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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502_화요일_05:00pm
행사_나얼표 와인제조
정 갤러리 서울 종로구 내수동 110-36번지 2관, 지하 Tel. 02_733_1911 www.artjungwon.co.kr
일상의 리얼리티, 또는 삶의 리얼리티는 타자의 이야기를 확장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타인을 통해 시각언어를 풀어헤치고, 풀어헤친 비쥬얼은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담게 되는 것이 창작의 알레고리다. 유나얼은 이러한 타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현실을 투사하고 복제한다. 그가 택한 정제되지 않은 방식과 재료들-버려진 문짝, 찢어진 종이 박스-은 대상에 관한 막연한 상상감과 선험적 리얼리티를 발현하게 됨으로써 가장 비현실적인 리얼리즘을 양산하게 되는데, 그것은 흔히 외면하려 했던 상처이거나 삶의 한 춤에 슬쩍 감추고 싶은 세상의 치부이자 고통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측면으로 설명한다면 그의 작업은 한편의 멜로이거나 신파지만 멜로에 정신이 개입될 경우 그것은 전혀 다른 맥락으로 풀어야한다. 멜로로 저항하고 몸짓한다는 것은 자칫 감상적이며 심미적인 분위기에 치우칠 우려가 있으나 그곳에 시대적 정신과 견해가 개입되면 이내 예술성 농한 작가의 목소리로 전이되어 인간의 정서를 사로잡는 파장과 함께 설득력 있는 울림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 그가 굳이 흑인이라는 선명한 인종적 소재를 다루고 주류에 반하는 시선을 내비치고자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비주류에 편입시키고자하는 그의 절대적 의식 때문이다. 주류의 목소리로는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이너만이 가질 수 있는 사회적 트라우마 또한 겪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 집에서나 발견됨직한 문짝을 캔버스 삼아 그린 검은 얼굴은 꽤 생경하지만, 매체를 통해서만 겪게 되었던 우리의 비현실이기도 하다.
종이박스와 괘짝, 버려진 문짝들에 한숨씩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에서 세상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대신에 느긋한 관조로 아픔을 버무리는 작가의 첨예한 손길이 또 다른 회화적 문제 속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 그런 문맥에서 바스키야가 택하였던 낙서가 주는 유희적 자극이나 유나얼의 키치문화는 동류의 카테고리 안에 묶을 수는 있지만, 때로 감정의 허구를 말하는 바스키야의 실랄한 냉소에 비하면 유나얼은 지나치게 따스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가 만든 검을 얼굴의 사람들은 불쑥 튀어나와 이야기를 건넬 것만 같은 착한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름답지만 치명적인'이라는 흔한 말이 있다. 아픔을 통해 표현되는 아름다움은 때론 치명적이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란 것은 때로, 타자의 눈에서는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삶의 리얼리티는 '자아'이기 전에 '타인'에서 시작되어야하는 것이 더욱 진실하고, 절실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얼은 이런 '타자'에서 시작된 아픈'아름다움'을 찾아 끊임없는 여행을 해오고 있는 셈인데, 이번 전시는 그가 담고자했던 음악안의 이야기와 그가 안고 가야하는 타인에 관한 진실과 아픔을 함께 보여 준다. 찾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리얼리티. 삶은 아름답지만 또한 모순되어, 음악의 음표처럼 춤을 추고 소통한다. 우리는 이제, 비주얼을 듣는다. ■ 문예진
Vol.20060502b | 유나얼展 / YOONAUL / painting.installation