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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511_목요일_06:30pm
작가와의 대화_2006_0518_목요일_06:30pm
스페이스 셀 서울 종로구 삼청동 25-9번지 Tel. 02_732_8145 www.spacecell.co.kr
세 번째 집 작업으로 개인전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감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첫 번째 두 번째 작업에서 만족스럽다, 만족스럽지 않다의 문제가 아닌, 실제 사랑과 사람, 그리고 집에 관한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기본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거창하게 서울시 내의 25개의 구도 아닌, 값비싼 최고의 주상복합 아파트도 아닌, 기본적인 집, 집이라는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가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 2850개의 상자가 쌓여서 한 명이 살 수 있는 200X200X200 크기의 집으로 이루어지며, 한 명의 사람이 살기 위한 여러 개의 상자의 사용은 결국,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런 점에서 2850명의 사람이란 2850개의 집이 될 수도 있다. 재활용되는 종이 상자들을 40X20X20 크기의 종이 벽돌로 만들어서 집을 짓기 위한 종이 벽돌로 사용한다. 전시가 종료된 이후에는 본래의 재활용 종이로 돌아가서 재활용 업체에 판매된다. 이렇게 판매한 금액은 '해비타트(http://www.habitat.or.kr)'에 기부하여 실제로 집이 지어지는데 사용된다. 종이 벽돌들은 재활용 업체에서 작품의 가격이 아닌 재활용 종이의 무게로써 가격을 받을 것이다. 아마도 그램(g)당 가격으로 계산될 것이다. 3월말부터 4월말까지의 작업 기간과 5월말까지의 전시 기간, 2850번의 작업 과정들은 2850명이 살 수 있는 집으로 지어질 것이다. ■ 이혜진
분양 받는 집, 소유하는 집, 참여하는 집 ● 이혜진은 몇 해 째 집(house)에 관한 작업을 하고 있다. 각기 다른 형태의 집들은 작가에 의해 매 번 다른 방법으로 관객에게 소유된다. 어릴 적에 보았던 어항 속 금붕어들의 집이었을 법한 작은 모형의 집, 그 집의 모양은 사실 꿈속에서나 등장하는 집으로써 아직 살아보지 못한 집이다. 이혜진은 사랑이 가득한 집이라고 배웠던 그 집에 서울시 내의 주소를 부여한 후 분양에 들어갔다. 전시기간 중 분양은 성공적이었으며, 예상대로 강남과 평창동의 큰 집들이 가장 먼저 분양되었다. 이어 이혜진의 다음 집은 강남의 높은 빌딩과 브랜드 아파트로 조합된 두툼한 종이집이다. 이 종이집의 분양 방법은 젠가(jenga) 놀이와 유사하다. 아슬한 빈틈을 계산하여 중간에서 하나씩 빼내는 방법, 그러한 아찔한 놀이 방법을 통하여 관객은 또한 그 멋진 빌딩을 소유하게 된다. 높이 쌓여 있는 젠가 빌딩은 분양을 통해서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야경 속의 집들이다.
나도 집이 갖고 싶은데, 당신도요?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건물, 가족이 생활하는 터전'으로 정의 되는 사전적인 집의 의미는 집과 가족, 그리고 행복한 가정의 3요소에 대해서 어떤 연결고리를 부여하는가? 불행히도 국어사전엔 집과 가족,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끈끈하게 붙여 놓은 흔적은 없다. 다만 작가가 가끔 그렇게 명명할 뿐이다. 그러나 관객의 집에 관한 소유욕은 작가의 의도대로 살고 싶은 위치 혹은 살고 싶은 집의 형태, 살고 싶은 층을 선택하면서 드러나게 된다. 이는 또한 욕망의 분양이며, 예술품의 수요로 이어지기도 한다. 작가는 집의 소유욕망을 이용해서 예술품 생산과 판매에 성공한 것이다.
그럼 이제 이혜진의 세 번째 집은 어떻게 분양되는가? 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물음과 동시에 진행된다. 쓰레기장에 분리되어 있는 재활용 쓰레기, 그 중에서도 종이 박스는 다른 종이로 거듭나기 전 이미 이혜진의 '집'이 된다. 종이 박스와 종이 달걀 판은 차곡차곡 쌓여서 집의 재료가 된다.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이 쌓음은 집에 대한 작가의 염원임과 동시에 소유자의 욕망이다. 거주 형태로 되어 가는 종이집은 이번에는 더욱 견고하다. 커다랗고 견고한 이 집은 다시 종이 박스가 되어서 집을 지어주는 시민 단체에 현금으로 기부되기에 이른다.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에는 실제로 10만 9000원이라고 가격치 매겨진 집이 경상남도 거창에 있다는데 이 집만큼은 될까? 물질재화로 바뀐 작품은 그 역할의 변화에 어떠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세 번째 분양은 그 누구의 욕망도 가득 채워 줄 수 없으며 소유에 대해서도 거론할 필요가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욕망을 표상했던 작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욕망으로 빚어진 집은 재활용이라는 구조 속에서 돈이 되고 이 돈은 다시 집을 지어주는 데에 사용되는 순환의 고리를 갖는다. 이는 단순히 작품의 사라짐으로만 이야기되는 것은 아니며 예술 작품의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사회 참여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어떤 단어로 함축될 수 있을까? 그것은 작가의 작품 제목으로 종종 사용되는 'LOVE'는 아닐까? 러브, 러브는 단순히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추상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작품이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대답한 작가의 원대하고도 소박한 단마디 함의어다.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사랑으로 보였으면 좋겠어요.」 ■ 신윤선
Vol.20060516b | 이혜진展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