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의 지평을 넘어서다

오기영展 / OHKIYOUNG / 吳基榮 / painting   2006_0619 ▶ 2006_0624

오기영_수제종이, 안료, 염료, 감물, 합분, 먹_148×118cm_2005

전시오픈_2006_0619_월요일

제주문예회관 제2전시실 제주 일도2동 852번지 Tel. 064_754_0525

종이의 지평을 넘어서다 -오기영의 근작 ● 내가 오기영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3월 경희대 대학원 강의실이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오기영의 작품은 화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수묵의 판자촌 그림이었는데 그런 중에도 나의 눈길을 붙잡는 미묘한 감각이 어느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첫 시간 수업에서 오군의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며 이 그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나는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풀어 나가야할 사람은 물론 오군이지만 그러기 위해 내가 어떻게 이 학생에게 작용해야할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대학원 강의는 3, 4시간씩 쉬지 않고 연속되는 강의였는데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이 수업을 오군은 늘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임하였고 대학원 과정 2년 동안 누구보다 빨리 또한 깊이 내 강의를 받아들이고 이해했던 학생이었다. 수업이 끝날 즈음엔 오군의 질문에 답하느라 내가 입에 침이 마를 정도였고 그럴 때마다 오군은 여러 점의 그림을 들고 와서 보이곤 했는데 지난 시간에 들은 수업의 내용을 그대로 그림에 적용시키곤 했다. 가르치는 이에게 보람을 느끼게 만드는 제자는 그리 많지 않다. 오기영은 하나를 말하면 열까진 아니어도 거기에 버금가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드물게 보는 인재였다. 가끔 내 작업실에 들러 궂은 잡일도 도우며 배움을 마다않던 오군의 성실한 태도에 나는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제주에 내려와 작업을 하면서 가끔 우편이나 혹은 인편을 통해 작품을 보여주곤 했는데 작품들을 볼 때마다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기대를 넘어서는 성과에 내심 놀라면서 선생으로서의 뿌듯한 희열을 감출 수 없었다.

오기영_수제종이, 안료, 들기름, 고령토, 콩즙, 먹_70×123cm_2006
오기영_수제종이, 황토, 먹_65×94cm_2005
오기영_수제종이, 합분, 안료, 먹_34×34cm_2006

오기영은 종이를 단순히 그림을 그리기 위한 지지체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표현하고자하는 주제에 걸맞는 물성적 요소로 전환시키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 종이란 선이나 면을 담을 수 있는 2차원적 평면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찢거나 뚫거나 해서 나타나는 상흔, 스크래칭과 같은 가학적 행위로 말미암은 일종의 상처, 너절하고도 힘든 삶의 풍경을 연상케 하는 질료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달동네 판자촌, 스러져가는 폐허의 빌딩들을 종이라는 질료의 몸부림과 절규로서 표현해보려는 시도는 참신하게 느껴진다. 그리는 행위보다는 찢고 헤지고 바르는 등 종이와의 촉각적, 교감적 행위를 통해서 도시의 그늘이 자연스럽게 드리워진다. 재료에 대한 지식과 해석은 전쟁에 임하는 군인에게 있어서 총과 같이 아주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덕목이다. 아직 우리의 경우 선진 여러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재료의 중요성에 대해 아주 소극적임을 알게 된다.

오기영_수제종이, 안료, 염료, 감물, 합분, 먹_162×246cm_2006
오기영_수제종이, 안료, 합분, 황벽, 콩즙, 먹_162×130cm_2005
오기영_수제종이, 안료, 도토리속껍질, 먹_65×94cm_2005

그림은 정신적이거나 내용적인 것을 캔버스나 종이 그리고 안료 등의 물질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채색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고려불화의 예술적 완결성이 이 그림 속에 담긴 부처나 열반에 대한 종교적 열망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이것의 외형을 이루는 재료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기법적 완벽성도 크나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무리 좋은 주제나 소재라 하여도 이것을 담고 드러낼 수 있는 그릇이 기능을 하지 않으면 역시 전달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다수의 전시장을 돌면서 여러 작가들의 그림을 보며 늘 느끼게 되는 아쉬움이다. 그림에 접근하는 사고나 생각은 진지한데 재료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실패한 경우의 작품들을 종종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동화책속의 이야기가 알콩 달콩 맛나고 재미있듯이 그의 그림에는 그림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물성적 흥미로움이 가득하다. 절은 듯 배어나오는 염료의 색으로 인하여 이 흥미로움은 진지함을 동반하고 표피적 이해를 넘어선 깊이감을 더해준다. 오군의 전통재료에 대한 열성적인 학습과 훈련이 그의 그림을 이렇게 바꿔버린 것이다. 재료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오기영은 직접 보여준 셈이다. 그림의 길은 외롭고 험난한 길이다. 이 길은 지치기 쉬운 장거리 여행이며 이 여행 동안 겪게 될 많은 환난을 작가는 가슴으로 보듬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작가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는 좋은 소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심각한 저항적 요소로 다가오기도 한다. 삶의 퇴락된 질감을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능력은 전적으로 작가적 감각과 기질에 기인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오기영의 아름다운 눈빛이 영원히 반짝이길 기대하며 제주 고향에서의 전시에 갈채를 보낸다. ■ 정종미

Vol.20060619e | 오기영展 / OHKIYOUNG / 吳基榮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