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Portrait

박진홍展 / PARKJINHONG / 朴鎭鴻 / painting   2006_0524 ▶ 2006_0613

박진홍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97×130.3cm_2006

초대일시 / 2006_0524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기획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특관 Tel. +82.(0)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어둠의 방 ● 노을빛에 물든..... 해지는 서녘하늘을 보는 사람의 얼굴은 한편의 풍경처럼 잠시 머문다. 대낮의 빛은 워낙 밝아서 차라리 세계의 색을 지우는 듯하다. 낮을 마감하는 노을은, 본래의 색을 회복하는 시간과 경계의 총체이다. 빛이 다 사라진 밤은 어떠한가. 세상은 어둠에 물들고 존재들은 밤과 한 몸이 된다. 사물도, 풍경도, 사람도 모두 밤이고, 어둠이다. 빛이 사라진 세계는 우리에게 어둠만을 보여준다. 하지만 어둠에 가리어 어둠으로 보일 뿐이다. 그저 어둠으로서의 사물, 어둠으로서의 풍경인 것이다. 그 생김이 마치 심연과 같다.(이 글은 작가 박진홍의 그림을 본 뒤, 수첩에 적어 두었던 것이다.) ● 어둠이 감춘 세계와 노을, 색이 사라진 한 낮에 관하여..... 이러한 관계를 알기 위한 방법으로 이른바 '긁은 그림'(스크래치)이 손꼽힌다. 종이 위에 여러 가지 색연필을 두텁게 칠하고 맨 위에 검은 색연필로 덮은 뒤, 못이나 동전으로 껍질을 벗겨보는 것이다. 검은 색연필 아래에는 온갖 색들이 숨어 있다. 빛이 사라진 세계에 숨어 있는 풍경들처럼 긁어낸 곳마다 제 빛을 드러내는 것이다. 완전한 어둠에 대한 경험은 인위적인 장치와 그림으로서만 얻을 수 있다. 가로등, 자동차등, 아파트 등을 모두 꺼도 빛은 다 사라지지 않는다. 달빛이 없는 곳조차 완전한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어둠의 방을 만들고 빛을 완전히 막아야만 완전한 어둠에 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박진홍의 그림은 어둠의 방을 만드는 데에서 시작한다.

박진홍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06

박진홍의 그림을 보면 어둠의 방이 떠오른다. 눈을 씻고 보면 그의 그림은 칠흑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의 그림을 보면 어둠의 방이 떠오르는 것일까. 처음에는 소설의 한 장면처럼, 창밖의 여자가 보였다. 그 다음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남자와 그림자를 보았다. 노을에 물든 한 덩어리의 빛으로도 보였다. 붓질 탓이겠지만 비에 얼룩진 창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유리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어둠으로부터 천천히 유리창에 다가온 인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밖에 있고, 그들이 어둠의 방을 서성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박진홍의 그림이 어둠의 방과 관계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가 그린 인상들이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이 그와, 그의 말투, 그리고 그의 몸짓을 닮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작가 박진홍을 만나면서..... 첫번째 실마리는 무거움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둠과 사물, 혹은 풍경과 일치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그림이 경쾌함 보다 무거움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니, 그의 무거움이 어둠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들여다보면 그림의 어둠은 무거움과 따로 놓여 있다. 몇 해 전의 기법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는 어둠과 무거움을 떼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위로, 아래로 움직인 붓질과 어둠의 천막을 찢고 자기 모습을 살짝 드러내는 인물들의 움직임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리하여 어둠은 온전히 무거움의 족쇄를 채우고 있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박진홍 자신은 이 어둠, 그리고 그것과 따로 존재하는 무거움을 해결하고자 한다. 여기서 해결이란, 그의 그림들이 치열하게 던지는 자기 영혼의 무게와 같은 것이고, 삶으로부터 그림의 세계와 어깨를 겨루는 그의 작가 정신에서 건져 올린 말이다.

박진홍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06

오늘 그의 그림을 향한, 그리고 그 존재들을 향한 어깨겨루기는 매우 새롭다. 그의 표현이, 그가 세계로부터 자신을 숨기거나(은일), 다른 현실의 존재를 이름 없는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얼굴 없는 자기가 실현되었다고 믿으며(익명), 그것이 일탈의 세계를 쫓도록 한다고 말했던 글쓴이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특히 따로 떼어놓은 어둠과 무거움, 그리고 자기와 대상 사이를 갈라놓은 그의 표현 방향은, 예의 그 작가 박진홍이 변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변화는, 그림 속에 술래잡기의 함정을 만들지 않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숨기지 않으며, 대상과 자신을 일체화하지 않은 데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대상들에게 자기를 이입하기보다 대상들에 대한 순수한 고찰을 쫓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글쓴이에게는, 어둠의 방에 스스로 가두었던 예전과 달리 그림 속의 그들조차, 길에서, 그리고 책방과 극장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박진홍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65.2×53cm_2006

그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재미(두 번째 실마리)..... 박진홍의 그림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흔히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움직임이다. 어떤 사람이 커다란 거울 앞에서 움직이고 있다. 거울 속 대상과 거울 밖 대상을 모두 담은 사진 속에서 거울 속 대상은 거의 멈춘 상태인데, 거울 밖 대상은 형체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많이 움직이고 있는, 그러한 사진을 본 일이 있다면, 이 장면을 쉽게 알 것이다. 사진은 사람의 눈이 잡지 못하는 순간과 움직임을 꼼꼼하게 잡아준다. 하지만 사진이 잡는 움직임의 특징을 박진홍의 그림에서 찾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의 그림 속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사람들은 숨죽인 듯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움직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이 박진홍의 그림 그 겉모습에서 건질 수 있는 재미라고 말할 수 있을까. ● 그림 속에 있는 인물들은 어정쩡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게 우리를 답답하게 느끼도록 하는 요인이며, 동시에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요소이다. 어정쩡한 그 위치며 움직임의 가능성은 옷깃을 스치는 소리처럼 아주 작다. 스윽..... 그것은 위, 아래로 움직인 붓질의 소리이기도 하지만, 어둠으로 사라지거나 어둠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이다. 이 어정쩡한 자세로부터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인물들이 멈춘 것인지 움직이려고 하는 것인지 살펴보라. 어둠의 속과 밖, 그 경계를 서성이는 인물의 주춤거림은 단순한 정지화면이 아니다. 비록 한 토막의 움직임이지만 그것은 연속적인 움직임의 부분이며, 독백을 하는 무대 위 배우의 중얼거림과 같은 몸짓이다. 박진홍의 구도들은 이러한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박진홍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41×27.3cm_2006

글쓴이는 더 많은 것을 기대하였다. 어떤 그림은 새롭고, 어떤 그림은 기대와 달랐다. 그가 변화를 꾀하면서도, 자기와 인물의 동일시를 다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다거나, 더 길게 어둠의 방을 서성이고자 하기 때문에 글쓴이의 기대는 욕심이다. 박진홍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밝은 들녘 위를 달리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를 바라고, 그런 인물들이 어떻게 그려질까 하는 (평론가의) 기대는 그저 상상일 뿐이다. ● 그는 자신의 욕구를 다 그리지 않는다. 조금밖에 그리지 않는다. 그가 일상의 대부분을 창작에 쏟고 있으니, 그리는 시간이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왜 욕구를 억제하는 것일까. 여태까지 우리는 그의 고집과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작가 정신의 발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글쓴이는 그의 그림에서 목마름을 느낀다. 그것은 그의 그림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것들, 이를테면 왜 군상을 그리지 않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유의 목마름이 아니다. 그가 여전히 딛고 새롭게 열고자 하는 어둠의 방이 그 자신을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도 아니다. ■ 이기만

Vol.20060526b | 박진홍展 / PARKJINHONG / 朴鎭鴻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