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6_0526_금요일_05:30pm
한글라스 파란네모 갤러리 서울 강남구 신사동 592번지 윤성빌딩 1층 Tel. 02_512_5225 www.myhanglas.co.kr
화분, 꽃을 담는다. / 자연이 담기다. / 늘 그렇다. // 난 뭘 담을 수 있을까 ? / 담는 것부터 만들어야겠다. / 특히나 난 화분이 싫다. / 우리 집에서 내 방만 화분이 없다. / 무엇을 책임진다는 것엔 아직 익숙하지 않다. // 최소한의 책임만으로 생명을 길들일 수 있는 것이 화분이다. / 강아지나 새보다 훨씬 적은 노력으로 가능하다. / 하지만 늘 그렇듯 최소는 최대를 부른다. / 가장 약하다고 생각하는 혀가 그 부드러움을 오래 간직하듯이 / 화분은 가장 작은 노력을 요하지만 가장 큰 길들임의 대상이 된다. / 그렇게 사람을 길들인다, 어린왕자의 장미처럼 말이다. / 어린왕자의 별은 장미를 담은 화분이다. / 난 아직 / 장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_작업 노트 중에서
맥을 짚다(taking the pulse) ● 유리의 투명한 물성과 깨어진다는 성질 때문에 유리라는 재료를 쓰고 있다. 그 특성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화두에 현재로는 가장 적절한 재료다. 나의 작업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다. 어찌 보면 철학의 원초적인 질문들과 비슷하다. 그 중에서도 내가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은 가치관에 대한 얘기다. 철학용어로 인식론 정도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삶에서 보이는 현상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많은 다른 결과들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이고 또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 유리 작업은 이미지를 안에 담는 작업이다. 표면에 나타나는 형태뿐 아니라 그 속에 다른 형태를 넣고 싶다는 생각으로 유리를 선택했다. 물론 다른 재료로 그런 것을 만들 수 있겠지만 투명하지 않은 재료는 관념으로 끝날 것이고 투명한 다른 재료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중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있다. 처음 유리로 작업한 이미지는 어린왕자의 보아뱀이었다. 보아뱀의 형상을 유리로 만들고 어린왕자의 그림처럼 뱃속에 코끼리의 형태를 비웠다. 뱀의 형태를 보다 보면 안에 코끼리가 담겨 있다. 그런 이중적인 작업을 하면서 사람과 닮아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아니 나와 닮아있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나도 사람이니까 같은 말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속을 알 수 없다. 겉과 속이 다르기 일쑤다. 거기에 쉽게 깨어질 수도 있고 남에게 쉽게 상처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리가 가장 적절하다.
유리 화분 작업도 시작은 다르지 않다. 겉모양과 속이 다르고 그 공간에 다른 것을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왕이면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담고 싶었는데. 가능하면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이 살아 있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물고기와 식물을 넣었다. 그중에서 이번에 택한 것은 식물이다. 동물은 나를 포함하기에 오히려 쉽게 얘기 할 수 있다. 그들은 눈을 갖고 있고 인간 또한 눈으로 많은 것을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매개체의 감정은 직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식물은 눈이 없다. 식물은 우리와는 다른 표현 도구를 갖고 있다. ● 유리 화분 작업을 하면서 화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중에서 화분에 담긴 식물과 사회에 담긴 사람과 비슷한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화분은 식물의 틀을 만든다. 사회가 그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관을 만들듯이 말이다. 사람의 가치관은 쉽게 볼 수 없다. 흙에 가려진 식물의 뿌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 보기 힘든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유리 화분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동물과 다른 감정 표현 때문에 맥을 짚는 다는 생각을 했다. 맥이라는 것은 미묘한 떨림이지만 한의들은 그것을 통해 많은 정보들은 얻고 처방을 한다. 맥은 집중을 해야 느낄 수 있다. 정확한 맥을 짚으려면 더 많은 집중이 필요하다. 식물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맥을 짚듯 보아야한다. 사람 또한 그렇다. '나'라는 존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맥을 짚듯이 여리게 보아야 한다. 화분 작업은 나를 돌아보는 작업이다.
화분에 담긴 식물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최대한 답답함을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극단적일 거라 생각했다. 뭉크의 절규처럼 그렇게 내내 소리 없는 함성만 지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혹은 물에 빠져 숨을 참거나 그 또한 힘들어 익사한 사람의 표정이 적절할 것 같았다. 그만큼 절실한 이미지들을 담고 싶었다. 아직 식물과의 소통이 힘들기 때문에 그런 극단적일 때에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사람을 말한다. 혹은 나를 말한다. 사회에 갇혀 살면서 큰일이 생기지 않는 한 사회라는 울타리조차 느끼지 못한다. 맥을 짚듯이 좀 더 예민하게 사회를 보고 싶다. ● 황동규 시인은 '풍장'이란 연작시에서 그 14년간의 고민 끝에 마지막 구절로 뱉은 시구가 ' 조으는가, 꿈도 없이 '였다. 난 그렇게 죽음에 대해 관조 적일 수 있을까. 가족의 얼굴을 하나하나 흙으로 빚고 그것으로 유리 화분을 만들었다. 더 많은 생각의 장을 열기 위해 모두의 눈을 감겼다. 명상을 하는 것일까? 조는 것일까? 아님, 그것이 아니면... ■ 정광민
Vol.20060530a | 정광민展 / JUNGKWANGMIN / 鄭光民 / glass art.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