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感覺의 층위層位

쿤스트독 개관기념展   2006_0519 ▶ 2006_0615

감각感覺의 층위層位展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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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1부_2006_0519_금요일_06:00pm 2부_2006_0602_금요일_06:00pm

1부_2006_0519_금요일 ▶ 2006_0601_목요일 고산금_김승영_육태진_임소아_홍순환

2부_2006_0602_금요일 ▶ 2006_0615_목요일 구경숙_구영모_류장복_이택근_차기율

갤러리 쿤스트독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02_722_8897 www.kunstdoc.com

감각感覺의 층위層位 ● Gallery KunstDoc(갤러리 쿤스트독)이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 현재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 열분을 모시고 개관기념전을 개최합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미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조심스러운 접근을 해보고자 『감각感覺의 층위層位』展을 마련하였습니다. ● 감각感覺-현대미술은 우리에게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관념 속에 은닉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의 세계를 은닉하고 드러내어 양가적인 특성을 띤다. 부드럽고 딱딱하며, 정적이자 동적이고, 단순하며 경쾌하고, 고전적이자 현대적이고, 서구적이자 동양적인 감각의 세계가 갤러리 쿤스트독에 함께 자리하여 시각문화와 예술의 경계가 모호한 동시대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작가의 눈을 통해 바라본 탈역사의 현장을 경험하여 그 폭을 넓히고자 한다. 층위層位-작가들이 추구하는 자아의 정체성은 그들이 사용하는 매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픽션과 리얼리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실에서 예술의 정체성은 평면, 설치, 조각, 영상설치에서 구체화된다. 본 전시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현대미술이 매체의 다양성으로 전환되어 작가의 정체성이 매체를 다루는 태도에서 가시화되고 있음에 집중했으며, 매체가 담고 있는 의미의 층이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예술의 리얼리티와 현실의 리얼리티가 상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현장을 작품에서 읽어 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 저희 갤러리 쿤스트독은 글로벌화되어가는 시대에서 예술가들의 감각과 작품의 층위가 새롭게 부각되는 동시대 미술의 한 단면을 마련하였습니다. ■ 김승호

류장복_철암 큰 장날_종이에 콘테, 수채_56×76cm_2006

류장복 ● 류장복의 회화는 사진기 렌즈가 번역해내는 날렵한 시점의 원근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 않다. 풍경에 등장하는 뒷산의 규모가 전경의 대상을 훨씬 능가하거나 전경이 후퇴하기도 하는 역동성과 간간이 역원근법의 구조를 띤다. 그 결과 공간이 압축되어 보인다. 가로의 비례가 세로에 비해 통상적이지 않고 훨씬 더 긴 규격의 화면에서마저 대상들은 광활함을 잃은 채 전방의 관람자에게 접근하려 한다. 이 비례의 화면은 대게 수평선이 크게 드러난 장면이나 황량한 깊이의 공간을 가진 풍경을 위해 디자인되고 또 그렇게 줄곧 사용된다. 이 점은 얼핏 세잔의 회화 공간과 유사해 보일 법하다. 하지만 류장복의 화면은 망막에서 진행된 신체의 경험적 사건과 몸의 증상에 관한 기록인 점에서 세잔과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장면의 실재하는 현장감과 지역의 특성이 맵핑(mapping)된 점에서 더 멀어 보인다. 류장복은 자신의 회화 공간을 '생물'적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 술어를 생기와 실재감 정도로 연결해 보지만 그것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앞의 관찰을 통해 류장복이 자신의 매체를 진실의 추구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고 그 맥락에서 어림짐작할 뿐이다. 미술가에 의하면 '생물'적 회화 공간은 그 스스로 자신을 매체화하는 방식이고 신체의 물리적 진실과 대상의 시각적 진실이 통합되는 지점이라고 한다. 한편 류장복이 철암을 처음 찾았을 때의 인상이 이 말의 의미를 더 보증할 것 같다. 미술가는 철암을 처음 보고 유년기에 자신이 살았던 도시 변두리의 풍경과 흡사한 점에서 진한 향수를 비릿한 냄새처럼 느꼈다고 한다. 여기서 그 '생물'의 의미는 물리적 감각이 회복되고 원초적 감성을 자극하는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경숙_Invisible Torso 3_디지털 프린트_170×132cm_2004

구경숙 ● Invisible. 구경숙의 이 작업은 보이지도 않고, 지각할 수도 없는 것들을 향해 있다. 물, 세포, 혈액, 림프와 같은 몸의 성분들, 모나드, 단자와 같은 몸의 단위들처럼 그 실체를 알 수는 있지만, 감각 코드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을 겨냥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비(非)감각적 대상들에다가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현미경이나 적외선 사진 등의 물리적이고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차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가의 방법은 현저하게 몸(肉)적이고, 즉물적이고, 유사 과학적이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우선 사람의 등신대 크기 만하게 인화지를 여러 장 연이어 붙이고, 이를 빛에 노출시킨다. 그런 연후에 그 표면에다 현상액을 바른 포장용 공기비닐을 덮고, 그 위에 작가가 직접 드러누워 자신의 몸을 찍어낸다. 이때 인화지에 가해지는 공기비닐의 압력이 몸의 굴곡에 반응함으로써 자연스런 몸의 실루엣을, 몸의 음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컴퓨터에 입력해 색채 교정 등의 최소한의 조작만을 거친 연후에, 이를 최종적으로 한지에다가 출력한다. 그 이미지는 압력에 의한 비정형의 기포들과, 압력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채 흰 여백으로 남겨진 부분, 그리고 공기비닐에 칠해진 현상액의 일부가 흘러내려 고착된 이미지가 서로 어우러진, 유기적이고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

홍순환_Untitled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3

홍순환 ● 홍순환의 그림과 오브제는 어떠한 형태로든 감각적 형식을 취한다. 결국 작가는 전조와 암시가 팽배한 관념의 그림으로써 감각화와 형상화의 가능성에 붙잡히지 않으려는, 가급적 형상화의 가능성을 피해 달아나고자 하는 불가능한 기획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기획은 작가의 대개의 작업에서 그 기저를 이룬다. 마치 얼굴이나 집 또는 나무 기둥의 비교적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이란 기왕의 구조화된 세계에, 그 선입견과 편견에 붙잡히는 것이기라도 하는 양. 그래서인가. 작가는 얼굴이나 집이나 나무기등의 이름을 얻기 이전의 사물 그 자체에 주목한다. 그럴 때 비로소 자기외부로부터 유래한, 모든 명명 가능성에서 자유로운 사물 자체를 포획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는 내가 나의 규정성에 힘입어 사물/세계/회화를 여는 것이 아니라, 사물/세계/회화가 나에게 스스로의 비규정적 존재를 열어 보이는 것이다. 이런 사물과의 우연한 조우에 근거를 둔 수동적인 기획의 실천으로부터 마치 생각의 편린들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자동 기술적으로 풀어낸 듯한 날 것의 이미지와 회화적 자연 곧 원시주의가 느껴지며 그리고 극적 긴장감이 유래한다. 이로써 작가는 정신적인 공황의 상태로부터 달아나는 대신 이를 예술의 프로세스를 가능하게 하는 적극적인 계기로 삼는다. 이렇듯 작가가 기대고 있는 전조와 암시는 기시감(dejavu)과도 통한다. 즉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이 암시와 전조의 형태로 드러나며, 그 자체 기억의 습성과 회화적 프로세스가 만나는 접점이 된다. 예컨대 인체를 암시하는 형상 밑에 'ARABELA'라는 단어는 그림의 주체에 대한 명명임에도 불구하고 특정의 누구를 지시하지는 않는다. 이 그림은 작가의 여타의 그림들이 그런 것처럼 일정 정도 작가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기억의 행함이나 실현처럼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이 제공하는 최소한의 계기를 구실삼아 회화적 프로세스를 시작하거나 기억을 회화 속에 불러들여 재맥락화하는 것일뿐, 기억이 갖는 환기력이나 지시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태진_Tube_혼합매체_45×55×180cm, 00:02:24_2004

육태진 ● '육태진-나'의 이마고가 제시되는 방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반복'이다. 그리고 이러한'반복'이란 다름 아닌 그 이마고를 살해하고 파괴하려는 공격욕에 의해 지속된다. 즉 반복은 엄밀히 말하면'반복적 공격','반복적 자살'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라깡은 자기애란 것이 성애적 특성과 공격적 특성 양쪽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자신의 이마고는 주체를 매혹시키면서도 동시에 주체와의 차이(간극)로 인해 주체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한다. 결국 자기애는 동시에 자기에 대한 파괴를 수반하게 된다. 이를 라깡은'자기애적 자살공격'(agression suicidaire narcissique 또는 agression suicidaire du narcissisme)이라고 부른 바 있다. 육태진이 보여주는 자기애적 상황은 결코 어떤'종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종결될 수 없음, 종결의 반복적 시작, 종결의 반복으로 인해 얼어붙은 시간, 현실의 단선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으로부터 고립된 퇴행적 자기애의 차원인 것이다. 자신의 이마고는 아무리 공격해도 죽지 않으며 (이미 죽어 있으므로) 육태진의 튜브는 바로 그 이마고를 강박적으로 무한히 죽여 나가는 자동장치(automaton)이다.

차기율_생명-에너지-분출-순환_가변설치_2006

차기율 ● 작가는 이처럼 자신의 본성을 자연에서 찾는다. 땅으로부터 자신의 살과 피를 일궈낸 아득하고 먼 흔적을 찾는다. 그리고 이를 기억으로 되살려낸다. 작가는 이러한 땅의 기억을 지시하기 위해 'remembrance' 대신 'reminiscence'란 말을 쓴다. 대략적으로는 둘 다 기억, 추억, 회상, 환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전자가 단순히 특정의 사실을 기억해내는 계기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이보단 상대적으로 더 애매하고 막연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느낌과 기분을 되살려내는 회상의 계기에 가깝다. 마치 오랜 시간을 두고 축적된, 수많은 기억의 편린들이 켜켜이 중첩된 지층과도 같은 회상은 그 속성이 인식론적 차원에 속하기보다는 현저하게 몸의 속성에 가깝다. 아마도 작가는 적어도 체질적으로나마 이런 말의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단순한 환기가 아닌, 현재의 존재 전체가 송두리째 존재의 뿌리에로 되돌려지는 것과 같은.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시간적이고 역사적이다. 그리고 현재보다는 과거에 속하며, 이는 작가의 작업을 근원과 본질 그리고 원형에 접맥되게 한다. 차기율의 작업을 지배하는 주제의식은 자연, 생태, 환경에 맞닿아 있다. 단순히 자연으로부터 소재를 차용해올 때나, 혹은 이보다 그 범주가 더 큰 환경을 테마로 작업할 때조차 작가는 주어진 자연조건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급적 본래의 원형 그대로를 보존한다. 단지 최소한의 인공적인 접근만을 꾀하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본성이 드러나게 돕는 한편, 이렇게 드러난 자연의 본성이 작가의 개인사적인 정체성과 통하게 하고, 이를 재차 보편 상징에 연결시키는 방법으로써 타자와의 소통을 꾀한다.

구영모_Untitled_혼합재료_200×200cm_2006

구영모 ● 진정한 실체란 관념으로만 주어질 뿐, 감각적인 형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궁극적인 실체, 절대적인 형태, 절대적 색채의 존재를 가정하는 일종의 본질주의 개념이 깔려 있다.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가 미 자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미의 순수 관념을 상기시킨다고 본다. 감각의 흔적을 가능한한 지우는 대신 순수 관념을 상기시키는 최소한의 회화적 장치에 몰입한다.

임소아_Zyklus-2_혼합재료_2006

임소아 ● 임소아는 현재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다.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녀의 작업세계는 색과 사각의 면으로 종합된다. 사각평면의 한계를 입체로 극복하고, 입체의 형태문제를 평면으로 대체하여 색의 형태와 입체의 색상이 상호간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알파벳과 원, 사각, 삼각 등의 기호가 수직과 수평적인 색면으로 상호간 소통을 이루기도 하고 한편으론 화면의 공간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깔끔하게 정선된 작품의 존재방식은 그녀의 독특한 제작방식에 따르는데, 분활된 하얀 면이 기호학적인 색면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섬세한 구조를 띠고, 단면들이 공간에서 조우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고, 자른면과 모여진 면이 혼합하여 다단층을 이루고, 자르고 뚫은 기호가 사각의 틀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면들이 쌓이고 겹쳐져 단순한 구조에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고, 원색들의 형태가 사각의 존재를 가시화 시키는 작업방식이다. 탈역사화된 오늘날, 다양한 작품의 존재방식이 색과 면 그리고 입체와 평면으로 구체화 된다. 임소아는 추상미술의 역사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한다. 그녀의 작품은 몬드리안이나 혹은 바넷트 뉴먼과는 달리 사각면과 입체적인 면이 담론을 이루어 차이가 있다. 단순한 면이 색으로 가시화 되고 단순한 색은 다시금 면의 존재를 입증한다. 서양적인 추상면이 동양적인 색으로 가시화 되어 작가의 정체성은 미술의 역사와 동양과 서양의 담론에서 찾아진다. 평면과 동양, 입체와 서양의 협주곡은 그녀만의 경험에서 벗어나 우리의 현주소를 다시금 인식하게 한다.

이택근_물위에 뜨는 돌_혼합재료_145×60×80cm_2003

이택근 ● 이택근은 그의 '표면의 모방에 의한 형태 동일성의 착각'을 통해 좀 더 정확한 관찰 방식을 촉구하고, 자연적인 속성과 인위적인 속성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세분화된 설명을 제시하려 한다. Fischli & Weiss가 채색된 합성재료로 이루어놓은 인공적인 작업장의 세계를 생각해 보면, 그곳에서 사람들은 관찰자로서 즐기는 듯 반응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마치 인간의 모방 충동이 인간의 작업을 광대 같은 방식으로 인위적으로 어렵게 만든 듯하며, 산업적 완성품으로 쉽게 만들어지는 방식을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스스로-제작 가능한 것에 대해 강한 집착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스스로의 제작 가능성은 이중적인 계몽적 방식이 서로 혼합된 것으로, 맹신적 자연주의자들이 문명에 불만을 품고 숨어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눈을 찡긋하면서 수공업을 가지고 우월한 힘을 가진 기술 세계와 한판 승부를 겨루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택근의 모조 예술은 우리를 어떤 다른 착각의 경험과 만나게 하려는 듯 보인다. 그가 처음에 시작한 것은 나무껍질, 나무줄기 단면 같은 자연물의 표면을 모사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착각을 일으키는 소재들로 일상적 조형물을 모사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착각을 일으키는 소재들을 도입했다 해도 예를 들어 자갈더미의 모사에서와 같이 자연 대상물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조형물 제작을 위한 순수한 실질적 필요 외에도 그 작품의 바탕에 놓여있는 의도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자연과의 경쟁으로서, 그 경쟁은 자연을 대체하고, 그럼으로써 자연을 처리해버리려는 미적인 경쟁으로 전환될 수 있다. 한편 이택근의 오브제는 조형물이 만들어지면서 들어간 무한한 인내와 섬세함을 통해 그가 자연에 대해 지닌 경외감을 입증하고 있는 듯 보인다. 또한 조형물들의 조형물이 문제가 되는 바로 그곳에서 이 수공업적 꼼꼼함은 익명의 산업적 생산과정에게 주체의 주의깊은 인내심을 제시해 보여주며, 생산과정에서 사람을 몰아대는 시계의 째깍거림에 명상적 느림의 호흡을 부여해 주려는 듯 보인다.

고산금_오늘도 온종일-거미노래_면사, 울, 코바늘 뜨기_32×56cm_2006

고산금 ● 본인의 작업은 변형의 개념을 기본적으로 한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사용의 개념과 범주를 변환내지 확장함으로써 흥미를 유발시킨다. 삶에 대한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관계를 수공의 과정을 통해 작업에 조우시킴으로써, 모호한 삶의 진실을 찾고자 한다. 근래의 작업중 하나는 신문지면(The New York Times)과 텍스트(2000년 6.15 남북공동성명에 관련한 신문기사)를 하나의 오브제로 인식하여 진주구슬로 자역함(transliteration)과 동시에 이용된 사건의 내용에 진솔하게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본 작업은 내용과 진실, 텍스트가 갖는 진실과 오보에 대한 함의, 언어가 갖고 있는동시적 투명성과 불투명성의 관계, 그리고 의미에 대한 폭로와 숨김이라고 하는 양면성을 나타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체계화된 신문의 편집형식, 즉 신문기사가 가지고 있는 문단, 활자의 통일성, 기사의 명료성 속에 상징성을 내포한 흰 백색의 사물인 순수한(신문기사와 어떤 연결도 없는) 진주알이란 오브제(한알의 진주를 알파벳 대신 패널에 접착 또는 다른 형식을 이용)가 개입되면서, 침묵의 언어가 진주 속에 투영된다. 본인은 신문기사와 텍스트가 갖는 명료성을 제거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이 갖는 미학적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이것을 통해 관객은 문자 언어로 되어진 기사와 텍스트를 빛으로 가득한 패턴, 즉 사물의 객관적 역할을 주관적 인식을 통하여 변환시키고 재해석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변형은 새로운 직관에 의해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하여 동시에 관객 개개인의 선험적 지식과 경험의 토대 위에 상상의 오브제로 재창조 된다. 한알의 진주는 한 단어를 지우고 연속적인 문단이 지워지며, 동시에 한줄의 선을 이루게 되며, 선들이 합쳐져 한면이 패턴을 만든다. 작품의 제작과정은 본인에게 풍부한 명상을 제공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작품의 제작과정은 제례나 의식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진주알을 한알 한알 붙이고 배열하는 강도 높은 수공의 노동과정, 다시 말해 반복적인 작업의 형식과 세밀한 주의를 통해 생산되는 작업은 주관적인 오브제로 표상된다. 이것은 이러한 작업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작가 또한 하나의 오브제로 개념되어질 가능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의 작업에 제시된 역사적인 사건과 사물에 대하여 부주의한 변환이 없도록 심사숙고 하게 된다.

김승영_Mind_혼합재료_2005

김승영 ● 김승영은 물, 나무, 흙, 낙엽 등 자연의 재료와 철 등을 활용,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 안에 이들을 담아내는 설치작가이다. 그는 자연의 변화 원리를 작업에 반영하는데, 자연의 법칙을 통해 우리의 삶을 조망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다. 자연의 재료를 이용한 「서랍장」, 「반영」, 「물」 등 1994년부터 1998년까지의 작품에서 자기모색을 위한 자연과 작가자신의 관계에 주목하던 김승영은 1999년에 들어서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희미한 인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흰색으로 뒤덮인 동일한 크기의 캔버스를 기본으로 제작한 「기억의 문」, 「기억의 방」은 정형화된 현실에 실망하면서도 계속해서 인간관계를 맺는 현실 속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간에 결국 그것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일궈내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뉴욕 P.S.1 국제 스튜디오에서 거주하고, 뉴욕의 미술계 저변을 훑은 김승영은 이후에도 언제나처럼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긴밀한 소통을 시발점으로 자신의 정체성 모색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계문화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겪어야했던 심리적 위축과 문화적 충격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아의 정체성을 묻고, 기억을 더듬으면서 자아 성찰의 공간에 관한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 갤러리 쿤스트독

* 각 작가별 텍스트는 Ursula Panhans-Buehler, 고충환, 김원방, 이희영 등의 작가비평문중에서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Vol.20060519a | 감각의 층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