거지역도 이에 따르고 있다. 인간이 가치관을 갖고 그 가치를 펼치는 사회가 아니라, 그 쓰임새에 따라 물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궁극적인 가치는 안중에 없는 듯하고, 편한 것, 재화적(財貨的) 가치만 찾게 되었다. 이제, 평생 추구해야 할 어떤 궁극적인 가치를 찾는다는 것도 볼 수 없게 된 듯하다. ● 구모경의 이번 전시 아이디어는 이러한 세상보기에서 나왔다. 그녀는, 백화점이라는 거대한 자본시장에서 누구라 할 것 없이 쇼핑을 즐기면서 무거워 보이는 쇼핑백을 가슴 가득 담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숨이 조여옵니다. 눈은 막히고 귀는 막혀 옵니다. 나만의 산소 호흡기가 필요하다는 목마름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쇼핑하는 사이 몰래 한 가득 숲을 쇼핑백에 담아 넣습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내 발뻗고 살 곳, 또한 여기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고 토로한다. 크로체는 "예술은 직관이요 표현이다"고 말한다. 서양에서 이탈리아 문화가 직관이 강하다면, 아시아에서는 중국문화권이 직관력이 강하다. 그녀의 착상계기는 이렇게 숨막히는 사회에서 산소 호흡기같은 숲을 쇼핑해야겠다는 그녀의 다급한 요청으로서의 직관이었다. 그녀는 현대 도시인이다. 숲을 쇼핑한다고 할 정도로, 현대인에게 '쇼핑' 개념은 의식 저변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몰래 한 가득 숲을 쇼핑백에 담아 넣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왜 숲인가?와 '몰래'라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과연 누가 숲을 쇼핑백에 담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그녀가 동양화 작가로서 우리의 전통산수화의 개념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산수가 그녀의 산소 호흡기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통산수화의 개념에서 왔다 . 그리고, 그녀는 현대 도시인이므로, 쇼핑이라는 개념을 빌어, 현대의 물량주의(物量主義)를 보여주는 동시에, 숲도 쇼핑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현대가 숨막힐 듯한 삶의 연속으로 우리에게는 인생에서의 '어떤 여가', 또는 '쉼'이 절대 필요라고 무의식에서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구모경_山水-Shopping_장지에 수묵_130.2×162.2cm_2006

산수-숲 ● 산수화는 중국 육조(六朝) 시대에 인물화의 명인인 고개지에 의해 인물전신(人物傳神)이 산수전신(山水傳神)으로 바뀌면서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당말(唐末)에도 아직 수석화(樹石畵)의 명인이 장조(張璪)일 정도로, 당대에도 수석화의 요구는 지속되었다. 사실상 한국같이 조그마한 나라는 아직도 '산수'하면 '수석'이나 '숲'을 연상할 정도로 숲은 산수의 대표적 상징이다. 마치 부분을 통해 전체를 암시하듯이. 그러나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당대(唐代)에도 아직 대산(大山) 대수(大水)로서 산수를 볼 정도로 대관(大觀) 산수로서의 시각이 서지 못했음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대산, 대수로서의 산수화는 송대에 완성되었다. 산수화는 북송대에 사실산수(寫實山水)가 있고, 신유학의 발달로 그것의 이치(理)도 밝혀진 후에, 원대에 정취화(情趣化) 되었다. 따라서 원 이후에야 산수화는 자유롭게 주조한 후 감동을 떼어줄 수 있는 산수화가 되면서, 이치나 정취면에서 자유로워졌고, 청대에 이르면 회화 모든 화과(畵科)로의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 중국의 '대산대수'로서의 산수화는 북송말에 일폭화(一幅畵)가 나오면서 양분화되었지만, 대산대수로서의 산수화가 없었다면 겸제(謙齊) 정선(鄭敾)의 「금강산전도」가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겸제 산수화가 육십대 이후에 그 필력이나 세(勢)가 좋아지고 기운생동한 산수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속에 금강산 전체가 흉중구학(胸中邱壑)으로 존재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구모경_山水-Shopping_장지에 수묵_130.2×162.2cm_2006

현대한국의 산수화 ● 현대 한국화단에서 산수화는 그 정체성을 잃었다. 산수가 남아 있다면 건강을 위한 요소로서의 산수자연 정도가 아닐까? 토레가 "예술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술의 쇠퇴는 자연에 대한 감정을 상실한데 연유한다" 고 한 것이나 K. 해리스가 현대에 초상화가 사라진 원인을 인간에 대한 존경이 사라졌기 때문으로 본 것에서 보듯이, 한국화단에서, 산수화가 사라지고 발전하지 않는 것도, 가장 큰 요인은 사람들이 산수를 사랑하지 않는 것 때문일 것이다. ● 북송의 곽희는 『임천고치(臨泉高致)』「산수훈(山水訓)에서 군자가 산수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 취지가 어디에 있는가? 고 물으면서, 그 이유를 누구든지 언제나 그렇게 거처하고자 하는바(所常?), 누구든지 언제나 그렇게 즐기고 싶은 바(所常樂), 누구든지 언제나 취미에 맞는바(所常適), 누구든지 언제나 친하고 싶은 바(所常親)로 압축한 바 있고, 그 결과 산수화의 이상 경계(境界)는 한번 지나가 볼 만한 것(可行者), 멀리 바라볼 만한 것(可望者), 자유로이 노닐어 볼 만한 것(可游者), 그 곳에서 살아볼 만한 것(可居者)이 되었다. ● 구모경의 「숲」이나 「산수-shopping」은 '자유로이 노닐어 볼 만한 것(可游者)' '그곳에서 살아볼 만한 것(可居者)', 즉 거유로서의 산수도 아니고 산수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산수는 아직도 그녀에게 우리에게 활력을 제공해주는 원천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눈 온 뒤의 숲'을 그렸고, 그 후 쇼핑백 속의 산수가 되었고, 그 후 긴 세로 막대형의 촘촘히 둘러싸고 있는 숲이 되었다. 그러나 숲은 주로 자작나무 숲이었고, 나무가 많은 숲이 아니고 겨울 산이었다. 우리는 겨울 산으로 무엇을 연상하는가? 그녀는 나무의 몸통이 가로무늬인 자작나무를 그린다.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러시아의 대단위 자작나무숲, 죽 이어져 있는 가로수로서의 자작나무숲은 풍요롭고, 우리에게 어떤 꿈을 선사한다. 나무껍질이 가로무늬로 흰색이 더 많고, 사람들은 그 얇은 껍질로 외벽을 장식하고, 또 그 위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자작나무에대해 친화적이다. ● 그러나 그녀의 「숲」에서의 자작나무는 무리도 적고 가냘프다. 현대의 우리가 투영되어 있다. 외롭고 암울한 우리가. 그러나 쇼핑백 속의 자작나무는 마치 나무막대기를 종이에 끼운 듯이, 여백이 그 위, 아래를 차단하면서 나무로서의 강인함을 보여주고 있다. 나무가 강해졌다. 나무는 그녀의 산소호흡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록색, 보라, 적자색의 현란한 쇼핑백 위에 얇은 순지가 붙여지면서 쇼핑백의 속성이 적어지고, 여백과 나무가 강해졌다가, 그 이후의 작품에서는 긴 세로 막대형의 수묵막대형이 흑백과 농담을 달리하면서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산소 호흡기로서의 숲이 현대의 숨막힘에서 그녀에게 산소를 공급해 그녀가 강해지고 여유를 얻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란한 쇼핑백으로 상징된, 현대의 모든 강하고 직설적인 중압감이 그 위에 엷은 종이가 발라지면서 그 힘을 잃고, 나무가 살아나고, 후기에는 숲이 그녀의 삶에서 주도권을 갖기 시작한다. 더구나 수묵막대는 또 하나의 광대한 자작나무 숲으로 그녀를 숲을 통해 소생시키고 있다 할 수 있다.

구모경_山水-Shopping_장지에 수묵_130.2×162.2cm_2006

장지 위에 수묵 ● 이번 전시는 장지 위에 수묵, 아크릴, 또는 장지 위에 수묵,순지로 표현되었다. 선지와 장지의 차이는 아마도 스며드는 선염의 차이일 것이다. 장지는 선지와 달리, 먹의 침투가 선지만 못해, 인간이 현대 세계와의 고투에서 어쩌지 못하고 겉돌면서 자신만의 어려운 고투(苦鬪)를 설명하는 좋은 매체가 되었다. 허버트 리드가 중국인의 수묵발명을 세계미술사상 그 유례가 없다고 극찬했듯이, 수묵도 하나의 표현매체이다. 일본의 수간채색처럼, 현을 위해 매체는 계속 고안되어야 하겠지만 화단내의 어떤 합의도 계속 필요하다. 한지에 현대안료는 미래에서의 그 변화를 알 수 없다. 이것은 앞으로 동양화단의 숙제가 될 것이다. 지금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인 앞으로의 숙제가 될 것이다. ■ 金基珠

Vol.20060711c | 구모경展 / GUMOKYOUNG / 具慕慶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