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 풍경을 보다

홍창제展 / photography   2006_0524 ▶ 2006_0530

홍창제_trvs051101_디지털 프린트_120×100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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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524_수요일_06:00pm

갤러리 아츠윌 서울 종로구 관훈동 55-1번지 Tel. 02_722_0048

보통 '풍경'으로 부르는, 즉 자연광 속에 놓여있는 풍경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우리 앞에 있다. 본다는 것은 '보는 자'의 경험과 관심을 넘어서는 것이 될 수 없다. ● 사진은 어차피 현실(혹은 풍경) 속 시간의 흐름을 일정한 노출의 선택에 의해 잘라내는 것이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놓인 풍경(혹은 사물)을 물리적인 시간으로부터 분리하여 고정된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데는 여러 가지 선택이 가능할 것이다.

홍창제_trvs031801_디지털 프린트_60×50cm_2005
홍창제_trvs041301_디지털 프린트_60×50cm_2005

풍경속에서 선택된 어떤 일부분을 인공광으로 분리해 내었을 때, 문득 풍경은 정물화(靜物化)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임에 가두어진 풍경과 그 풍경 속의 일부분이 인공조명에 의한 빛의 속도로 잘려 고정되어지는 순간, 그 배경이 되는 자연의 모습은 여전히 노출시간의 축적과 함께 '풍경'으로 남는다. 이 때 프레임 속의 이미지(빛의 기록)는 일정한 부분의 박제화(정물화) 되어진 부분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자연광으로 노출된 부분으로 나누어진 채 한 프레임 속에 고착되어 진다. 이것은 두 가지 광선 조건에 의한 이미지의 변환이 그 속에서 한꺼번에 포착됨을 의미한다.

홍창제_trvs050101_디지털 프린트_60×50cm_2004
홍창제_trvs050901_디지털 프린트_60×50cm_2005

시각의 주체로서의 '나'는 주어져 있는 상황, 다시 말해서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의 어떤 미적(美的) 인자들에 의해 반응해 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 혹은 풍경의 어느 부분을 조명이라는 조건에 의해 순간적으로 풍경으로부터 분리해낸다는 것은 '보다'라는 시각 행위의 주체적, 능동적 활동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빛을 만들고(조명), 조사각과 조명의 조건(빛의 높이, 방향, 세기 ..등)을 선택해 가는 동안 풍경은 능동적으로 제어되고 재구성된다.

홍창제_trvs051401_디지털 프린트_60×50cm_2005
홍창제_trvs051501_디지털 프린트_60×50cm_2005
홍창제_trvs051601_디지털 프린트_120×100cm_2005

자연에 고유의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인상파의 광선에 대한 분석적 태도로부터 이미 미적체험의 역사로 이루어진 바 있다. 예를 들면 벌이나 잠자리와 같은 경우 이미 알려진 대로 인간의 눈과는 다른 스펙트럼으로 사물의 색을 인지한다. 말 그대로 사물은 고유의 색을 가진 것이 아니라 빛에 반응하는 색조건을 우리 눈에 반사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물의 색을 결정짓는 것은 광선의 질과 관계된다. 나의 인공조명 사용에 있어서의 선택적 조건은 하나의 기준이 되어 사물과 풍경의 고유색으로부터 주체적 의미의 색으로 달리 해석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주체적인 행위로서의 '사진'에 대한 나의 인식과 태도이기도 하다. ■ 홍창제

Vol.20060524b | 홍창제展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